은퇴했으니 일단 스키부터 6
전날 먹은 약이 제 몫을 했는지 오스씨는 한결 개운하다고 했다. 나 역시 밤새 뒤척였지만 아주 조금은 나아진 느낌이 있었다.
밖의 기온은 영하 18도.
어제에 이어 또 최저기온을 갈아치우는 중이었다.
요양이 맞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실력이 눈에 띄게 붙고 있다는 감각이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결국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최상급인 레인보우 슬로프에 다시 올랐다.
원래도 바람이 세기로 유명한 곳인데 이날은 거의 돌풍에 가까웠다. 리프트 위에서 몸이 좌우로 흔들렸고 슬로프에 앉아 잠시 쉬는 동안 스키부츠가 서서히 얼어붙었다.
이번 시즌 처음으로 발끝이 시렸다.
진짜 춥다는 뜻이다.
감기 기운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오스씨는 태연했다.
“이 정도 기온이면 바이러스도 다 죽어. 멸균실에서 스키 타는 거지.”
스키 안 타고 강릉에 다녀와서 감기에 걸렸다는 논리까지 덧붙였다.
말이 되든 말든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지금은 스키를 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저녁을 먹고 또 나갔다.
약 기운에 나른하던 몸이 칼바람을 맞자 오히려 씽씽해졌다. 정말로 바이러스가 활동을 멈춘 듯 한 시간 반을 씽씽 내려왔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코가 완전히 막혀 있었다.
멸균실은 없었다.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는 막 정설을 해둬서 설질이 좋은 오전과 야간에만 타기로 정해두었다. 오후에는 글을 쓰거나 한 달 살이의 무료함을 달래는 일정으로 시간을 채운다.
이날 오스씨가 밀린 빨래를 하는 동안 나는 감기 기운을 핑계로 낮잠을 잤다.
일어나서는 용평에서 운영하는 미디어 전시장 〈이나트〉에 갔다.
주말에 비슷한 형식의 전시장인 아르떼 뮤지엄을 다녀왔지만 X5 시즌권자는 추가 할인이 된다는 말에 또 마음이 흔들렸다.
할인 앞에서는 늘 약해진다.
아르떼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소소하게 즐기기 좋았다. 아이들이 특히 좋아할 법한 공간이었다.
나는 이런 유치한 세계를 여전히 좋아한다.
귀엽고, 조금 과장되고, 괜히 반짝이는 것들.
어릴 때 나는 부모와 함께 여행을 다닌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 장면을 통째로 건너뛰고 자란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비슷한 걸 찾아 헤맨다. ‘부모와의 놀이’, ‘부모와의 여행’ 같은 기억을 나중에라도 흉내 내듯 채워 넣는다.
내 안의 아이가 이런 공간을 발견하면 웬만하면 들어주려 한다.
이 아이는 오래 기다렸다.
다행히 오스씨는 내가 하자고 하면 군말 없이 함께해 준다.
띠동갑 연하 애인의 취향을 꽤 성실하게 따라주는 편이다.
그게 고마워 이나트 굿즈숍에서 ‘삼양목장 우유로 만든 딸기 전병’과 ‘평창 수제 맥주 4종 세트’를 샀다.
서울에서 만날 오스씨 가족에게 줄 선물이다.
아침에도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창문을 여니 여전히 바람이 날카로웠다.
오전은 숙소에서 보내고 점심을 먹고 나서 스키장으로 나갔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타는 오후 스키였다.
설질은 우리가 타던 오전과 확연히 달랐다. 며칠째 이어진 바람에 눈이 쓸려 나가 군데군데 빙판이 드러나 있었다. 그 위를 묵묵히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니, 설질 좋을 때만 골라 타는 우리의 일정이 새삼 호사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 호사를 제대로 누려야겠다.
딱 두 시간만 타고 돌아왔다.
저녁은 외식하기로 했다. 횡계읍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자는 명분도 붙였다. 술도 한 잔 걸치려고 리조트 셔틀버스를 탔다. 읍 단위 동네에서는 버스를 타는 일조차 여행처럼 느껴진다.
작년에 오삼불고기를 먹었던 ‘금천회관’에서 이번에는 물갈비를 주문했다. 그냥 돼지갈비맛. 대신 반찬들은 여전히 좋았다. 조금 오래 부어라 마셔라 하고 싶었지만, 셔틀 시간에 맞춰야 해서 한 시간 반 만에 자리를 정리했다.
숙소로 돌아오자 오스씨는 그대로 잠들어 아홉 시간을 내리 잤다. 운동하고 먹고 자고. 원정 훈련 중인 선수가 된 거 같았다.
한 달 살이를 시작할 때는 낯선 공간의 자극에 취해 모든 것이 재미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곳도 금세 일상이 된다. 같은 슬로프, 같은 길, 비슷한 식사.
권태는 생각보다 빨리 자리를 잡는다.
신선한 자극이 필요했다.
넷플릭스를 뒤지다가 일본 게이 연애 프로그램 〈보이프렌드〉를 발견했다. 원래 이런 프로그램은 잘 보지 않는데 촬영지가 홋카이도라 괜히 눈길이 갔다. 그래서 여름에 찍은 시즌1은 건너뛰고 시즌2부터 보기 시작했다.
“어? 이거 은근히 재미있다.”
“출연자들도 다 잘생겼어.”
화면 속 남자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표현하고, 그 마음을 받아들일지 고민한다. 단순한 구조인데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게이 세계와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게이 세계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식성’이라는 기준이 있다. 아무리 다정하고 헌신적이어도 그 범위 안에 들지 않으면 시작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처음 만나는 순간 이미 가능성이 정리되기도 한다.
그래서 자꾸 계산하게 됐다. 저 사람들은 이미 분류가 끝난 상태에서 저 밀고 당기기가 가능할까.
그런데 출연자들은 의외로 태도와 진심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렇게 마음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관계가 시작될 수 있는 세계라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스키 쪽으로도 새로운 자극이 있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유튜브 스키 채널이 있는데, 강사는 스키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플레이트는 계속 진화하는데 강습법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오토크루즈 기능이 있는 전기차를 타면서 수동 클러치 조작법을 배우는 셈인 거죠.”
그가 말한 대로 해보니 훨씬 수월했다. 가파른 경사에서도 덜 미끄러졌고 힘도 덜 들었다.
새로운 방식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오스씨도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턴 하나 할 때마다 너무 힘이 많이 들어갔거든.”
전반에 힘을 싣고 후반에 풀어주는 식으로 바꾸자 훨씬 편해졌다고 했다.
보통 같이 출발하면 내가 먼저 내려가고 오스씨를 기다리곤 했는데, 쫓아오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동안 “할매 스키 탄다”라고 놀렸는데... 이제는 뭐라고 놀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