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어제, '성소수자 나이 듦' 강연을 마쳤습니다.
내밀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가급적 적은 분들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못된 생각을 했었는데, 기대보다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시니 또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나 살아온 이야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또 이렇게 길게 하게 될 줄이야...
처음 강연문을 적어 내려 갈 땐 예쁘고 우아한 단어들을 고르고 골라서 누구에도 책 잡히지 않을 인생을 살았다오~ 자랑해야지, 하는 마음이 쪼~금, 쬐끔쬐금 있긴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까 "진짜들"이 쏟아져 나오더라고요.
좀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인 기억들이...
화들딱 놀라서 그거 주워 담아 도로 넣어두고, 그나마 남 앞에 내놓을만한 것들을 추려서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내서 가지런히 담았습니다.
보기 좋더라고요.
근데 AI의 터치가 가미된 것 같은 그 느낌.
나랑 비슷하긴 한데, 묘하게 이질적인 그 사연들이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싹 다 버리고 다시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정도면 진실에 가깝다... 스스로 합격점을 줄 원고를 만들게 됐습니다.
문제는, 너무 길다....
강연시간을 훌쩍 넘겨버릴 양이라서 또 한참을 줄였는데도 주어진 시간을 결국 조금 넘기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시간을 체크해 보니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후반부는 거의 랩을 하는 수준으로 원고를 읽었더라고요.
이런 걸 또 하게 된다면, 그땐 시간을 가장 우선시해서 원고를 써야겠다, 깨달은 경험이었습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브런치 이웃분들에게도 알려드리고 싶지만, 유료 강연이었기 때문에, 원고를 여기에 올릴 수는 없네요.
대신 PPT일부와 강연을 요약한 내용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이번에 한 강연 내용에 살을 조금 더 붙여서 오스씨와의 커플인생에 대한 글을 모은 브런치북을 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우비입니다. 올해 쉰셋이고, 게이 커뮤니티에 발 디딘 지 30년, 지금은 20년째 애인 오스씨와 동거 중입니다. 오스씨는 저보다 12살 많아 저희는 띠동갑 커플이고요.
예전엔 큐라이프센터에서 진행한 성소수자 나이 듦 강좌를 듣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 ‘동성커플을 위한 실용법률 가이드북’, ‘퀴어웨딩 A-Z’ 같은 자료들은 우리 인생에 실제로 영향을 줬어요. 그랬던 제가 직접 이런 강연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살아온 이야기만 해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에 용기 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긴 얘기지만, 핵심은 하나예요. 성소수자로 오래 사는 것도, 함께 사는 것도 가능한 일이란 걸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20대엔 증명하고 싶은 욕망으로 연애에 집착했지만 실패를 반복했고, 서른을 넘기며 결혼 비슷한 걸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맞선처럼 여섯 명을 만났지만 ‘섹시함’이 부족하다며 다 거절했죠. 그러다 지저분하기로 소문난 야한 채팅방에서 우연히 오스씨를 만났습니다.
서울-부산 장거리였고 띠동갑이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제가 먼저 고백했고, 1년 뒤 제가 부산으로 내려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정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인연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그때 배웠어요.
동거 초반, 오스씨는 혼자 산 지 15년이라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이반시티’에서 찾은 커플 모임에 가입했어요. 다양한 커플을 만나며 우리도 충분히 동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모임을 통해 같은 고민을 나누고, 반면교사도 얻고, 우리 커플의 가치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어요. 10년 넘게 관계를 이어온 친구들도 대부분 그때 만난 분들입니다.
동거하면서 수없이 싸웠습니다. 반려동물, 가족, 친구, 정치 성향까지. 가장 힘들었던 건 ‘친구’ 문제였어요. 게이 커플에겐 친구가 시댁도 되고 처갓집도 되거든요.
결국 서로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둘이서만 노는 생활로 바뀌었어요. 외롭기도 했지만, 덕분에 전국 방방곡곡을 함께 여행하며 기억에 남는 추억도 많이 쌓았습니다.
싸움이 많았지만 헤어지지 않았던 건, 서로 진짜 사랑했고, 또 저는 오스씨가 정말 섹시했기 때문이에요. 유머 같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 유일한 '어리광 받아주는 사람'이기도 했고요.
커플 간의 갈등 밑바닥엔 늘 “혹시 헤어지면?” 하는 불안이 있었어요. 특히 돈 이야기를 못 하게 됩니다. 돈 이야기를 꺼내면 “너 속물이다”는 말이 쉽게 나오니까요.
하지만 돈 이야기를 안 하면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는 감각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꼭 말하고 싶어요. 돈 얘기,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저희는 결국 '재산공증' 문서를 만들었고, 그게 우리가 처음으로 만든 공식 서류였습니다. 종이 몇 장인데도 ‘우린 이제 아무 관계가 아닌 게 아니다’는 든든함이 생기더군요.
저는 비교적 일찍 커밍아웃했고, 오스씨는 55세에 가족에게 커밍아웃했어요. 그때 반응이 너무 싱거워서 허무할 정도였죠. "다 알고 있었는데 왜 이제야 말하니?" 이런 반응이었습니다.
처음엔 서로의 가족 행사에 드나들며 인정받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은 가족들도 우리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가족에게는 늘 서로를 칭찬했고, 절대 흉 안 봤습니다. 뇌이징! 많이 했고요.
10년이 지나고 찾아온 건 권태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여행 사진밖에 남은 게 없더라고요. 방탄 팬질, 일본 여행… 어느 순간 게이스러움이 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글쓰기를 하며 회복하기 시작했어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나이 듦을 고민하면서 다시 글을 쓰게 됐고, 결국 오스씨와의 여행기를 전자책으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참여한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큰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우리가 '늙어서도 함께 사는 게이 커플'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느꼈다고 해요. 젊은 퀴어들에게도 '나이 든 미래'를 상상하게 해주는 역할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고, 앞으로의 삶에서 중요한 활동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은 우리 일이 아니야’ 생각했지만, ‘모두의 결혼’ 인터뷰를 계기로 변화가 생겼습니다. 연금 등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고, 마침 주변 커플들도 함께 결혼하자며 동참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여섯 명이 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의 결혼증서를 받아왔어요. 증서 하나로 법적 효력이 생긴 건 아니지만, 우리 관계에 있어 큰 심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총 네 개의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재산공증, 유언장, 전자책, 그리고 결혼증서.
게이 커플은 문서로 증명해야 합니다.
20년을 함께하다 보니 성적인 부분에서 변화가 생겼습니다. 처음엔 폐쇄적인 커플이었지만, 서로의 성욕 차이, 건강 문제 등으로 오픈릴레이션쉽을 탐색하게 됐어요.
경험해 보니 오히려 헛된 욕망을 정리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습니다. 꼭 섹스를 위한 것이 아니라 관계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었습니다. 결론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결혼생활은 늘 싸우고, 타협하고, 또 사랑하는 과정입니다. 문서도 만들고, 몸도 마음도 단단해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100세 시대지만, 게이 커플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작은 기록들을 남기고, 관계를 증명하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 이 강연도 하나의 문서가 되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