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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보안 2] 14. 판사님은 이 글씨가 보이십니까?

어쩌면 위대한 상식의 승리

  한때 여러 기업을 대상으로 한 보안강의 요청에서 단골메뉴로 언급하고 다니던 보안소송 사례가 있었다. 바로 H사의 고객정보 관련 소송사건이다. 지금도 인터넷을 검색하면 볼 수 있는 "판사님은 이 글씨가 보이십니까?"라는 표현으로 화제가 되었던 사건이다. 굳이 이 사건을 콕 집어 얘기하는 이유는 이 하나의 사건이 정보보안업계에 끼친 영향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상당히 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먼저 이해를 위해 사건의 개요를 간단히 설명하자. H사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고가의 경품이 걸린 추첨 이벤트를 진행하였고, 이를 통해 제법 많은 고객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고객들의 동의는 당시의 법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갖춰 받았다. 이후 수집한 고객정보를 여러 보험회사에 판매하여 상당한 규모의 수익을 얻었으며, 관련 담당자들은 두둑한 성과급까지 챙겼다. 마지막으로 이벤트에 참여한 고객들을 대상으로 경품 추첨을 진행해 대형 TV, 냉장고와 같은 고가의 경품들을 당첨자들에게 지급하였다. 그런데 추첨 과정에서의 불법조작 의혹이 불거지게 되면서 소송의 불씨가 댕겨지게 된다.


이제부터 왜 이 사건을 의미 있고 중요하게 여기는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해 보고자 한다.


첫째, 수집과정은 법에 충실했다

  긴 시간이 소요된 대법원까지의 소송에서 H사가 최종 패소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벤트를 통한 고객들의 개인정보 수집 과정은 당시 법의 요구사항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 이 사건의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수집과정은 법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종 대법원 판결에서 패소했다는 점이 기업들이 그리고 정보보안조직들이 중요하게 되새겨봐야 할 점이다.


둘째, 항상 사고는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시작된다

  정작 소송의 발단이자 시작점이 된 것은 경품추첨이었다. 담당자들과 여러 증인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합리적으로 안전하게 수행되었다고 믿은 경품추첨이 실제로는 추첨 프로그램을 개발한 개발자의 조작이 있었음이 차후 드러난 것이다. 고가의 경품에 당첨된 사람들이 개발자(내부자)의 친인척 및 친구 등 주변 지인들로 밝혀지며 소송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어쩌면 경품추첨만 투명하게 진행되었다면 소송은 진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 H사는 고객의 무서움을 간과했다

  이 사건에서 경품추첨 과정의 비리를 밝혀낸 것은 바로 그 무섭다는 네티즌 수사대였다. 당첨자들이 개발자의 지인들임을 찾아내고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서 시민단체들이 나서게 하였다. 소송이 시작되게 만드는 감초 역할을 톡톡하게 해낸 것이다. 물론 비리행위 자체는 H사가 아닌 개발자의 개인 일탈로 정리되었지만 기업이 왜 내부의 모든 과정들에서 부정이 없도록 통제하고 관찰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 대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때로는 법보다 상식이 우선일 수 있다

  시민단체들은 수집과정에서 1mm 크기의 작은 글씨로 쓰여 시력이 좋은 사람도 읽기 힘든 동의내용을 통해 고객정보를 수집한 과정을 문제로 지적하며 H사의 부당함을 피력했다. 비록 글씨가 작지만 당시의 법 기준을 충족하고 있어 1심과 2심에서는 H사가 승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종 대법원에서 앞으로도 두고두고 언급될 화제의 문구 "판사님은 이 글씨가 보이십니까?"라는 1mm 크기의 작은 글씨가 쓰인 항의서한이 판사에게 제출되면서 판결의 방향이 뒤바뀌게 된다. 

  당시 대법원 판결을 맡은 판사가 공정과 상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공교롭게도 시력이 안 좋아서 항의서한이 내포한 시민들의 분노에 충분히 공감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그 결과 H사는 법 기준을 충족하고 있었음에도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하게 된다. 법과 더불어서 보편적인 상식을 지키는 것도 기업에게 필요한 덕목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판례가 생긴 것이다.


다섯째, 법이 바뀌었다

  H사 사례로 인해 법이 바뀌었다. 고객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중요한 내용은 9mm 이상의 크기로 표기하도록 변경된 것이다. 상식적으로 당연히 했어야 할 것을 지키지 않아 법으로 강제해야만 하는 우리의 암울한 처지를 보여주는 슬픈 사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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