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커플은 무엇으로 사는가 04
Q: 선우비-오스씨 커플! 궁금한 게 있어요.
누가 그러던데 18년을 같이 살면 상대방이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라고 밝혀져도,
“어, 그래? 알았으니까 라면 물이나 올려줄래?”
할 정도로 심드렁해진다던데 정말인가요?
A: 네, 정말입니다.
Q: 이런 대답은 또 예상 못 했네.
사랑하는 사람이랑 지내다 보면, 이 사람에게 이런 면이? 아, 깬다... 할 때가 있다고 하던데,
선우비도 그런 경험이 있나요?
A: 말하자면 오스씨 성토대회를 열자는 말이죠?
이런 이야기라면 밤새도록 할 수 있습니다.
오스씨는 내가 살면서 만나본 사람 중에 ‘특이한 능력’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오스씨가 김치를 안 먹는 사실은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알죠.
멀리서 냄새만 맡아도 인상을 찡그리는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일본 온천 여행지 유후인에 갔을 때예요. 다양한 재료와 해산물을 얹은 덮밥이 인기라길래 시켜 먹는데,
갑자기 오스씨의 표정에 물음표가 떠올랐습니다.
“이 안에서 김치의 느낌이 나.”
“무슨 소리야. 여기 일본이야. 김치는 무슨.”
저와 일행은 아무도 김치를 느낄 수가 없었어요.
재료를 다 뒤져봐도 김치 비슷한 모양도 없었고요.
그래도 자꾸 김치의 혼이 느껴진다며 먹기를 주저하길래 짜증이 나서 일본어가 되는 친구를 통해 주인에게 물어봤습니다.
“오! 스고이데스네! 감칠맛을 내기 위해 묵은지를 아주 잘게 갈아서 살짝 깔아 두었는데, 그걸 찾아낸 손님은 처음이무니다.”
알고 보니 일본인 주방장의 부인이 한국인이고, 경상도 고향에서 묵은지를 공수해 온다고.
얼마나 싫어하면 시치미까지 뿌려서 각종 향으로 범벅이 된 그릇 안에서 갈아서 맛만 낸 김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걸까요.
이건 찐이다, 찐!
그의 김치 혐오 취향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김치 말고도 안 먹는 음식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그의 편식 사랑 중 압권은 제사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스씨는 제수 음식을 안 먹습니다.
귀신이 붙어있는 것 같아서 싫대요.
그래서 평소 탕국처럼 보이는 국, 동그랑땡 같은 각종 전, 제사상에 꼭 올라가는 부세나 민어 같은 생선, 다 안 먹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식당은 경상북도 안동에 많다는 헛제삿밥 집이지요.
“그럼 자기는 제사나 차례 지내러 가면 뭐 먹어? 어머니가 따로 뭘 해주셔?”
“그럴 정신이 어딨어. 그냥 김만 먹는 거지.”
제수 음식을 만들 때 쓰인 재료가 아닌 순수한 밥과 공장에서 만든 낱개로 포장된 김만 먹고 온답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Q: 뭔가 내공이 느껴지는 편식이네요. 확실히 깨긴 합니다.
그밖에 또 특이한 능력이 있나요?
A: ‘옷을 못 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스씨가 재작년에 환갑을 넘겼는데요, 대학생 때 입던 옷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종종 입기도 하고요.
오스씨는 옷을 아주 사랑하는 패션피플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젊게 세련되게 입고 다니죠.
처음 만났을 때 그 점에 호감이 갔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네요.
저를 만나러 올 때마다 항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깔맞춤을 선보이곤 했지요.
그러나 어느 날, 그의 기벽을 알아내고야 말았습니다.
뜨거운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가지를 정리하는데, 보고야 말았죠.
엉덩이에 구멍이 나 있는 낡은 팬티를...
그 구멍에 손가락을 끼워 들고는 흔들어대며 물었습니다.
“이거... 뭐야?”
대학교 때부터 입던 팬티랍니다.
천이 삭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구멍에 다른 손가락을 넣어 좌우로 쫙 벌려 찢어버렸습니다.
비명을 지르는 그를 닦달하니 실토하더군요.
자신은 옷을 버리지 못한다고.
그의 집에 처음 간 날이 기억나네요.
방 하나를 통째로 옷방으로 쓰고 있더군요.
빛이 들지 않도록 창문을 암막으로 가리고, 온종일 제습기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 병 못 고치면 못 사귄다... 주먹을 불끈 쥐었었죠.
Q: 그래서 병을 고쳤나요?
A: 네, 고쳤습니다.
제가 그의 카드로 옷을 마구 사대자 더는 옷을 보관할 장소가 없어졌고, 결국 눈물을 흘리며 낡은 옷을 버리더군요.
이래서 치료 중 최고는 “금융치료”라고 하나 봐요.
Q: 갈수록 놀라운 능력이 쏟아지고 있네요. 또요, 또 없나요?
