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했으니 일단은 스키부터 21
일본 스키장에 처음 간 건, 2010년 시가고원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단체에 끼어 갔는데, 나만 유일하게 30대였고 나머지는 전부 50–60대였다.
나는 스키를 잘 타고 싶어서라기보다 일본 스키장의 풍경이 좋아서 간 거였는데, 그 사람들은 전부 스키광이었다.
하루 종일 타고, 또 탔다. 나는 그 사이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근처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된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오스씨를 붙잡고 졸랐다.
오스씨는 주저했다.
“그 엄청 잘 타시는 교장선생님 있잖아. 그분이 나 가르쳐준다고 했는데… 안 가면 안 돼?”
나야, 그 늙은 교장이야! 결국 한바탕 실랑이를 하고, 오스씨를 끌고 마을로 내려갔다.
평일 낮이었다.
마을은 조용했고, 그저 흔한 일본 시골 풍경이었다.
기대했던 영화 속 환상적인 마을은 없었다.
아이고, 멍청이.
그때 같이 배웠어야지.
이듬해 우리는 홋카이도의 루스츠 스키장에 갔다.
여기에서 뭘 어떻게 했는지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눈앞에 펼쳐지던 풍경만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때만 해도 홋카이도 스키장은 사람이 많지 않았고, 스키 상품에 포함된 호텔 가격도 꽤 저렴했다.
우리는 주니어 스위트에 묵으면서 호텔 인앤아웃을 여유롭게 즐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여유를 너무 쉽게 써버렸다.
꾀를 부리며 하루 종일 타지 않았고, 적당히 놀다 들어오곤 했다.
아이고, 그때의 뺀질이. 과거로 돌아가면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비슷한 시기에 니세코에도 갔다.
그런데 그때 사진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
어떻게 관리했는지 기억도 없다.
풍경은 비슷했고, 스키복도 매년 같았다.
그래서인지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았다.
결국 우리는 스키복을 새로 사기로 했다.
옷 사기 위한 핑계는 무궁무진하다.
2013년에는 나가노였다.
그때는 부산에서 도야마 공항으로 가는 직항이 있어서 비교적 수월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여행은 만만하지 않았다.
폭설과 눈보라에 시달렸고, 그 와중에 폴까지 도둑맞았다.
오스씨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스키를 타다 결국 탈이 났다.
고생했다는 기억만 남아 있는 여행이었다.
그래도 딱 하루, 날이 완전히 맑게 개인 날이 있었다.
고류 스키장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
곤돌라에서 내려 마주하자마자 눈물이 났다.
자연이 너무 커서, 몸이 그 앞에서 잠깐 멈춘 것 같았다.
그날의 장면 하나가 이후의 일본 스키 여행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한동안 유럽 여행에 빠져 있다가, 다시 일본 스키장을 찾은 건 2017년 홋카이도 후라노였다.
여기는 스키장보다 부대 시설물이 더 인상적인, 아기자기한 느낌의 스키장이었다.
그래서인지 크게 지루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시간 분배를 잘 해서 적당히 즐기다 돌아왔다.
하루는 쉬기로 하고 북쪽 끝에 있는 아사히야마 동물원도 다녀오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는 삿포로에 나가 하룻밤을 보내며 눈꽃축제도 알차게 즐겼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나는 스키에 온 마음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저 적당히 타고, 스키를 제외한 온갖 것들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남아 있는 기억들도 하나같이 흐릿하다.
이제와 보니, 그 시절 전부가 아쉽게 느껴진다.
해외여행에 염증을 느끼던 시기에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한동안 일본 스키와도 멀어져 있었다.
다시 찾은 건 재작년 하쿠바였다.
명절 부산 출발 상품을 발견하고, 거의 충동적으로 다녀왔다.
그때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스키를 타는 방식이 아니라, 스키를 대하는 태도가.
일본의 설질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내 몸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그냥 타는 게 아니라,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아직은 시작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희망만 품고 있는 시기였다.
조금만 더 일찍 이렇게 생각했더라면.
몸은 예전 같지 않았고,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하필 이런 것조차 늦게 철이 들다니. 쯧쯧.
이제 오스씨도 은퇴했겠다. 우리의 일본 스키 원정은 해마다 늘어날 것 같다.
우리가 즐겨보는 스키 유튜버의 조언이 있었다.
“봄여름가을의 삶을 조금 쥐어짜서 만들어낸 돈으로 겨울 시즌을 보내세요.”
그 말대로 우리 역시 벌써부터 어디서 어떻게 졸라매야 내년에도 멋진 일본 스키장에서 스키를 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내년에도 다시 이런 스키 여행기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는, 조금은 제대로 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26년 스키 이야기, 드디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