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턴도 이미 시작됐다

은퇴했으니 일단은 스키부터 14

by 선우비

2월 5일, 목요일


전날 일찍 잠들어서인지 6시도 되기 전에 눈이 떠졌다. 마지막 날 아침은 늘 조금 이상하다. 몸은 이미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마음은 아직 슬로프 어딘가에 남아 있다.

짐을 싸고 아침을 먹어도 시간이 남았다. 〈보이프렌드〉 시즌2의 남은 에피소드를 몰아봤다. 우리가 응원하던 커플이 결국 잘 되었다. 나도 그 합숙을 함께 끝낸 사람처럼 마음이 놓였다.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음지로 돌아가라”는 말을 쉽게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그 말이 얼마나 낡은 말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양지에서 만나는 동성애는 생각보다 평범하고, 그래서 더 아름답다.

밖을 보니 간밤에 눈이 조금 내렸는지 산 전체에 눈꽃이 피어 있었다. 마지막 날을 축하해주는 꽃다발처럼 보였다.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는데 맞은편 보더의 고글이 눈에 띄었다. 고글 내부에 테가 없는 안경이 붙어 있었다. 신기해서 물어봤다. 알리에서 700원에 산 안경테를 붙인 것이라고 했다.

“잘 부러져서 열 개씩 사놔요.”

김서림은 어떠냐고 묻자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웃었다. 우주 여행은 하는 세상인데 아직 고글 안 안경 김서림은 해결 못 한단 말인가.

오늘은 이번 여행 중 가장 따뜻했다. 햇빛은 없었고 설질은 부드러웠다. 마지막 날에 이런 눈이라니 운이 좋았다.

그리고 드디어 유튜브 강사의 말이 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선을 먼저 돌리고, 스키딩을 만들고, 정면으로 타라.

세 박자가 처음으로 맞았다.

오전 내내 스키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억지로 눌러 세우지 않아도 턴이 만들어졌다. 경사가 심한 슬로프도 전처럼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폴 타이밍만 제대로 배우면 되겠다 싶었다. 다음에 연습할 것이 또 하나 생겼다.

슬로프를 내려오며 오스씨에게 말했다.

“우리 이번 달에 한 번 더 올까?”

“오케이.”

대답이 너무 빨라서 웃음이 났다.

강원랜드에서 중독이 무엇인지 배웠다. 카지노가 아니라 슬로프에서.

눈을 타고 내려오는 감각.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나아졌다는 확신.

그걸 한 번 맛보면 다시 오고 싶어진다.

이제 집으로 간다. 하지만 이미 다음 턴을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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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한 달 동안 우리는 눈 위에 살았다.

아침에는 스키 부츠를 신고 슬로프로 나갔고, 오후에는 주로 글을 쓰거나 주변을 돌아다녔다. 저녁이 되면 다시 리프트를 탔다. 그 사이 강릉을 다녀오고, 서울에서 가족을 만나고, 장비를 사고, 영상을 보며 새로운 것들을 배웠다.

처음에는 남들처럼 멋지게 타는 기술을 배우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좋은 폼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어제보다 조금씩 나아지는 감각이 좋았다. 전날 유튜브에서 본 턴 하나가 매끄러워질 때마다 하루가 괜히 보상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한 달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지만 몸의 감각은 분명 달라졌다. 경사는 덜 무섭고, 범프도 전처럼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허벅지가 단단해졌다.

몸만 변한 것은 아니다. 장비를 고르는 기준도 조금 바뀌었다. 여전히 예쁜 것을 좋아하지만 이제는 기능을 먼저 생각한다. 스키장 풍경 위주로 보던 유튜브도 어느새 기술 설명을 더 오래 보게 된다.

한 달 살기를 마치고 보니 눈 위에서 몇 가지를 배운 것 같다.

가야 할 곳을 향해 몸보다 시선을 먼저 돌리는 법.
거친 설질일수록 힘을 빼는 법.
폼이 엉성해도 나만의 방식으로 턴을 하는 법.
가로막는 범프를 공략하고 타넘는 법.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슬로프에서만 쓰는 기술은 아닌 것 같다.

한 달 살기는 끝났지만 우리는 벌써 다음 스키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눈은 녹겠지만, 욕망은 아직 녹지 않았다.


한 달 살기는 끝났지만, 올해 스키 시즌은 아직 계속된다.

다음은 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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