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했으니 일단은 스키부터 19
나는 4대강 사업을 반대했지만, 그 위에 놓인 자전거길은 기꺼이 탔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부딪힐 때, 나는 대개 둘 다 쥐는 쪽에 가까웠다.
그 대가는 몸으로 치렀다. 무릎 연골의 일부를 내줬고, 대신 꽤 두꺼운 허벅지를 얻었다.
문제는 그 허벅지였다.
힘이 좋으니 기술 대신 버티게 된다. 자세가 엉망이어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힘을 주면 웬만해선 버텨진다.
그래서 나는 오래 버텼다. 엉망인 자세로도, 크게 다치지 않고.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넘어졌다.
첫날이었고, 수업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막 지난 때였다.
눈이 쏟아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강사를 따라 한 명씩 내려가는데, 나는 거의 맨 뒤에서 허겁지겁 따라붙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몸이 앞으로 쏠렸다.
꽝.
온몸으로 통증이 퍼졌다.
예전에 오토바이를 타다 아스팔트에 몸을 갈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슷한 정도의 충격이었다.
파우더 설질에서는 에지를 세우면 안 되는데, 속도가 붙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눈은 푹신했지만, 그 아래는 얼음덩어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보조강사가 다가와 부축해 주었다.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 쪽이 둔하게 울렸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행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눈발이 거세져 이미 앞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은 더 가빠졌고, 어깨는 특정한 움직임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나중에 합류했을 때, 오스씨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괜찮은 거 같아. 못 하겠으면 말할게.”
어렵게 잡은 강습이었다.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후 수업에서 한 번 더 넘어졌다.
이번에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닥을 짚고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웠다.
나를 일으켜준 수강생이 혀를 찼다.
“내일이면 더 부어오를 텐데요. 3일권 끊으셨죠?”
눈앞이 새하얘졌다.
부산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강습비는 또 얼마고.
지금 취소해도 절반밖에 돌려받지 못한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파스를 붙였지만, 통증은 줄지 않았다.
결국 그날 밤 뒤풀이 시간에, 강사에게 말했다.
“내일은 못 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증상을 몇 가지 묻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스키는 다리로 타는 거잖아요. 다리는 괜찮죠?”
그리고 덧붙였다.
“상체 고정하고 타는 연습 하면 되겠네. 나는 인대 끊어져도 탔어요.”
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아팠고, 팔을 들 때마다 찌릿했지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두려워한 건 통증이 아니라, 갈비뼈가 부러진 채 무리를 하다가 더 망가질지 모른다는 쪽이었다.
정확히 알기도 전에, 이미 겁부터 먹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수강생 중에 정형외과 의사가 있었다.
그가 내 가슴을 몇 번 짚어보더니 말했다.
“골절은 아닌 것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조금 풀렸다.
나와 오스씨는 원래 작은 통증에도 크게 반응하는 편이다. 혹시 큰 병은 아닐까, 먼저 의심하고 몸을 아낀다. 책상과 의자, 소파에 가까운 시간을 오래 살아온 탓이다.
그런 우리가, 이 정도 통증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일행 중 한 명은 진통제와 소염제를 꺼내 나눠줬다.
강인한 지도자와 능숙한 힐러가 있는 파티.
그 안에 내가 있었다.
그 낯선 소속감이, 짜릿했다.
오십 중반에,
나는 조금 늦게 다른 종류의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다행히 다음 날 상태는 더 나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날보다 조금 나았다.
여전히 불편한 곳은 있었지만, 스키는 다리로 타는 운동이라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생각 하나에 몸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다시 슬로프로 나갔다.
이번에는 조금 덜 망설였다. 눈 아래에 얼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지워버렸다. 스키날을 더 멀리 밀어 넣었다. 주저하면 몸이 뒤로 빠지고, 과감하게 몸을 던져야 오히려 자세가 잡힌다.
스키에서는, 용기가 안전이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강습을 마쳤다. 아찔한 순간이 몇 번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이번 스키 강습이 내게 남긴 건, 기술이라기 보다는 스포츠에 임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날, 11시에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했지만 우리는 그 전까지 스키를 타기로 했다. 한 시간 반에 삼 만원을 과감하게 태웠다.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한번 더 용기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시작부터 가파른 슬로프에 올라섰다. 국내에서 가장 가파른 슬로프보다 더 급한 경사였다. 몸을 던졌다. 그동안 배운 기술이 잘 먹히지 않는 각도였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쉬엄쉬엄 내려오다가 이제 괜찮겠다 싶던 순간, 첫날처럼 스키날에 무언가 탁 걸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크게 미끄러졌다. 곤두박질 칠 수도 있었지만, 허벅지로 버텨 겨우 균형을 잡았다.
‘아이고, 살았다.’
숨을 몰아쉬며 리프트를 기다렸다.
그때, 그 장면을 봤다.
“어어어…” 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한 스키어가 속도를 제어하지 못한 채 그대로 내려오더니, 내 앞에서 머리부터 바닥으로 꽂혔다.
다리가 비틀린 채 떨리고 있었다.
몇 미터 떨어져 있는 나조차 아픔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패트롤에 실려 내려갔다.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세계가,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나아지고 있던 어깨와 갈비뼈가, 쿡쿡 쑤셨다.
남은 시간은 완만한 곳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예정보다 조금 일찍 접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맨 앞자리에, 정강이에 깁스를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우리가 온 첫날 다친 사람이었다. 그녀의 옆자리는, 어쩌면 내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뒷목이 서늘해지면서, 머릿속이 명쾌하게 맑아졌다.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