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했으니 일단은 스키부터 8
용평에서 서울까지는 두 시간이면 닿는다. 그런데 서울에 들어와 논현동 스키숍까지 10킬로미터를 가는 데 삼십 분이 걸렸다.
“우리, 서울에선 살지 말자.”
한강 다리를 지나칠 때마다 차들이 강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신호가 바뀌어도 차는 몇 미터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면 멀쩡한 위장도 체할 것 같았다. 서울 사람들은 이런 교통 속에서 어떻게 숨을 고르고 사는 걸까.
스키숍에서는 미리 주문해 둔 스키를 받았다. 6년 전 산 카빙스키는 날렵한 스프린터 같은 모습에 반했었는데 이번에 구입한 친구는 커다란 도를 쓰는 무림고수 같은 투박함이 매력적이었다.
사장님은 바인딩을 장착하며 장비 이야기를 길게 풀어놓았다. 절반은 용어를 몰라 귀 밖으로 흘러나갔고 절반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였다.
특히 기술 향상에는 신체 조건의 한계가 있다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이 나이에 폼을 더 멋지게 만드는 데 집착하기보다는 근육과 유연성을 기르는 편이 낫다고 했다. 운동은 결국 몸의 영역이라는 것. 요령으로 넘을 수 있는 선은 생각보다 낮다.
강습 이전에 일단 몸부터 만들자.
장비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보기 좋고 예쁜 것 위주로 골랐다. 이번 시즌 스키복도 평상시에도 입을 수 있는 디자인을 선택했다. 따뜻하긴 했지만 어깨끈이 없어 슬로프를 한 번 내려올 때마다 바지를 끌어올려야 했다.
이쁘니까 용서해 준다며 웃어넘겼지만, 해외 스키투어에서는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예쁜 건 그만. 기능만 보며 삽시다.”
오스씨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너나 제발 그렇게 해.”
콧방귀가 돌아왔다.
사실 나도 안다. 우리는 그렇게 못 산다. 안 입는 옷으로 넘쳐나는 우리 집 옷장이 그 증거다.
서울에 온 또 다른 이유는 오스씨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다. 코로나 이후 서울행은 1년에 한두 번으로 줄었다. 조카 결혼식 이후로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만 듣고 1년이 지나서야 처음 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눈만 마주쳐도 눈을 땡그랗게 뜨거나, 까르르 웃었다. 어른들은 그 작은 행동 하나에도 웃었다. 아이가 주는 기쁨이라는 말이 괜한 표현은 아니었다.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오스씨조차 눈을 떼지 못했다.
강남 멋쟁이였던 조카들은 어느새 부모가 되어 있었다. 정돈된 세련됨 대신 조금 흐트러진 편안함이 더 잘 어울렸다.
우리는 아이가 없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걸로도 우리의 시간은 꽤 괜찮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컵라면으로 조식을 대신하고 오스씨의 누님 댁으로 갔다.
마지막에 보았을 때도 조금씩 쇠약해지고 있던 매형은 이제 거의 거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한때 수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던 당당한 사내가 집 안에서만 지내는 모습은 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오스씨는 꽤 오랫동안 육체적인 노후 준비를 미뤄왔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별일 없이 살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그런데 은퇴 후 연금 상담을 하면서 들은 한 마디가 그를 흔들었다.
“보통 10년 안에 다 받는 걸로 계획하세요. 그 이후엔 실제로 돈을 쓸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으로 10년.
그 말은 이상하게 구체적으로 들렸다. 지금처럼 움직이고, 즐기고,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딱 정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매형을 떠올려봐도 지금 상태로 가면 15년 안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아질지도 모른다.
노화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다만 그때 가서 오스씨가 ‘조금 더 준비해 둘걸’ 하고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소한 이만큼은 해봤다고 말할 수 있기를. 충분히 즐겁게 살았다고 스스로를 납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누님과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나왔다. 어제 형님 네 식구들과도 두 시간 식사를 했다. 이상하게 무언갈 해도 두 시간을 넘기면 에너지가 떨어진다. 영화도, 파인다이닝도, 대화도 그렇다. 인간의 집중력은 그쯤에서 한 번 꺾이는 걸까.
누님 댁은 여의도 현대백화점 바로 앞이다. 오랜만에 도시 구경을 할 겸 백화점에 들러 서울 문물을 실컷 구경하고, 파스타 한 봉지와 노트와 연필을 샀다. 문구 주제에 가격이 꽤 나갔지만 이런 물건에는 이상하게 돈을 아끼고 싶지 않다.
나는 초고를 늘 노트에 연필로 쓴다. 그래야 문장이 붙는다. 한 번 그렇게 써서 잘 되었고, 그 뒤로 계속 그 방식을 고수해 왔다. 집착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글만 잘 써진다면 그보다 더한 버릇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글 쓰는 사람의 변명 같은 것이다.
서울을 떠나 세 번째 스키장인 하이원 리조트로 향했다. 서울에 산 것도 아닌데, 달랑 하루 머물렀는데도 묘하게 후련했다. 원하던 장비를 무사히 샀고, 오스씨 가족들도 모두 만났다. 새해에 해야 할 큰일 하나를 마친 기분이었다.
하이원에서는 열흘을 묵는다. 원래는 선착순으로 방을 배정받지만 장기 숙박이라 이동이 편한 방을 미리 부탁했더니 슬로프와 가까운 곳으로 배정해 주었다. 용평에서는 거의 조르듯 부탁해야 했는데, 여기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숙소는 밸리콘도 2인실. 용평 타워콘도보다 훨씬 작지만 그만큼 저렴하다. 짐을 풀고 저녁을 해 먹고 나니 둘이 지내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내일부터는 새로 산 스키를 탄다.
몸은 조금 지쳐 있지만, 마음은 이미 슬로프에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