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커플은 무엇으로 사는가 05
2023년 2월 21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동성 부부의 권리를 인정하는 역사적인 재판이 있었다.
동성 부부의 배우자도 건강보험의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판결이 그것이다.
물론 동성 부부라고 칭하지는 않았다.
재판부는 동성결합이라는 단어를 썼고, 이 결합이 “이성 부부의 사실혼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판단했다.
대한민국의 법은 다양한 이유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이성애자 부부의 권리를 보장해 왔다.
거기에 동성 부부가 추가된 것이다.
같은 정서적, 경제적 공동체라면 굳이 성별에 따라 차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판결문의 요지였다.
“사실혼 배우자와 동성결합 상대방은 모두 법률적인 의미의 가족관계나 부양의무의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는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라는 점에서 양자가 다르다고 할 수 없어 사실혼 배우자 집단에 대해서만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고, 동성결합 상대방 집단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에 대한 차별대우에 해당한다.”(판결문 중에서)
Q: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의 시대가 된 만큼 사실혼 관계인 이성애자들도 꽤 많죠?
A: 맞아요. 이십 년 전 연예인인 전유성 진미령 부부가 결혼하지 않고 산다고 했을 때만 해도 특별한 사건으로 기사화됐었는데, 이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 형태가 됐죠.
오스씨의 조카도 그렇고, 제 친한 친구도 혼인신고 없이 파트너와 오랫동안 같이 살고 있습니다.
양가에서 인정하고 왕래도 하면서 지내더라고요.
Q: 이성 부부와 동성 부부의 사실혼, 뭔가 다른 점이 있을까요?
A: 함께 사는 데 성별이 의미가 있을까요? 살림살이 장만해서 집 꾸미고, 장 봐서 밥 해 먹고, 청소, 빨래하고, 애완동물 기르고, 화초 물 주고, TV 보면서 수다 떨고... 애가 있으면 집안 풍경이 조금 달라지겠지만,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죠.
저희는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경우라, 집안 행사에는 언제나 부부동반입니다.
코로나 전에는 여행도 같이 다녔고요.
가족들과 만나면 돈 버는 얘기, 살림 얘기, 건강과 피부미용 얘기, 조카들의 미래 얘기 등 뻔하디 뻔한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굳이 차이점을 꼽자면, 보통 집안사람들끼리 모이면 성별에 따라 대화의 주제가 나뉘곤 하는데, 우리는 여성용, 남성용 수다를 두루두루 구사할 수 있어서 양쪽 모두에게서 환영받는다는 정도? 후후.
Q: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동성 부부라고 적시하지 않고 동성결합이라고 했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A: 한때는 결혼이랄지, 부부랄지 하는 용어들에 집착하던 때가 있었는데, 나이를 먹어서인지 이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동성 부부면 어떻고, 동성결합이면 어떻고, 동성 합체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차별하면 안 된다는 원칙! 이겠죠.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가다 보면,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돌아보게 되는 일이 많은데요.
최근에 장애인들의 지하철 타기 운동을 바라보면서 시스템이 소수자를 배제하는 폭력적인 방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동안 지하철은 약속 시각을 지켜주는 빠르고 안전한 교통수단이라는 이미지였는데,
사실은 재빨리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쫓아내야 빠르고 안전해지는 치사한 교통수단이더라고요.
“조금 늦게 가더라도 소외되는 시민 없도록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가 아니라,
“대다수 고객님을 빨리 목적지에 보내드리기 위해서, 승하차시 시간이 걸리는 몸이 불편한 승객들은 이용을 자제해 주세요.”라니...
누군가를 배제해야 누릴 수 있는 편리가 과연 우리가 추구할 가치일까요?
결혼제도도 마찬가지죠. 해방 전만 해도 집안 어른이 결정하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당연했었다고 하더군요.
각종 소설과 드라마, 영화 덕에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라는 인식이 형성된 게 겨우 한 세대 전인데, 이미 혼전 동거, 이혼, 졸혼, 사실혼, 비혼의 시대가 되었죠.
요즘 젊은이들에게 결혼은 인기 없는 제도입니다.
동성 부부가 포함된다고 신성함이 더 떨어질 것도 없는 지경이니 까짓 거 동성혼도 가능하게 해 줍시다!
이제는 차별하지 않는 제도로 거듭날 때가 됐다고 봅니다.
