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에서 진심이 시작되다

은퇴했으니 일단은 스키부터 12

by 선우비

2월 1일, 일요일


일요일은 원래 쉬는 날이다. 그런데 새 헬멧을 빨리 써보고 싶었다. 게다가 하이원은 용평과 달리 밖에 나가서 할 일이 많지 않다. 결국 스키를 탔다.

평일엔 한산하던 하이원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스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반가운 풍경이지만, 리프트 줄에 서 있으니 마음이 마냥 너그럽지는 않았다.

묘한 감정이다. 사람이 많아지면 문 닫은 슬로프도 다시 열리고 식당도 늘고, 용품점도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지금처럼 여유롭게 탈 수는 없을 것이다.

요즘은 이런 두 마음이 동시에 든다. 스키어로서는 지금이 좋고, 스키장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라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으로 변하는 걸까.

보수니 진보니 어느 선부터 구분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싶다. 지금의 내 나이에 어울리는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새벽에 눈이 내렸다. 정설 된 슬로프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이번 시즌 처음 보는 장면이다. 이런 날을 위해 올마운틴 스키를 샀다.

하이원은 용평보다 보더가 많다. 금세 슬로프에 범프가 생겼다. 예전 같았으면 짜증부터 났을 텐데, 새 스키는 그런 지형을 비교적 담담하게 넘어갔다. 카빙스키처럼 속도가 붙지는 않지만, 대신 범프를 하나씩 읽어가며 정복하는 맛이 있다. 몸은 더 힘들지만 재미가 색다르다.

여러 슬로프를 돌다가 마지막으로 빅토리아 2까지 타고 오전을 마쳤다. 일본에서 받을 파우더 강습이 더 기대됐다.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아, 이제 짐을 조금씩 정리해야 할 시기다. 남아 있는 컵라면과 봉지라면을 당근에 올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컵라면을 잘 먹었는데, 한 살 더 먹고 나니 속이 받지 않는다. 컵라면 맛이 변한 건지, 내 입이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 아마 앞으로는 연중행사처럼 가끔만 먹게 되지 않을까.

오스씨는 밀린 빨래를 하고 낮잠을 잤다. 나는 에세이 수정 작업을 이어갔다.

저녁을 먹고 다시 야간 스키를 나갔다. 하이원은 슬로프가 길어 야간은 자제하고 있었지만, 광량에 따라 변색된다는 새 헬멧 바이저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확실히 시야가 밝았다. 안경을 쓴 것처럼 편했다.

그래도 야간의 하이원은 만만하지 않았다. 몇 번 내려오고는 돌아왔다.

새 헬멧은 합격, 몸은 아직 심사 중이다.



2월 2일, 월요일


밤새 눈이 많이 왔다. 온통 하얀 하이원이었다. 그동안은 산에 눈이 쌓인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정상의 나무마다 눈꽃이 달렸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도 눈은 계속 내렸다. 폴을 꽂으면 바스켓이 통째로 사라질 만큼 쌓여 있었다. 우리가 일본에서 배우고 싶어 하는 파우더 스키의 조건이, 어설프게나마 갖춰진 셈이다. 새로 산 올마운틴 스키가 또 한 번 시험대에 올랐다.

나는 예전에 하쿠바에서 만난 고수님이 알려준 방식대로 타려 했고, 오스씨는 평소처럼 탔다. 장비 덕에 눈에 박혀 멈추지는 않았지만, 넘어지지 않으려 버티다 보니 몇 번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허벅지가 타들어 갔다.

장비만 바꿔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교육이 필요하다.

다섯 번 정도 내려오고는 숙소로 돌아왔다. 슬로프 곳곳에서 고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괜히 마음이 놓였다.

한국 스키장에서 이런 폭설은 축복이라기보다 악몽에 가깝다.

점심을 먹으며 유튜브를 켰다. ‘악설일 때 스키 타는 법’이라는 영상이 떠 있었다. 핸드폰이 우리의 대화를 듣는다는 오래된 의심이 또 한 번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이런 간섭은 반갑다.

영상을 보고 나니 다시 나가고 싶어졌다. 오스씨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샤워까지 마친 상태에서 다시 스키복을 입었다.

오후 두 시, 슬로프는 이미 범프로 가득했다. 예전 같았으면 들어갈 엄두도 못 냈을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적어도 이론은 알고 있었다.

영상은 제 역할을 했다. 나는 오전보다 훨씬 편하게 내려왔다. 날이 휘어지며 저항을 만드는 원리를 머리로 이해하니, 몸이 조금 덜 긴장했다. 스키를 과학적으로 생각해 본 건 처음이었다.

오스씨는 여전히 엣지를 강하게 세웠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아.”

눈이 쌓인 둔덕은 보기보다 무섭다. 그래도 몇 번을 넘다 보니 확신이 생겼다. 넘어지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자 힘이 빠졌다. 힘을 빼니 오히려 체력이 남았다.

오스씨는 쉬자고 했다.

“자기 먼저 가. 난 한 번 더 타볼게.”

혼자 리프트를 타고 빅토리아 1로 올라갔다. 여행 중 혼자 최상급을 오른 건 처음이었다.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슬로프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내려왔다. 생각보다 쉬웠다. 적당히 만들어진 범프가 브레이크처럼 작동해 공포를 줄여주었다.

아래에 내려오니 오스씨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뿌듯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들었다.

이후 두 번을 더 탔다. 오스씨도 조금씩 방식을 이해하는 듯했다. 슬로프 영업 종료까지 계속 탔다. 기술을 이해하는 순간이 이렇게 즐거운 줄 몰랐다. 3월 일본 강습을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최소한 수업에서 뒤처지지는 않겠다는 안도감이 생겼다.

저녁을 먹고 고한까지 걸어 나갔다. 지난번엔 배스킨라빈스에서 더블 레귤러를 하나 시켜 나눠 먹었고, 이번엔 롯데리아에서 선데이를 하나 시켜 나눠 먹었다. 만족도는 거의 비슷했다. 다음부터는 싼 걸 먹기로 했다. 이런 깨달음은 늘 늦게 온다.

밤에는 다시 스키 영상을 보며 공부했다. 빨리 내일이 오기를 바랐다. 합숙처럼 매일 타다 보니 점점 빠져든다.

생각해 보니 연애 프로그램도 합숙을 하니까 사랑에 빠지는 걸지도 모른다. 넷플릭스 ‘보이프렌드’는 두 달간 함께 합숙을 한다. 함께 먹고, 청소하고, 일상을 공유하는 환경에서는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군대 생활해 봐서 안다. 잠깐의 훈련소 생활만으로 죽마고우 여럿 만들 수 있다.

일상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 게이에게 그런 환경은 드물다.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제한돼 있고, 대부분 밤과 술에 기대어 있다. 천천히 알아가며 마음이 자라는 구조라면 사랑의 방식도 달라질 텐데.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연애 쇼가 아니었다. 커밍아웃과 동거, 현실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건드렸다. 한국에서도 이런 프로그램이 나오면 좋겠다. 재미도 있고, 조금은 쓸모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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