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장비와 오래된 몸

은퇴했으니 일단은 스키부터 9

by 선우비

1월 26일, 월요일


드디어 새로 산 올마운틴 스키를 개시하는 날이다. 이틀을 쉬며 몸을 추슬러서인지 뻐근하던 근육들이 뽀송한 떡처럼 말랑해졌다. 근손실보다는 탄력에 가까운 느낌. 스키장이 오픈되자마자 눈 위에 올라 폴로 지면을 탁 치고 앞으로 쭉 내달렸다.

올마운틴 스키는 우리가 타던 카빙 스키보다 폭이 넓어 지면에 닿는 부분이 많다. 그만큼 안정적이었다. 대신 저항도 늘어 속도가 쉽게 붙지 않았고 턴도 휙휙 감기지 않았다. 나는 원래 엣지를 강하게 세우지 않고 내달리는 타입이라 넓은 플레이트가 주는 편안함이 마음에 들었다. 반면 오스씨는 한 턴 한 턴을 강한 엣지로 또렷하게 끊어 타는 쪽이라 적응이 쉽지 않아 보였다.

“왜 이렇게 힘이 들어?”

몇 번 내려왔을 뿐인데 평소보다 훨씬 힘들어했다. 그래도 새 장비를 타는 흥분에 이 슬로프 저 슬로프를 돌다 보니, 이번 여행에서 가장 늦게까지 스키를 탄 날이 되었다. 나 역시 끝날 즈음에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스씨는 새 스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연신 투덜대는 모양이, 스키 자체보다 적응하지 못하는 자기 몸에 대한 서운함처럼 보였다.


늦은 점심으로 전날 여의도 현대백화점에서 사 온 계란 파스타면으로 파스타를 만들었다. 오스씨는 면이 덜 삶아졌다며 투덜거렸다. 스키장에서부터 이어진 투덜의 연장선 같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 양반은 하나가 마음에 안 들면 하루 종일 오만 가지에 트집을 잡는, 지극히 평범한 노인네다.

오후에는 빨래를 하고 장을 볼 겸 고한 읍내로 나갔다. 오스씨는 여전히 파스타 이야기를 하며 속이 더부룩하다 했다. 신 과일이 먹고 싶다고도 했다. 오래 식도염을 앓아온 그는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트러스 계열 과일을 넘기며 식도를 달래는 습성이 있다.

읍내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마트에 들어가도 신선한 먹거리가 많지 않았다. 한낮인데도 마을 전체가 잠든 것처럼 고요했다.

탄광이 사라진 뒤 이곳을 한국의 라스베이거스로 만들겠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의 풍경만 보면 그 구호는 실패로 보였다.

용평은 스키장 밖에도 생활의 기척이 있었는데 이곳은 강원랜드를 제외하면 활기가 보이지 않았다.

“스키 인구가 줄어서 그런 걸 수도 있어.”

여러 이유가 겹쳤을 것이다. 실제로 하이원에서 가장 난도가 높다는 빅토리아 3 슬로프에는 작은 나무가 자라 있었다. 한동안 운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연이 제 자리를 되찾는 모습에 안도해야 할지,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 씁쓸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원하는 식재료를 찾지 못해 태백의 이마트까지 차를 몰았다. 그곳에는 샐러드 채소와 과일이 넉넉히 진열되어 있었다. 대형 유통 자본과 지역 경제에 대한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카트를 밀며 필요한 것들을 담았다.

복잡한 생각은 부산에 가서 하자.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오스씨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거 먹으면 괜찮아지겠지.”

마트에서 산 귤을 까서 서로 입에 넣어줄 때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숙소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씨는 화장실로 달려가 토했다. 역시 파스타가 문제였다.

저녁 식사는 건너뛰고 그대로 누웠다. 핼쑥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게임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어제 보았던 매형이 겹쳐졌다.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으면 공간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진다.

“하루 자면 괜찮아지겠지.”

그 말은 오스씨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1월 27일,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오스씨의 얼굴빛이 어제보다 나아 보였다. 미음을 끓여 먹이고 스키는 오후에 타기로 했다.

하이원 밸리 스탠다드 룸은 가격은 저렴하지만 꽤 좁았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는 것 말고는 둘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홈페이지에는 16평이라 적혀 있었지만 겨울에는 쓸모없는 베란다까지 포함한 면적일 것이다. 불만을 잔뜩 늘어놓았으면서도 문득 용평 타워콘도가 그리워졌다. 그곳에서는 그래도 책상에 앉아 글을 쓸 수 있었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슬로프로 나갔다. 새 스키의 생소한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확실히 힘이 더 들었다. 대신 오후의 거친 설질에서도 안정적으로 미끄러지는 건 분명한 장점이었다. 이 스키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보였다.

카빙 스키를 세단에, 올마운틴을 SUV에 비유하곤 한다. 문득 우리 나이에는 조금만 밟아도 가볍게 나가는 세단이 더 맞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신 올마운틴 스키는 훨씬 가볍다. 한 손으로도 거뜬히 들 수 있어 이동할 때는 훨씬 편하다.

“더 늙어서도 계속 안전하게 타고 싶으면 역시 이걸 배워야 해.”

80세 곤돌라 무료 통과를 목표로 한 우리의 연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녁에는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둘이서 550그램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그래도 오스씨의 얼굴빛은 아침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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