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의 자리에서, 리더십을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
나는 개발자다. 그래서 대부분의 하루를 문제와 함께 보낸다. 에러를 만나고, 원인을 찾고, 고치고, 다시 확인한다. 일이 잘 풀릴 때도 있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하루가 끝나는 날도 있다. 개발자에게 하루는 늘 예상보다 길거나, 예상보다 무겁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코드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리더와 함께 일하는 방식이었다.
업무는 대개 가볍게 시작됐다. 회의 중에, 혹은 메신저로 짧게 전달됐다.
“이건 오늘 안에 되지?”
“꼭 오늘까지 해야 하는 급한 일이야.”
업무 지시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순간에는 이 일이 왜 급한지, 어디까지를 기대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마무리해야 하는지까지는 깊이 묻지 않게 된다. 급한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일단 처리하는 쪽을 선택한다.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집중해서 하면 하루 안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지금 하고 있던 일을 잠시 미뤄도 괜찮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일을 시작해보면, 이 일은 이미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일이었다. 중간에 담당자가 바뀌었고, 그 사이 여러 차례의 의사결정이 내려져 있었다. 지금 보이는 상태만으로는 왜 이런 형태가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바꿔도 되는지도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일을 진행하기에 앞서, 그간 어떻게 흘러왔는지와 어떤 선택들이 쌓여왔는지를 따라가는 데부터 시간이 필요했다.
점심을 앞둔 시간쯤, 더 이상 혼자 판단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상황에서 어떤 방향이 맞는지, 이미 정해진 결정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조언을 구하러 리더를 찾아간다. 리더는 잠시 이야기를 듣더니, 아침에 공유받았다는 메일 하나를 보여준다.
메일에는 이 일이 왜 급해졌는지, 어떤 배경에서 방향이 정리되었는지, 지금 단계에서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가 정리돼 있었다. 그제야 상황이 조금 또렷해진다. 지금 내가 맡은 이 일이 갑자기 생긴 요청이 아니라, 이전 결정들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는 것도 함께 이해하게 된다.
메일을 보여주며 리더는 이렇게 말한다.
“이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네가 잘해줄 거라 믿어.”
말은 여전히 부드럽다. 재촉도 아니고, 다그침도 아니다. 오히려 신뢰처럼 들린다.
이해가 된 만큼 판단은 빨라진다.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도 분명해진다. 그렇게 믿음이라는 이름 아래 혼자 일을 한다.
저녁 무렵, 리더는 먼저 퇴근하며 이렇게 말하고 지나간다. 오늘 정 안되면, 내일까지 해도 괜찮다고.
그리고 오늘도 나 혼자,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 무엇이 달라졌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비슷한 순간들은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반복됐다. 설명 없이 던져진 업무, 질문을 줄이라는 말, 신뢰라는 표현 뒤에 혼자 남아야 했던 상황들. 그때마다 나는 크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그저 다음에는 더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장면들이 조금씩 쌓이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일하는 방식이 달라져 있었다. 질문은 점점 줄었고, 혼자 일을 정리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변화는 소리 없이 일어났고, 그래서 그 안에 있을 때는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때의 나를 다시 떠올려본다.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제야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차분히 돌아보면서, 나는 리더십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리더의 자리에 있지 않았고, 결정권도 없었으며,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늘 전달받은 일부의 정보로 판단해야 했고, 이미 정해진 방향을 뒤늦게 이해하며 속도를 맞춰야 했다.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쪽이었지만, 그 결과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언제나 가장 늦게 도착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리더십은 내게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아니라, 아래에서 올려다본 경험으로 남아 있다. 어떤 말이 부담으로 느껴졌는지, 어떤 침묵이 질문을 막았는지, 어떤 순간들이 신뢰가 아니라 방치로 느껴졌는지가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런 감각들은 리더의 자리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지만, 후배의 자리에서는 아주 또렷하게 남는다.
이 글은 리더십을 정의하려는 글이 아니다. 좋은 리더가 되는 방법을 정리한 매뉴얼도 아니다. 대신,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일했던 한 사람이 리더십을 어떻게 경험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말 한마디의 타이밍, 업무를 던질 때의 설명, 피드백이 오가는 시간대, 의견을 받아들이는 태도. 리더의 하루 전체가 아니라, 후배의 하루를 오래 남게 만드는 몇 개의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 순간들을 하나씩 다시 꺼내보려 한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개를 끄덕일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