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일이라는 말로 건네진 지시들
“이거 팀장님 지시사항이라서요. 오늘까지 부탁드릴게요.”
“전에 하셨던 업무 피드백인데, 이것도 같이 반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사업부에 전달한 코드에서 이슈가 났대요. 잠깐만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A님이 원래 맡으셨던 건데, 지금 좀 바쁘셔서요. 대신 처리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 말들은 서로 다른 순간에,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하지만 대부분 리더의 판단이나 지시를 전달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직접적인 명령은 아니지만, 이 일을 지금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전달된다. 어디까지가 요청이고 어디부터가 지시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떤 일은 분명 내가 했던 업무의 연장이었다. 예전에 만들었던 코드, 내가 한 번 설명했던 구조, 내가 마지막으로 손댔던 기능. 시간이 지나 다시 문제가 생기면, 그 일은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돌아온다. 책임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하기도 어렵다. “잘하시잖아요”라는 말 한마디면, 그 일은 다시 내 일이 된다.
하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일들도 있다. 내가 관여하지 않았던 업무, 원래는 다른 사람이 맡았어야 했던 일, 혹은 담당이 명확하지 않았던 일들이다. 일정이 밀렸거나, 담당자가 바뀌었거나, 지금은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생긴 공백들. 그 공백을 메우는 일 역시 리더의 판단 아래 조용히 정리된다. 그리고 그 판단은 종종 가장 손이 빠를 것 같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이때 쓰이는 말들은 대체로 부드럽다. “잠깐만 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크게 어렵진 않아요.” “금방 끝날 거예요.” 설명만 들으면 정말로 작은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일의 경계를 따지지 않는다. 이게 내 일이 맞는지, 지금 하고 있는 업무와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까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이런 믿음이 먼저 앞선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도 누군가가 알아서 조정해줄 거라는 믿음. 이 일을 맡는다면 다른 일정은 자연스럽게 고려될 거라는 기대. 급한 일 하나를 도와주는 정도로 받아들이고, 그 이상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일단 볼게요.”
이 말은 흔쾌한 수락이라기보다, 상황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시에 가깝다. 아직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리더의 판단이 있었을 것이고, 그 판단 안에는 나의 일정도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부담이 나에게만 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함께 조정될 거라고, 누군가는 이 상황을 알고 있을 거라고 여긴다. 아직까지는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이런 선택은 대부분 선의에서 시작된다. 팀의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서,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 선택을 후회로 부르기도 어렵다. 오히려 조직 안에서 자연스럽게 기대되는 태도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이런 장면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급한 일은 계속 생기고, 비슷한 말도 반복된다. 그렇게 넘어온 일들이 쌓이기 시작하면, 언제부터가 내 일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가 된다. 내가 했던 일과 하지 않았던 일, 원래는 누군가의 책임이었어야 할 일들이 모두 같은 이름으로 묶인다. ‘지금 처리해야 할 일’이라는 이름으로.
이 시점까지도 누구도 일부러 일을 떠넘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이것 좀 해주세요”라는 말 앞에서, 이 일이 원래 누구의 일이었는지, 어디까지가 내 몫인지 따지는 일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다.
그렇게 경계가 흐려진 상태에서는, 일의 시작과 끝도 또렷하지 않다. 일정표에 따로 기록되지도 않고, 회의처럼 명확한 이름이 붙지도 않는다. 하던 일의 틈에 끼어들어 잠시 처리되는 일처럼 보이지만, 그 ‘잠시’는 생각보다 길다.
그때마다 선택을 한다. 원래 하던 일을 잠시 멈출지, 아니면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할지. 두 선택 모두 부담이 따른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가 밀린다. 그리고 그 밀림은 대부분 설명되지 않은 채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이런 선택이 반복되면, 하루는 점점 잘게 나뉜다. 집중은 끊기고, 다시 시작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그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그 안에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말들에는 특별한 악의가 없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는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시작된 일들이, 언제부터 내 일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채 쌓여간다는 사실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