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 Jul 19. 2021

[서평]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 양생과 구도, 그리고 밥벌이로서의 글쓰기


   진짜가 나타났다.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은 글쓰기 입문서의 바이블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글쓰기 입문서를 읽었고, 다양한 글쓰기 강의를 들어봤지만, 이 책만큼 글쓰기의 본질을 명석판명하게 꿰뚫는 책과 강의는 없었다. 가히 레전드급 글쓰기 입문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글쓰기의 모든 것이 A부터 Z까지 총망라되어 있다. 단순히 스킬이나 비법을 나열한 책이 아니다. 무수한 사색과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글쓰기의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윤리론을 탄생시킨 걸작이다. 바로, 고미숙 작가의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이다.


   내가 삶에서 가장 큰 가치와 기조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독서와 글쓰기'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반지성적이고, 부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인 여러 현상들의 원인이 교육의 부재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할 하나의 수단으로써 독서와 글쓰기를 주장한다. 왜냐하면, 독서와 글쓰기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사색과 사유의 깊이를 더해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며,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은 나와 너무나 닮았다. 독서와 글쓰기를 추구하는 저자의 철학이 나의 철학과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프롤로그를 읽자마자 동지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 샘솟았고, 무한 공감과 무한 긍정을 뿜어내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어찌나 공감이 가는 문장이 많았는지 밑줄 친 게 너무 많아서 핵심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글로벌(글로 밥 벌어먹는다는 뜻)'이라는 기조가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우리의 인생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저자의 삶이 그랬다고 내 삶도 그럴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적어도 읽고 쓰는 행위가 인간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논지는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읽고 쓰는 행위야말로 인간의 근원적 본성이기 때문이다.



ㅣ글쓰기는 양생술이다


   저자는 '글쓰기는 양생술'이라고 주장한다. *양생술이란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기술을 말한다. 아니 양생술의 수단이 운동도 아니고, 건강식도 아니고, 의술도 아니고, 글쓰기라니. 참으로 심오하다. 그렇다면  글쓰기인가? 그것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다. 저자는 '사람은  쓰는가?', '쓴다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본성과 쓰기의 관계는 무엇인가?' 같은 글쓰기의 존재론을 구축하여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축적해온 글쓰기와 삶의 관계를 펼친다.


   먼저, 저자는 묻는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는 것이다. , 삶은  앎이다.  그런가? 인간은 직립하고 걷는 존재다. 스스로  발로 서고(자립) 걸으면서(운동) 생각을 하고 증식시키는 존재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각과 걸음의 동시성으로부터 탄생했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는 앎을 향한다. 앎이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살기 위해선 알아야 한다.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다름 아닌 무지다. 세계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길을 잃고 헤맨다. 또한, 마음의 구조를 알지 못하면  충동과 망상에 휘둘린다. 어느 쪽이건 무지는 단절과 적대를 낳는다. 외로움과 괴로움에 시달린다. 그러므로 생을  보존하려면 알아야 한다.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p40)


   그렇다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사(人事). , 천지인(天地人) 알아야 한다. 천문과 지리,  사이에서 인사가 결정된다. 따라서, 어디에 있든 가장 먼저 해야  일은 존재의 GPS , 자기가  있는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인생이란  위에서  찾기다. 그리고  길을 찾기 위한 지도가 바로 앎이다. 앎과 함께 인간의 길이 시작된다. 이것이 안다는 것의 본질이다.


   그런데 천지인은 어떻게   있는가? 책을 통해   있다. 천지인의 모든 것은 책에 있다. 따라서 앎은  읽기다. 그러나  앎이 생명의 활동이 되려면 써야 한다. , 천지의 운행을 주시하는 것이 읽기라면,  사이에서 삶의 비전을 여는 것이  쓰기다. 읽기와 쓰기는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산다는 것은 천지인의 삼중주를 아는 것이고,  앎의 구체적인 행위는 읽기와 쓰기인 것이다. (p46) 고로, 안다는  쓴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글쓰기의 존재론이다. 읽기와 쓰기는 신체를 움직이고 정신 영역의 활동을 극대화시킨다.  행위를 통해 인간은 노동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고 감정의 찌꺼기를 배설한다. 또한, 혼돈 속에 빠진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길을 잃지 않게 한다. 게다가 저자는 글쓰기를 통해 밥벌이까지 하고 있으니 글쓰기야말로 진정한 양생술이라고 극찬을 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나처럼 제도권에서 추방당한 이들의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근원적 실천이라는 것을. 인식을 바꾸고 사유를 전환하는 활동을 매일, 매 순간 수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써야 한다. 쓰기를 향해 방향을 돌리면 그때 비로소 구경꾼이 아닌 생산자가 된다. 들으면 전하고, 말하면 듣고, 읽으면 쓴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온전히 구비되어야 할 활동들이다. 신체는 그 모든 것을 원한다! 어느 하나에만 머무르면 기혈이 막혀 버린다. 막히면 아프다. 몸도 마음도. 통즉불통(통하면 아프지 않다/아프면 통하지 않는다) - 글쓰기가 양생술이 되는 이치다. (p109)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이처럼 저자는 읽기와 쓰기는 양생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며, 인간의 본성이자 삶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읽기를 거룩한 것이라고 부르고, 쓰기를 통쾌한 것이라고 부른다. 읽기를 통해 자연의 섭리와 문명의 역사 그리고 우주의 원리를 알아가는 학이시습의 기쁨을 누리고, 쓰기를 통해 무질서에 새로운 리듬을 부여하여 생산자와 구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미래에 더 유효한 가치가 있다는 것도 양생술의 수단으로 확언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미래 사회에는 지금보다 관계와 취향, 여가와 휴식, 성찰과 지혜 등이 삶의 전면에 나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노동 이외의 시간이 많이 남을 테고, 그 빈칸을 정신활동의 영역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자연히 존재의 무게중심도 이성이나 논리, 지성과 영성 같은 심오한 활동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고, 이 모든 것의 집약체인 글쓰기가 각광받게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놀라웠던 것은 매우 직관적으로 쓴 책 같았으나, 마치 카피라이터가 쓴 것마냥 풍부한 어휘력과 단어를 살아있게 만들어 춤을 추게 하는 재주가 돋보여 읽는 내내 감탄이 절로 나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저자의 전공인 동양철학은 물론이거니와 니체와 스피노자의 철학 그리고 주역, 불경, 열하일기, 동의보감 등 동서양을 아우르는 현란한 지식의 퍼포먼스를 지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고급스러움과 논리성 그리고 설득력까지 빼놓지 않았다. 저자의 내공이 얼마나 탄탄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자가 실제로 운영하고 있는 '감이당'이라는 공동체였다. 그렇다. 아무리 천지인의 삼중주를 알고, 글쓰기를 통해 밥벌이를 한다 할 지라도, 사람과의 연결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읽고 쓰기는 결국 공동체를 통해 완성된다. 따라서 산다는 것은 곧 읽고 쓸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고 영위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나의 비전이기도 하고 말이다.



[서평]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매거진의 이전글 [서평]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 / 한성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