A: 잠이 안 온다면서 밤새도록 공포 영화를 여러 개 볼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침대에 누운 자세로 손가락만 움직이며 휴대폰 게임을 서너 시간 거뜬히 해내는 능력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의 최고의 능력은 착붙능력,
일명 껌딱지 능력이라고 할 수 있죠.
Q: 껌딱지 능력이요? 그게 뭔가요?
A: 말 그대로 껌딱지처럼 붙어서 안 떨어지는 능력이에요.
제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는 절대로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아요.
착 붙어서 함께 하려고 하죠.
Q: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그거 약간 심리스릴러물에 나오는 느낌, 같은 건가요?
A: 오히려 코미디 장르에 가까워요.
MBTI로 치면 전 E의 세제곱 정도 되는 인간인데, 오스씨는 I란 말이죠.
집에서 영화나 보고 게임만 하길 원하는 사람이 역마살이 낀 남자에게 착붙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죠?
1. 태어나서 처음 타본 오토바이 뒤에 앉혀진 채 전국 일주를 해야 한다. 심지어 텐트 여행.
2. 태어나서 처음 타본 자전거로 국토대장정에 나서야 한다.
3.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알프스의 산꼭대기에 나 있는 구름다리를 건너야 한다.
집이나 근처 카페 등지에서 그냥저냥 착붙해서 안락하게 뒹굴고 싶은데, 난이도가 점점 높아지는 거죠.
Q: 뭔가 안타까움이 느껴지는군요.
A: 심지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트와이스의 <Yes or yes!>거든요.
“거부는 거부해!”
안 따라올 거면 나 혼자서라도 간다는 신념으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나 여기 가고 싶어.”
“잉? 너무 높잖아. 무서워.”
“그치? 그럼 나 혼자 갈게.”
“......”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서 그의 착붙능력은 사실상 저주에 가까워지는 거죠.
Q: 안타까움을 넘어 불쌍하기까지 하네요.
그의 눈높이에 맞춰서 E의 폭주를 조절해 볼 생각은 없나요?
A: 안 그래도 이제는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작년 제주 여행에서 갑작스러운 아드레날린의 폭주로 한라산을 등정했잖아요.
그 대가로 여름 내내 둘 다 물리치료실에서 살았습니다.
세월이, 신체 시계가 ‘자중하라’ 권고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안락한 공간에서 그의 착붙능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배려할 생각입니다.
Q: 그의 능력이 사라지길 바라지는 않나요?
A: 글쎄, 모르겠어요.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의 껌딱지 능력이 사라질 때가 우리가 헤어질 때구나, 하고요.
무리해서라도 연인 옆에 딱 붙어있으려고 하는 거, 뭔가 부르는 다른 이름이 있지 않나요?
사실 저라면 그렇게 못했을 거 같아요.
전 싫은 것은 때려 죽어도 안 하는 성격이라 누군가에게 맞추기 위해 싫은 것까지 하면서 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상대가 가족이라도요.
한 사람이 이렇게 독불장군처럼 구니, 둘의 관계가 이어지려면 결국 한 사람이 져야만 하겠죠.
내키지 않는 일도 해야 하고, 가기 싫은 곳도 가야 하고, 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하고, 먹기 싫은 것도 먹어야... 아, 이건 빼고.
한때는 그의 껌딱지 능력이 시들해진 적이 있었어요.
갱년기로 장난 아닐 때였죠.
먹고, 자고, 입고, 노는 일상은 똑같이 돌아가는데, 뭔가 공기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아, 이제 진짜 신혼은 끝이구나, 하는 느낌.
우리 관계에서 챕터 2가 펼쳐지고 있는데, 열어보고 싶지 않은 느낌.
앞서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우기고 싶은 느낌.
하지만 부정만 하고 앉아있으면 한 걸음도 앞으로 걸어갈 수 없을 것 같은 그때,
그 어둑어둑한 감정의 골짜기를 헤맬 때도 결국 조그마한 빛이나마 앞을 비춘 것은 역시 그의 껌딱지 능력이었습니다.
“아무리 싸워도 절대 떨어져 있으면 안 돼.”
조금만 불편한 상황이 닥쳐도 용수철처럼 일단 튀고 보는 역마살 귀신을 꽉 붙잡고 놔주지 않는 질긴 껌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론 갑갑하게 느껴지고 귀찮긴 하지만, 껌의 인장 응력이 절대 흐물흐물해져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Q: 뭐여, 신나게 애인 욕 하는 줄 알았는데, 결국 자랑질을...
A: 욕을 원해요?
무궁무진합니다.
밤새도록 얘기할 수 있어요.
오스씨의 손과 발은 짧고 뭉툭한 데다 길쭉한 털들이 자라 있어서 꼭 호빗 같답니다.
눈도 너무 작아서 티브이를 볼 때 가끔 그를 바라보면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자? 물어보면 안 자! 역정을 냅니다. 콤플렉스예요.
또 뭐가 있더라...
아, 맞다. 우리가 침대에 난방 텐트를 치고 자는데, 꼭 안에 들어와서 방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