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축구 리뷰
2021.02.21
- 98년 만에 홈 4연패
- 22년 만에 홈에서 에버튼에게 패배
- 10년 만에 머지사이드 더비 패배
또 한 번의 역사를 썼다. 온갖 기록들을 제조하고 있는 올 시즌이다. 이쯤 되니까 패배를 받아들이는 수준과 정도가 일반적인 범위를 넘어선 것 같다. 분노를 초월해 해탈의 경지에 오른 것 같은 느낌? 뭐랄까 이제 그냥 이번 시즌은 체념하고 접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든다.
결코 질 것 같지 않아 보였던 1년 전과는 달리 지금은 어떤 팀을 만나도 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불과 1년 만에 승부를 바라보는 온도 차이가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그래서인지 결과를 수용해야 하는 마음도 쉽사리 진정이 안 된다.
일각에서는 주중 챔피언스리그 라이프치히 전에 승리를 하면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라이프치히전은 상대의 실수라는 운을 잘 거머쥔 경기에 불과했다. 즉, 리버풀이 무언가를 완벽하게 만들어내지 못한 경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머지사이드 더비에서도 여실 없이 증명되었다.
리버풀은 현재 가용할 수 있는 베스트 선수들과 최적화된 포메이션으로 나섰다. 새로운 변화를 줄 수 있는 선수나 포메이션이 없다는 것이 어쩌면 창의성을 떨어뜨리고 똑같은 패턴에 의한 결과를 가져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반면, 에버튼 4-4-1-1 포메이션으로 나왔는데, 풀백인 루카 디뉴를 미드필더로 올리고, 하메스를 오른쪽 미드필더에 배치해 그의 장기인 왼발로 루카 디뉴의 오버래핑을 지원하는 전략을 내세웠다.
전반 30초 만에 오잔 카박이 볼 처리 미스를 범하며 코너킥을 내주었다. 시작부터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카박은 전반 2분, 하메스의 왼발 스루패스를 받기 위해 돌아 뛰는 히살리송을 마크하지 못하며 실점을 내주고 말았다. 솔직히, 이 골을 먹히고 나서 나는 오늘의 패배를 직감했다.
전반 25분, 리버풀에게 또 한 번의 악재가 찾아왔다. 조던 헨더슨이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며 아웃된 것이다. 결국 헨더슨은 필립스와 교체되었고, 카박 - 필립스라는 올 시즌 또 한 번의 새로운 센터백 조합이 탄생하였다. 헨더슨의 부상을 바라보는 클롭 감독의 표정이 카메라를 통해 비추어졌는데 마치 전 세계의 리버풀 팬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아래 사진)
실점 이후, 리버풀은 압박을 가하며 에버튼의 빌드업을 방해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에버튼은 압박을 잘 풀어나갔고, 톰 데이비스를 기점 삼아 공수 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원활하게 이끌어냈다. 특히, 역습 시 좌우 윙백을 활용한 공격 전개가 인상적이었는데, 32분에 나온 시무스 콜먼의 헤딩슛은 알리송 골키퍼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점수 차이가 더 벌어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결국 전반전은 에버튼이 한 점 리드한 채 0-1로 마무리되었다.
리버풀은 후반 초반부터 아놀드 중심으로 측면 공격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볼 점유율도 높게 가져가며 동점골을 넣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특히, 시즌 중반 경기력 저하로 비판을 받던 아놀드는 오늘 경기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플레이를 하며 폼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공격진의 '골 결정력'이었다. 리버풀은 후반전에 들어서 좋은 찬스들을 많이 만들어냈으나, 모하메드 살라의 슈팅과 피르미누의 슈팅은 모두 골키퍼가 선방하거나 골문을 비껴나가고 말았다. 현 공격진의 결정력 수준은 가히 최악이었다. 시즌 초반 높은 결정력을 보여주었던 디오고 조타가 절실히 그리운 순간이었다.
기회를 놓치면 반드시 위기가 찾아온다. 후반 80분, 에버튼은 역습 상황에서 PK를 얻어냈다. 히살리송이 세컨드 볼을 가져가려는 순간에 뒤에서 태클을 시도하던 아놀드의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이것에 대해 약간의 PK 판정 논란이 있었지만, 사실 PK든 아니든 경기는 에버튼이 가져갈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기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결국, 에버튼의 키커 길피 시구르드손이 PK 득점에 성공하며 스코어를 2-0으로 만들었다. 이후, 경기는 별 소득 없이 진행되었고, 그대로 경기는 종료되었다.
이제 더 이상 부진의 원인을 수비진의 부상이라고 핑계 댈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수비가 안정화되었을 때, 공격도 원활하게 전개가 가능하고 다양한 공격 루트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지만, 최근 홈에서 528분 동안 오픈 플레이 무득점이라는 기록은 수비보다는 공격의 문제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준다.
특히나, 한 때 EPL을 호령했던 리버풀의 쓰리톱 '마누라'의 시대는 저물었으며, 이들의 플레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올 시즌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뉴페이스로 왔던 공격수 디오고 조타의 활약이 돋보였던 것은 마누라 라인의 칼날이 무뎌졌음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뉴페이스가 상대에게 읽히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물론, 반 다이크, 조 고메즈, 파비뉴가 돌아온다면 리버풀은 지금보다 탄탄해질 것이다. 그러나, 공격진의 변화가 없는 한 지지 않는 경기를 할 수는 있어도, 이기는 경기를 하기엔 고전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따라서, 변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공격진이 필요하다.
올여름 이적시장에서는 네임밸류 있는 공격수들을 수혈했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그런데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티켓도 위태로운 이 시점에서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 우선, UCL 티켓이 가장 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