Q: 어찌 됐든 판결이 났으니 그럼 앞으로 두 분은 법적 부부의 권리를 조금은 누릴 수 있게 되는 걸까요?
A: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이런 문제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왔기 때문에 당장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는 모르겠어요.
건강보험 관련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오스씨는 직장인이고, 저는 사업자 등록증을 가진 지역가입자니까요.
오스씨가 은퇴 후 지역가입자가 되고, 보험공단에 동성 부부임을 입증하면 보험료 혜택을 받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Q: 그러네요.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동성 부부임을 입증해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겠군요?
A: 그렇지 않을까요? 행정기관에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리기 싫은 커플은 혜택을 받기가 어렵겠지요.
어쩌면 많은 동성 커플에게 이번 판결이 그림의 떡,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선진국처럼 다양한 형태의 “정서적, 경제적 결합들”에 동일한 혜택이 적용되면 동성애자도 마음 놓고 제도를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앞서 실천한 나라들에서 다양한 형태의 시민결합법이 만들어진 이유도 이러한 애로사항 때문이었겠죠.
우리나라도 이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는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Q: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이네요.
A: 이제 겨우 시작이다,라는 느낌도 있지만 그렇게 나쁘지 않은 출발입니다.
판결문에 혼인은 여전히 남녀의 문제라는 인식이 들어 있지만, 두 명의 동성애자가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결합해서 살아가는 형태,
즉 지금 나와 오스씨가 살아가는 모습을 인정해 주고 차별해선 안 된다고 천명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위로가 됩니다.
재판부는 동성애 차별이 왜 사라져야 하는지도 충분한 설명을 덧붙였다고 해요.
"추가로 어떠한 차별이 ‘성적 지향’을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간략하게 덧붙이고자 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각국에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성애와 같은 성적 지향 소수자들에 대한 명시적·묵시적 차별이 존재해 왔음은 이를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성적 지향은 선택이 아닌 타고난 본성으로, 이를 근거로 성격, 감정, 지능, 능력, 행위 등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영역의 평가에 있어 차별받을 이유가 없다는 점에 대한 인식이 확인되고 있고,
그에 따라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기존의 차별들은 국제사회에서 점차 사라져 가고 있으며,
남아 있는 차별들도 언젠가는 폐지될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제3호에서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을 전형적인 평등권 침해 차별행위 유형 중 하나로 열거하는 등
사법적 관계에서조차도 성적 지향이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고 있으므로,
사회보장제도를 포함한 공법적 관계를 규율하는 영역에서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할 것이다.
누구나 어떠한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이기도 하다.”(판결문 중에서)
Q: 인권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법원의 책무라는 부분이 특히 감동적이네요.
A: 저도 그랬어요. 사법 불신 시대잖아요.
이런 판결은 솔직히 예상 못 했어요.
이번 기회에 법 관련 공부를 좀 해볼까 싶을 정도예요.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하고,
문화적으로도 세계에서 알아주는 나라가 되었지만,
해외 선교로 성금 거두다가 온갖 말썽에 휘말려 국민 여론이 안 좋으니까
언젠가부터 동성애 반대로 밥벌이하는 보수 기독교 세력(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의 눈치를 보느라 “그깟 동성애 하나” 포용하지 못하는 나라라니,
부끄러운 일이잖아요.
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도대체 몇 년을 썩고 있나요.
입법부가 후진국 수준으로 놀고 있으니 사법부가 선진 입법 좀 하라고 이번에 제대로 혼내줬어요.
Q: 이번 판결에 대한 오스씨의 반응은 어떤가요?
A: 사실 오스씨도 보험이니 세금이니 하는 문제는 잘 몰라요.
그냥 멋진 판결이 나왔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죠.
아무래도 대만처럼 동성결혼이 합법화됐다거나 하는 식의, 누구나 알기 쉬운 재판 내용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이게 어디냐며 그날 동네 술집에서 우리끼리 건배를 했어요.
게이 커플에게는 충분히 축하할만한 날이잖아요.
위장을 활짝 열고 먹부림을 부렸더니 신이 난 사장님이 팔다 남았다면서 코끼리 조개 숙회를 서비스로 내주셨어요.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안주였는데...
여러모로 아름다운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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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의 일부는 홍변호사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https://blog.naver.com/lez_law/223024248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