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했으니 일단은 스키부터 7
용평에서 스키를 타는 마지막 날이다. 일정상 내일까지 머물지만 내일은 아침 일찍 서울로 이동한다. 사실상 오늘이 마지막 스키다.
요즘 실력이 붙고 있다는 게 분명히 느껴진다. 그래서 일부러 경사가 급한 레드와 뉴레드 위주로 탔다. 오전에 세 시간. 몸은 피곤했지만 기분은 묘하게 들떠 있었다. 마지막 날이면 괜히 조금 더 욕심이 난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오대산 상원사로 향했다. 월정사 입구의 단골 산채정식 집은 용평 스키 여행의 고정 코스다. 예전에는 정식을 시켜서 반찬을 거의 다 비웠는데 이번에는 산채비빔밥만 시켰다. 나이가 드니 양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오스씨는 나물이 예전보다 질겨졌다고 했다.
‘당신 이가 약해진 건 아니고?’
농담을 하려다 멈췄다.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 내내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그렇게 맛있다며 먹던 것들이 예전만큼은 아니다. 음식이 변한 건지, 우리가 변한 건지. 어쩌면 투덜대기 좋아하는 고집쟁이 늙은이로 변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상원사는 늘 가봐야지 하면서 한 번도 들르지 못했던 곳이다. 비포장길의 눈이 녹았다고 해서 올라갔다. 8킬로미터를 달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순간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여기 온 적 있는 것 같은데?”
깃대봉의 부엉이 동상을 보고서야 확신이 섰다. 우리는 여기에 와본 적이 있었다.
한참을 올라오면서도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서글퍼졌다. 그런데 막상 절에 들어가 보니 왜 기억이 희미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공사 안내판과 불사 모금, 어디에서나 볼 법한 전각들. 겨울 산에 눈이 없으면 구분이 더 어렵다. 이 절이 그 절 같고, 그 절이 이 절 같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효자손 하나를 사서 내려왔다. 기념품이라기보다 다녀갔다는 표시쯤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그릇 굽는 집 카페’에 들렀다. 차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진열된 그릇들이 유난히 예쁘다. 충동구매 욕구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그릇 쇼핑은 끊은 지 오래인데.
“최근에 면기 하나 깨지지 않았나?”
대체품이라는 명분이 생기자 합리화는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결국 그릇 하나와 우리가 마시던 라테 잔을 함께 계산대에 올렸다.
한 달 살이를 하면 인터넷 쇼핑을 못 하니 생활비가 줄겠거니 했는데 이런 암초가 있다.
저녁에는 용평에서의 마지막을 기념하며 메가그린 슬로프로 갔다. 그동안 일부러 피했던 곳이다. 인공눈 기계에서 날아오는 눈발이 싫어서였다.
하지만 이곳은 내가 처음 스키를 배운 슬로프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이 각도에서도 버벅거리며 내려왔다.
지금은 카빙 턴을 즐기며 순식간에 내려온다.
성장이라는 감각을 가장 쉽게 만들어 주는 취미가 스포츠다.
메가그린을 몇 번 더 내려오고 숙소로 돌아왔다.
처음 용평에 도착했을 때는 동선도 낯설고 스키를 들고 다니는 일도 번거로웠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슬로프와 리프트, 카페와 식당까지 모든 길이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다.
잠깐 머문 곳인데도 어느새 생활이 되어 있었다.
1월 24일, 토요일
용평을 떠나는 날이다.
보름 동안 묵었던 모나용평 타워콘도. 보일러는 말을 잘 듣지 않았고 리프트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다. 몇 번이나 다시는 여기서 묵지 않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막상 짐을 싸고 바닥을 한 번 더 훑어보니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일부터 묵게 될 하이원 숙소는 이보다 훨씬 작다.
완벽한 숙소를 원하면 그만큼 값을 치러야 한다.
지금 우리 형편에 이 정도면 충분히 호사였다.
창문을 열어 마지막으로 슬로프 쪽을 한번 바라봤다.
내년에도 여기서 다시 스키를 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