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했으니 일단은 스키부터 13
“어제 내린 눈을 정설 해두었을 거야.”
잘 정리된 눈에서는 씽씽 달리는 게 최고다. 차에 넣어두었던 카빙스키를 다시 꺼내왔다. 나가보니 예상대로 슬로프는 반듯하게 다져져 있었다.
전날 유튜브에서 본 기술도 훨씬 잘 먹혔다. 오스씨는 여전히 조금 힘들어했지만 몇 번 내려오자 감을 잡은 듯했다.
나는 이제 최상급인 빅토리아 1과 2도 무리 없이 내려온다. 비행기 자세, 장풍 쏘기. 유튜브 강사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기술은 생각보다 단순한 문장으로 몸에 남는다.
점심을 먹고 태백산 눈꽃축제에 갔다. 아주 오래전에 한 번 갔다가 실망한 기억이 있어 그동안은 들르지 않았는데, 하이원에 온 지도 열흘. 다른 풍경이 필요했다.
올해 축제는 다른 이유로 더 유명해져 있었다. 어묵을 팔던 상인이 얼어붙은 막걸리 통을 어묵 국물에 담가 녹이는 영상이 SNS에 퍼졌다. 500만 조회수. 상인은 영업정지를 받았다고 했다. 축제의 이미지도 함께 상처를 입었다.
막상 가보니 평일인데도 주차장은 꽉 차 있었다. 사람도 많았다. 다만 포장마차 구역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축제를 따라다니는 상인들에 대한 시선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듯했다.
우리는 예전에 전국의 축제를 꽤 다녔다. 그때마다 음식 가격과 퀄리티에 크게 만족한 적은 없었다. 지역 상인들과의 마찰 기사도 종종 봤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축제 음식은 잘 사 먹지 않게 됐다. 게다가 오스씨는 각설이를 유난히 무서워한다. 서양 아이들이 피에로를 피하듯 그는 그 구역을 피한다.
나는 그들의 삶을 잘 모른다. 축제를 따라다니며 사는 삶이 얼마나 고단할지 짐작만 할 뿐이다. 영상 속 장면보다 500만이라는 숫자가 더 크게 다가왔다. 영상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을 멈춰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여전히 불편하다.
축제의 완성도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홋카이도 눈축제도 보고 부산 해운대 모래축제도 본 입장에서 비교는 의미 없다. 다만 이 작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끌어모은 흔적은 분명했다.
이글루 카페가 인상적이었고 지역 청년들이 만든 물건들도 눈길을 끌었다. 태백산이 국립공원이 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마스코트 곰 인형을 하나 샀다.
돌아오는 길에 작년에 좋았던 ‘몽토랑’ 카페에 들러 딸기라테를 마셨다. 빨대로 바닥에 남은 딸기를 긁어 올리고 있는데 혼인평등소송 활동가에게서 단톡방이 개설됐다는 알림이 왔다. 기자회견 준비 관련이라고 했다.
이곳의 눈과 범프, 장비와 영상 속 기술로 가득하던 머릿속에 갑자기 부산이 훅 하고 들어왔다.
설국에서의 합숙이 끝나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아, 조금만 더 이곳에 머물고 싶다.
전날 자기 전에 숏폼을 한 시간 넘게 봤더니 오랜만에 잠을 설쳤다. 아침이 무거웠다. 평소보다 30분 늦게 나갔다.
카빙스키는 다시 넣어두고 올마운틴 스키를 들고나갔다. 단 하루 바꿔 탔을 뿐인데 폼이 흐트러졌다. 그래도 빅토리아 1과 2를 채워 넣듯 타고 오전을 마쳤다. 마지막이 다가오니 괜히 한 번씩 더 내려오게 된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다시 슬로프로 향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아쉬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스키를 마치고 먼저 정리된 짐 먼저 차에 실었다. 그 와중에서 가장 멋있고 가장 쓸모없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내 부츠백.
겉모양은 그럴듯한데 늘 애매하게 작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가방은 왜 이렇게 쓸모가 애매한가. 검색을 해봤다. 구글도 챗지피티도 정보가 없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북유럽 어느 나라의 모르는 언어로 쓰인 제품 설명서를 찾았다. 번역기를 돌렸다.
주니어 제품.
잠시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사이즈가 이렇게 큰데 주니어라고? 그래서 부츠를 넣으면 헬멧이 안 들어갔던 거구나. 그 자리는 헬멧 공간이 아니라 옷을 넣는 칸이었다. 북유럽 스키장은 헬멧이 필수가 아니니까.
이걸 무주에서 샀다. 혹시 속은 건가 싶었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니 가게 주인도 다른 제품을 권했었다. 오스씨도 모양만 번지르르하다고 말렸다. 그래도 내가 우겨서 샀다.
얼마 전 헬멧을 고르며 예쁜 것만 찾는다고 오스씨를 타박했던 게 떠올랐다. 누가 누구를 뭐라 하나.
“늦었지만, 그때 내가 잘못했어.”
오스씨는 때늦은 자신의 승리를 기뻐했다.
물론 내가 “그럼 새 부츠백을 사야겠네.”라고 말하기 전까지.
짐을 거의 다 정리했을 때 현대카드 알림이 떴다. 항공 마일리지가 7만을 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정도면 꽤 먼 나라까지 갈 수 있다. 얼마 전 스키 여행사에서 본 뉴질랜드 상품이 떠올랐다. 7월, 8월 일정. 비싸지만 항공권만 해결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올해 그냥 스키에 배팅해 버릴까?”
오스씨는 좋다고 했다.
그에게 남은 기회가 무한하지 않다는 걸 나도 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하는 게 맞다.
계획을 구체화해 보겠다며 노트를 들고 늦게까지 영업하는 고한 읍내 카페 ‘이야기꽃’에 또 갔다. 이번엔 식초 대신 히비스커스 차를 시켰다.
맛이 밍밍했다. 괜히 건강해진 기분만 들었다.
불만 없다. 그래, 건강해야 하루라도 더 스키를 타지.
원샷하고 상품안내 페이지를 열었다.
“총 9일 여행에 스키는 5일밖에 못 탄대.”
여행객들의 후기도 찾아 읽었다.
“폭설이 내려서 스키장까지 가는데만 4시간이 걸렸대.”
“결국 한 시간만 타고 돌아왔대.”
“날씨가 완전 운이래.”
왕복 4일을 허비해 도착한 곳에서 운을 시험해야 할까?
“뉴질랜드 스키장은 뉴질랜드 사람들에게 양보하자.”
우리에게 해외 스키장은 일단 일본만인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