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했으니 일단은 스키부터 15
작년의 무주는 실망이 컸다. 설천 정상을 열지 않아 탈 수 있는 슬로프가 체감상 절반 이하로 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는 설천이 정상 개장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이원을 끝으로 국내 시즌을 접으려던 마음에 다시 불이 붙었다.
“무주에서 언제 타봤는지 기억도 안 나는 모차르트 슬로프까지 열었다는데, 어때, 콜?”
물어보나마나였다.
원래는 구정 이후에 가려고 했다.
“그때까지 눈이 남아 있을까?”
괜히 조바심이 났다. 한 달 살기를 마치고 돌아온 지 일주일 만에 다시 무주로 떠난 이유다.
서둘렀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인바디를 재보니 둘 다 골격근량이 꽤 늘어 있었다. 한 달 내내 불타던 허벅지가 단단한 근육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무절제한 명절을 보내고나면 도로 말랑해질지도 모른다. ‘근손실’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한 달 동안 지인에게 맡겨 두었던 고양이도 다시 부탁했다. 이동장에 들어갈 때마다 울어대던 녀석인데 이번에는 조용했다.
미안하다, 아들아.
무주는 충청권 이남에서는 사실상 유일한 스키장이라 가격이 조금 다르다. 보통 리조트 내 가족호텔을 이용하지만, 이번에는 리조트 아랫마을의 조금 저렴한 콘도로 정헀다. 한달살기로 돈이...
사전에 전화할 때는 조식을 제공한다고 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단체 손님이 아니면 조식이 없단다. 분명 통화할 때 그렇게 들었다고 말하니, 단체 손님 관계자와 나를 헷갈렸단다. 그러고 끝.
아니, 어쩌라는 건지...
너무 태연한 반응에 말문이 막혔다.
통화할 때는 “저녁 식사를 저희 집에서 해주세요. 요즘 경기도 어려운데, 좀 도와주세요. 조식은 그냥 드릴게요.”라며 꽤 절박하게 말하길래 음식을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끼니 걱정을 하게 생겼다. 결국 두 번의 아침을 편의점 삼각김밥과 샌드위치로 해결했다.
그제야 왜 우리가 무주에 올 때마다 가족호텔을 이용하게 되었는지 기억이 났다.
예전에도 리조트 아래 스키마을 숙소를 몇 번 이용했지만 만족한 적이 없었다. 겉보기와 달리 관리가 느슨한 경우가 많았다.
“우리 이 집이 마음에 들면 내년 시즌에 열흘 정도 묵으려고 했잖아. 그거 없던 걸로 하자.”
덧붙여, 이틀 내내 이곳에서 저녁을 사먹으려던 계획도 철회했다. 우리가 지불할 수도 있었던 돈을 놓친 사장을 마음속으로 고소해하며 분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숙소 주인과의 실랑이를 대충 정리하고 바로 스키장으로 올라갔다. 리프트 4시간권을 끊고 1분도 낭비하지 않고 꽉 채워 스키를 탔다.
집에서 아침에 출발해 당일 낮에 스키를 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원래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아닌데, 한 달 스키 여행 이후 아침이 확실히 빨라졌다.
무주는 전날 눈이 내렸고 우리가 갔을 때도 가끔 눈발이 날렸다. 설질은 나쁘지 않았지만 설천봉을 가득 채운 안개가 문제였다. 눈꽃은 그대로 남아 있어 풍경은 신비로웠지만 슬로프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목표했던 설천 상급 슬로프 하나를 엉금엉금 내려오고는 눈물을 머금고 만선 쪽으로 넘어갔다.
그곳에 도착하자 왜 리조트 측이 작년과 달리 설천 정상을 전부 개방했는지 알게 되었다. 무주를 대표하는 무주익스프레스 리프트가 멈춰 있었다. 만선봉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리프트다. 한숨이 나왔다.
운영사가 바뀐 이후 이런 장면이 종종 보인다. 괜히 “옛날이 좋았지” 하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다.
결국 만선 쪽 유일한 상급 슬로프인 야마가를 계속 탔다. 작년까지만 해도 속도 제어가 잘 안돼 그냥 슝 내려오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여러 방식으로 속도를 조절하며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꼬였던 기분이 조금 풀렸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스키로 치유하는 게 정석이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싫든 좋든 2박 3일을 함께할 집주인의 가게에서 저녁을 먹었다. 괘씸해서 다른 곳에서 먹을까 했지만 이불을 교체해달라는 부탁은 또 금방 들어줘서 조금은 봐주기로 했다. 고기도 맛있었고 가져간 잔와인을 마실 수 있게 해줘 토라졌던 기분도 조금 풀렸다. 어쨌든 이 동네 음식은 대체로 괜찮다.
그래도 내일은 다른 집에서 먹을 테다.
저녁을 먹고 산책도 할 겸 카페를 검색했다. 대부분 문을 닫았고 딱 한 곳만 열려 있었다. 베이커리 카페였는데 네이버지도에 올라온 내부 사진이 멋져 보여 책 읽기 좋을 것 같았다. 책을 챙겨 바람을 맞으며 한참 걸어 도착했다.
그런데 분명 유리창에는 베이커리라고 적혀 있었는데 치킨을 팔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안을 보니 한때 빵을 진열했을 법한 진열대는 텅 비어 있었다. 업종을 바꿨으면 지도에 올라온 예전 카페 정보라도 정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오늘 하루 겪은 일들을 그대로 집약해 둔 가게 같았다.
결국 스키마을에서 저녁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지 못하고 9시 40분쯤 일찍 잠들었다.
어쩐지 이 동네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