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의 학교 폭력 피해자 동은은 가해자 무리의 두목 격인 연진의 딸이 다니는 세명초등학교의 담임으로 부임하기 위해 6개월간이나 세명재단 이사장 김신태씨의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수거해 약점이 될만한 것들을 찾는다.
문서 파쇄기에서 나온 종이들을 붙여가다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유언장을 찾아내는데...
화면 캡처해서 보니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전략)... 마지막으로 나의 오랜 친구 조수현(주2: 세명재단 어쩌고... 1983년 7월 11일생)에게 다음의 재산을 유증 한다.
화면이 흐려서 자세한 재산목록은 보이지 않지만 지상 건물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상속 내용이 자잘한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은은 조수현이 이사장의 내연녀가 아닐까 예상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남자이며 김신태씨의 운전기사였다.
그리고 동은의 조력자 현남을 통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현남은 이사장이 차를 타기 전 운전기사와 나누는 대화를 입 모양으로 해독해 냈다.
조수현은 김신태씨에게,
“자기야, 오늘은 앞에 타~”
라고 귓속말을 한다... 고 현남은 주장하고, 이후 동은의 협박이 먹힌 것을 보면 그 사실은 옳아 보인다.
올해 67세의 세명재단 이사장 김신태씨는 동은이 작성한 가계도에 따르면 부인 라희숙 사이에서 3명의 자녀를 둔 유부남 게이로 설정되어 있다.
사실 드라마 설정에서 김신태씨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게이였더라도 동은의 협박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학교법인의 이사장이 게이라고?
학부모들이 들고일어나지 않을까?
아무리 그가 지난 십 년간 300억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기부해 온 모범 시민이라도 말이다.
어쨌든 작가가 그를 유부남 게이로 설정한 덕에 <더글로리> 시청자 중 일부는, 그가 동은의 협박을 받는 모습에서 ‘사이다’를 느낄 수도 있다.
바람을 피우는 유부남을 응징하는 것이니 말이다.
거기다 게이이기까지 해?
젊은 운전기사가 애인이라고?
그런 더러운 성욕을 가진 탐욕스러운 늙은이에게 겨우 1학년 2반 담임을 맡게 해 달라는 딱 한 가지만 요구해?
“착한 동은이 만나서 다행인 줄 알아, 이 색마 늙은이야!
나 같으면 당장 다 꼬발라서 사회적으로 매장시켰어.”
라고 생각한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래의 수많은 유부남 게이들을 알고 있는 나의 눈에 55년생 김신태씨의 삶은 전혀 다른 그림이다.
1972년생인 내가 게이 커뮤니티에 처음 발을 디딘 때가 1995년이었다.
당시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55년생은 40대 초반이었고, 대다수가 유부남이었다.
지금은 다소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한국 남자들이 받았던 결혼 압박은 상상을 초월했다.
삼십 중반인데 미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문제가 있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직장생활에서도 눈에 띄게 불이익을 받았다.
남자를 좋아해서 여자와 결혼하지 못한다고 하자 어머니가 식칼을 들고( 아버지가 낫을 들고, 형제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등 다양한 변주가 있다) 같이 죽자고 덤벼들어서 할 수 없이 결혼했다는 이야기,
결혼하지 않으면 승진은 없다는 기업 분위기 때문에 결혼했다는 이야기,
결혼 안 하면 재산을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해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흔한 레퍼토리였다.
이십 대 게이들도,
이성애자 여성을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없으니 결혼해 줄 레즈비언을 찾는다고,
무슨 짓을 해서든 돈을 구해서 결혼 압박 없는 외국으로 갈 거라고 떠들어댔다.
게이로서 당당하게 살겠다는 사람보다 최대한 결혼을 늦추면서 살다가 더는 압박을 못 견디면 그때 결혼한다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정체성 이론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은 시기라 ‘여자와의 결혼은 인간의 도리’이고 ‘남자에게 성욕을 품는 일’을 못된 버릇 정도로 여기는 게이들도 많았다.
남자와는 오로지 성욕을 풀 뿐, 사랑은 없다고 주장하는 게이들이 너무 많아서 게이 인권운동이란 말도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게이라는 사실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자꾸 커밍아웃을 내세우는 인권운동가들 때문에 자신들의 공간이 노출될까 두렵다는 게이들이 부지기수였다.
55년생 김신태씨도 사회가 강요한 선택을 하고, 가정을 꾸렸을 가능성이 크다.
자녀들의 출생연도가 87년생 승미, 90년생 승연, 92년생 승조인 걸 보면, 어쨌든 결혼 후 십 년 정도는 부부생활에 충실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고민 없이 살았을지도 모른다.
특정 남자들을 볼 때마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무어라 정의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평범한 가장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 막내아들 승조가 태어나고 두 해가 지난 1994년,
당시 연세대 대학원생이었던 서동진씨가 커밍아웃을 하며 그야말로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어진다.
“지성인인 연대 대학원생이 게이라고? 게이는 여장하고 술집에서 일하는 애들 아니었어?“
그동안 <선데이서울> 같은 삼류 잡지에서 범죄나 변태성욕으로 언급되던 동성애가 대한민국 일간지와 대학가에서 담론으로 다뤄지게 된다.
이 한 명의 커밍아웃으로 인해 그동안 자신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전국의 많은 동성애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다.
나 역시 그때 ‘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게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자각했는데,
교육 재단에 몸담은 김신태씨가 이런 이슈를 접하지 못했을 리 없다.
