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했으니 일단은 스키부터 17
편의점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우고 짐을 정리해 숙소를 나왔다. 스키장 주차장에 일찍 도착해 리프트 오픈 이십 분 전부터 줄을 섰다. 스키 타러 다니면서 이렇게 부지런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물론 우리 앞으로도 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도착은 1번이었지만 맨 앞줄에 서는 건 왠지 어색해 사람들이 조금 모이기를 기다렸다. 학생 시절에도 교실 맨 앞줄에 앉아본 적이 없었다.
어느덧 우리 뒤로도 사람들이 차곡차곡 늘어섰다. 그런데 뒤늦게 온 어떤 할아버지가 우리 앞사람에게 “어이” 하고 인사를 하더니 자연스럽게 앞으로 섰다. 처음에는 일행인가 싶었는데, 잠깐 말을 나눈 뒤 그 사람보다도 더 앞으로 가는 걸 보니 원래 줄을 서 있던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 자연스러움이 조금 뜻밖이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게 된다. 얼마 후 최정상 슬로프에서 그를 다시 만났는데 거의 선수급으로 잘 탔다. 그래서 더 눈에 남았다.
우리는 어제처럼 6시간권을 끊고 언제 다시 탈 수 있을지 모르는 상급 슬로프들을 하나씩 타며 오전을 보냈다. 점심은 어제 기대한 대로 설천봉 레스토랑에서 부대찌개를 먹었다. 조금 보급이 열악한 군부대에서 만든 찌게 같았다. 다음에는 그냥 돈가스를 먹기로 했다.
오후가 되자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고 슬로프의 눈은 슬러시로 변해갔다. 하지만 새로 산 올마운틴 스키는 그런 설질에서도 꽤 안정적으로 버텨줬다. 그만큼 허벅지는 타들어 갔지만 덕분에 근손실은 훌륭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무주에서 집까지는 차로 네 시간 정도. 부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퇴근 차량과 겹칠까 걱정돼 리프트권 만료 삼십 분을 남겨두고 무주를 떠났다.
무주에서의 며칠을 끝으로 이번 겨울의 국내 스키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웰리힐리에서 시작해 용평과 하이원을 거쳐 다시 무주까지, 생각해 보면 꽤 두루 다녔다. 슬로프를 내려오는 동안에는 너무 짧게 느껴졌는데 어느새 한 달이 꽉 차 있었다.
여행 내내 모든 순간이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숙소나 서비스에서 기대와 다른 장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면 대체로 흐릿해진다.
대신 또렷하게 남는 건 자연이다.
눈이 내린 다음 날의 슬로프, 리프트 위에서 바라보던 산의 능선, 바람이 지나간 뒤 잠시 고요해지는 설원의 풍경. 그런 장면들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늘 더 아름다웠다. 사람에게 실망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눈과 산은 대체로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키가 좋았다.
스키는 각자의 속도로 내려오는 스포츠다. 오스씨와 함께 타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눈 위를 가른다. 그 단순한 움직임 속에서 머리를 어지럽히던 감정이 정리된다. 불쾌했던 일들도 턴 몇 번에 갈려 사라진다.
무주에서의 마지막 날, 슬로프를 떠나며 자연스럽게 다음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 겨울의 마지막 스키는 3월 중순 홋카이도에서 타게 될 예정이다. 파우더 설질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강습도 신청해 두었다.
국내 스키 한 달 살기는 끝났지만 겨울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눈은 아직 북쪽에 남아 있다.
그리고 글을 올리는 오늘 아침, 우린 홋카이도의 낯선 스키리조트에서 눈을 떴다.
여행기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