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 속 인사이트
어렸을 적, 나의 동심과 세계관을 뒤흔들었던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바로, '디지몬 시리즈'다. 디지몬 시리즈는 현실 세계의 선택받은 아이들이 디지털 세계로 넘어가 파트너 디지몬들과 함께 디지털 세계를 구하는 내용을 축으로 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절정의 인기를 뽐냈던 포켓몬스터와 함께 애니메이션계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는 디지몬 시리즈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90년대 생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추억을 회상케 하는 심볼로 남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시 내가 체감했던 디지몬 시리즈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을 정도였다. 이것은 시청률이라는 수치보다는 초등학생들의 일상과 대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모든 초등학생들이 자신이 선택받은 아이가 된 것마냥 Let's go! Let's go! 하며 디지몬 노래를 불러댔고, 다마고치 비슷한 팬들럼을 들고 다녔으며, 용돈을 탈탈 털어 디지몬 카드와 피규어 같은 굿즈들을 섭렵했다. 나 역시 디지몬 시리즈의 세계관에 매료되어 매일매일을 디지털 세계에서 살곤 했는데, 애니메이션 본방 사수를 넘어 카드 수집과 RPG 게임 그리고 OST까지(OST는 어른이 된 지금도 큰 감동과 울림을 준다!) 디지몬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곤 했다.
특별히, 나는 애니메이션을 자주 챙겨봤다. 대부분이 그렇듯 '디지몬 어드벤처' 시리즈를 가장 감명 깊게 보았는데, 어드벤처 세계관 속의 다양한 설정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설정 중 하나는 문장에 관한 것이었다. 선택받은 아이들은 파트너 디지몬을 '초'진화시키기 위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문장의 힘을 빌려야만 했는데, 문장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주어진 문장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해야만 했다.
8명의 아이들은 각각 용기, 우정, 사랑, 지식, 순수, 성실, 희망, 빛이라는 문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하나씩 읊어보니 참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하는 아름다운 가치이자 미덕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문장의 종류를 눈 여겨보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가장 강력하게 원하고 추구하는 가치인 '행복'이 없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 일까? 왜 인간이 가장 관심 있어하며 영원토록 원하는 가치인 행복은 문장에 없는 걸까?
한번 상상해보자. 만약, 행복의 문장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용기의 문장을 지니고 있던 주인공 신태일은 친구를 구하기 위해 용기를 냄으로써 파트너 디지몬을 '초'진화시킬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문장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했다. 그렇다면, 행복의 문장을 지니고 있는 아이 역시 행복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만 한다면 파트너 디지몬을 '초'진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 디지털 세계는 있는 것 자체가 두려움을 수반한 모험이며, 사악하고 강력한 빌런들과의 싸움이 현재 진행형으로 다가오는 고통의 현장이다. 이런 곳에서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이들에게 행복이란 현재 닥친 위기와 상황을 극복하고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을 실현하려면 모든 싸움이 끝나고 디지털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진화도 그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한 고통의 현장이다. 즉, 아무리 정신승리로 또는 마음가짐으로 행복을 추구한다한들, 눈 앞의 현실은 행복 실현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행복의 실현을 목적으로 삼을 때, 행복해질 수 없다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원리와도 일맥상통하게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실현을 목적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리 낙관적인 곳이 아니며, 행복의 실현을 매 순간 담보할 수도 없다. 때문에 행복의 실현을 목적으로 살아간다면, 행복 실현을 향한 이상과 현실의 좌절이라는 굴레 속에 갇혀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 실현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한 마디로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가? 그 답은 아이들의 문장 속에 존재한다. 바로, 용기, 우정, 사랑, 지식, 순수, 성실, 희망, 빛과 같은 미덕들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행복을 목적으로 삼으면 결코 행복에 다다를 수 없다. 행복은 이러한 미덕들을 추구하고 실천할 때, 부차적으로 얻게 되는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 역시 '인생의 목적을 행복에 두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행복을 목적으로 삼고 쫓아가면 역설적으로 행복은 더 멀리 달아나게 된다. 그것이 디지몬 시리즈에 행복의 문장이 없는 이유다. 결론적으로, 행복 실현을 위해 행복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것보다, 디지털 세계의 구원이라는 원대한 이상과 목적을 가지고 그에 상응하는 미덕들을 실천해 나간다면, 저절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디지몬 어드벤처의 선택받은 아이들처럼 말이다.
자기의 행복이 아닌 다른 것에, 즉 다른 사람의 행복, 인류의 발전, 그리고 심지어 어떤 예술이나 이상의 추구에 마음 붙들어 매는 사람들만이 행복하다. 그것도 이런 것들을 이상적인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으로써 바라볼 때만 그렇다. 그러니까 행복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목표로 삼아서 추구하는 과정에서 행복이 저절로 찾아온다는 말이다.
- 존 스튜어트 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