당시 서동진씨는 정보에 굶주린 전국의 게이들을 위해 삐삐번호를 공개했는데 매일 엄청난 양의 문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나 역시 그를 통해 게이커뮤니티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어쩌면 김신태씨 역시 같은 루트를 통해 종로 파고다 극장 근처에 게이들이 모이는 술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지도 모른다.
당시 40대 초반이었을 그가 방문했을 가능성이 큰 술집은 그 나이대의 남자들이 주로 가는 <남정>, <리바이벌> 등이었을 것이다.
유부남 게이들로 바글거렸고, 중년 남자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드나들었던 유명한 게이바들이었다.
아직 게이 데이팅 어플이 없던 시절이므로, 둘은 게이바에서 만나 첫눈에 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와 그의 연인 조수현은 27살 차이가 난다.
깜짝 놀랄만한 나이 차지만, 나 역시 오스씨와 띠동갑이고, 지난주 만난 게이 친구는 스물두 살 어린 친구랑 만나고 있다.
게이들은 이성애자들과 달리 파트너를 고를 때 나이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 분위기고,
띠동갑을 넘어 아버지뻘인 남자에게서 사랑을 느끼는 게이들도 생각보다 많다.
귀여운 얼굴의 작은 키를 가진 중년 남자, 남자답게 생긴 데다 다부진 체격을 가진 젊은 남자는 거의 교과서에 가까운 커플링이다.
(최근에 OTT 서비스로 개봉한 해리 스타일스 주연의 퀴어영화 <나의 경찰관>의 두 커플이 딱 이런 조합이었다. 이쪽은 반대로 젊은 쪽이 유부남 게이였지만.)
조수현의 나이가 40살인데, 그에게 건물을 주고 싶을 정도의 애정이라면 한두 해 연인은 아닐 것이다.
유언장에 “오랜 친구”라고 적힌 것을 보면 최소 십 년 이상 연인 관계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정도의 나이 차이에, 십 년 이상 연인 관계라면 그건 보통 사랑이 아니다.
예상 가능하듯, 게이들의 십 년 사랑은 이성애자의 삼십 년 사랑만큼 많은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다.
언제부터 운전기사를 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젊은 조수현이 연인의 운전기사로 취직할 때는 분명 많은 것을 희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지위가 어떻든 함께 있고 싶다는 감정이 우선이 되었기에 선택된 직업으로 보인다.
그걸 알기에 김신태씨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줄 결심을 한 것이리라.
혹자는 김신태씨가 돈이 많아서 건물 한 채 정도는 쉽게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세명재단은 분기당 1500억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다.
이 정도 재력이면 굳이 유언장을 통하지 않아도 애인에게 많은 재산을 쥐여줄 수 있다.
그럼에도 왜 굳이 유언장을 통해 재산을 물려주려는 걸까?
게이 커플에게 유언장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동성 커플에게, 서로의 인생에서 가장 유의미한 사람이었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법적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직접 작성할 수 있기에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타내고 싶은 의지"를 막을 수 없다.
그만큼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작성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동안 수십 쌍의 게이 커플들을 만나봤지만, 상대에게 재산을 주기 위해 유언장을 썼다는 커플은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돈 문제를 언급하기를 꺼려할 수도 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언제 헤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년째 함께 살고 있어도 그렇다.
헤어지면 문서 한 장 남지 않는 완벽한 남인데 유언장이라니, 유산상속이라니, 너무 귀찮고 사치스러운 요식행위이다.
그래서 게이 인권단체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유언장 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달랑 서류 한 장이지만, 불안정한 게이 커플의 토대를 튼튼하게 해주는 받침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하다.
김신태씨-조수현 커플은 어쩌면 해당 인권단체의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고 유언장 쓰기를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만약 김신태씨와 조수현이 많은 희생을 통해 애정 생활을 유지하는 관계였다면, 동은의 협박은 두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당신이 게이란 사실을 폭로할 거야!”
동성애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런 협박을, 전문용어로 ‘아웃팅’이라고 한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차별금지법이 아직도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나라에서,
아웃팅은 해당 동성애자의 인생을 전부 파괴할 만큼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많은 동성애자가 집에서 쫓겨나거나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셈이다.
수많은 청소년 동성애자를 자살로 몰고 가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연진이 사용한 고데기만큼 강력한 폭력이다.
김신태씨는 자신과 연인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동은의 협박에 굴복한다.
더구나 동은의 진짜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그녀가 학교에 있는 내내 불안에 떨면서 지낼 수밖에 없다.
다행히 그녀는 한 학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어머니의 촌지 접수 사건 때문에 해고되어 세명초등학교를 떠나게 된다.
아웃팅 협박에 가족까지 나서서 촌지 수거라니, 진짜 파렴치한 선생이 아닐 수 없다.
재단의 다른 임원들은 그녀를 추천한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
어쩌면 이에 책임을 지고 재단 이사장 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동은이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이 정도로 파렴치한 모녀라면 언제 또 아웃팅을 무기로 쓸지 모른다.
한때 세명초등학교에서 근무했던 문동은 선생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라도 하면 모를까(드라마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는다), 아웃팅의 불안은 아마 두 사람의 사랑이 지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그녀는 아직 세명시에 살고 있다!!!!
과연 김-조 커플은 이 위기를 극복해 내고 영광의 순간을 쟁취해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