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했으니 일단은 스키부터 11
오늘은 나만의 숏턴이 조금은 자리를 잡은 날이다. 정석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짧게 짧게 끊어 내려오는 건 가능해졌다.
이제는 폼이 완벽한지 아닌지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너무 이상하지만 않으면 된다. 멋진 숏턴은 애초에 내 무릎이 허락하지 않는다. 스키숍 사장님 말대로, 슬개골에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교과서 같은 턴을 꿈꾸는 건 무리다.
그래서 목표를 바꿨다. 정답이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새 스키는 여전히 힘을 요구한다. 오전에 여덟 번밖에 타지 않았는데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나이가 들면 매일 강하게 운동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몸이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오후에는 하이원 워터월드로 갔다. 두 시간 동안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휴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은근히 체력을 잡아먹는다. 결국 저녁 스키는 포기했다.
고한 읍내에는 늦게까지 여는 카페가 ‘이야기꽃’ 하나뿐인 것 같다. 꽃으로 발효한 식초를 파는 가게다. 밤에 식초를 마셨더니 속이 쓰렸다. 야초위탈... 갑자기 이런 단어가 떠올랐다. 오호, 문학적이다. 속은 쓰린데 기분은 괜히 고상해졌다.
이번 여행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정리해 보았다. 꼭 필요했던 것과 사실은 없어도 됐던 것. 만약 이 기록을 책으로 낸다면 맨 뒤에 리스트로 붙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줄이면 생활이 줄어든다. 생활이 줄면 생각도 조금 정리된다.
한 달을 돌아보니 삶이 꽤 단순해져 있었다.
아침에 밥을 해 먹고
준비운동을 하고
스키를 타고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글을 쓰거나 구경을 가고
저녁을 먹고
또 스키를 타고
씻고 바로 잠든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긴 했지만 집에 있을 때보다 훨씬 적었다. 영상 대신 책이나 음악으로 채워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스키가 차지했던 다섯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그 자리를 숏츠 영상이나 술자리로 내어주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무엇을 넣을지, 미리 정해두어야 할 것 같다.
삶을 단순하게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생각보다 괜찮았다.
주말은 스키를 쉬는 날이다.
그래서 다시 용평으로 갔다. 스키를 타러 가는 게 아니라, 헬멧을 사러.
오스씨의 헬멧이 고장 났다. 서울에 갔을 때 논현동 스키숍을 여러 군데 돌았지만 마음에 드는 걸 찾지 못했다. 아무리 최첨단 기능이 달려 있어도 소용없다. 그의 기준은 단순하다. 예뻐야 한다.
“패션은 자학이야.”
한겨울 호미곶에서 주머니도 없는 파카를 입고 나와 장갑도 없이 손을 빨갛게 얼렸던 사람이 한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선순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용평을 떠나기 전, 한 가게에서 마음에 둔 헬멧이 있었다. 살까 말까 하다가 “서울 가서 더 좋은 거 보자” 하고 미뤄둔 물건이다. 그런데 논현동을 다 돌아도 그만큼 예쁜 게 없었다.
고한에서 횡계로 가는 길, 정선이 있다. 재래시장 맛집이 유명하다기에 아침을 굶고 갔다. 가려던 집은 아직 준비 중이라 시장 안 ‘회동집’에 들어갔다. 콧등치기라는 면을 시켰다. 그냥 따뜻한 국물일 거라 짐작했는데 차가운 면이었다. 맛은 독특했지만 한겨울에는 조금 어색했다.
시장 안은 장날이 아닌데도 활기가 있었다. 오란다는 부드러웠고, 나물은 향이 좋았고, 참송이는 쫀득했고, 도라지조청은 건강하게 달았다. 황토 제품 가게에서는 선물하기 좋아 보이는 것들을 몇 개 골랐다. 상인들은 맛을 보라며 권했지만 사지 않아도 눈치를 주지 않았다. 그러니 괜히 더 사게 되었다. 벌꿀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나오니 배가 묵직했다. 정선에 대한 인상이 자연스럽게 좋아졌다.
주유소에 들렀다가 세차장이 열려 있는 걸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흙을 한 겹 뒤집어쓴 차를 씻어내고 에어건으로 물기를 날렸다. 바람이 닿는 자리마다 물이 얼었다. 그래도 깨끗해진 차를 보니 기분이 가벼워졌다.
용평 드래곤플라자에는 스키숍이 두 군데 있다. 마지막까지 기능이냐, 예쁨이냐를 두고 고민하며 먼저 다른 가게에 들렀다. 사장은 최고가 모델부터 꺼내 설명했다. 헬멧은 단순히 머리를 보호하는 장비가 아니었다. 렌즈 종류, 통풍 구조, 바이저, 변색 기능까지 선택지가 끝이 없었다. 햇빛에 따라 농도가 달라지는 바이저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야간 스키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스씨는 고개를 저었다. 기능은 나중 문제다. 모양이 먼저다. 설명을 너무 열심히 들은 것이 미안해 양말 세 족을 샀다.
그리고 원래 가려던 가게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사실상 결정은 끝났다. 이태리산 헬멧들이 조명 아래 줄지어 있었다. 기능은 조금 전 가게 것보다 단순했지만, 모양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쓰는 순간 얼굴형이 또렷해 보였다. 거울 속 사람이 약간 달라졌다.
오스씨는 몇 개를 번갈아 써보더니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나도 슬쩍 하나를 써봤다. 새로 산 스키복 색과 맞춰보니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내부 마감은 기존 헬멧과 확연히 달랐고, 변색 바이저도 달려 있었다. 솔직히 탐이 났다.
“네 것도 같이 사자.”
그 말이 없었다면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조금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두 개를 산다고 하니 가격도 조금 더 깎아주었다. 결국 나 역시 기능보다 모양을 먼저 보는 사람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기존 헬멧을 당근에 올렸다. 스키장 근처라 금방 팔릴 거라 기대했는데, 그날 밤 바로 연락이 왔다. 부산에서 가족과 여행 온 아버지였다. 딸에게 주려고 산다고 했다.
며칠 뒤 스키 카페에서 그의 당근 닉네임과 같은 이름을 발견했다. 정말로 딸과 함께 해외 스키장을 다니는 사람이었다. 괜히 마음이 놓였다.
그의 딸이 내 헬멧을 쓰고 즐겁게 달리면 좋겠다.
새 헬멧, 양말, 올마운틴 스키. 이번 여행 전에 스키복과 내피, 바라클라바도 바꿨고, 작년에 세일로 사둔 부츠도 이번에 처음 신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전부 새 장비다.
이것들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내 몸이 잘 버텨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