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매력을 느낀다. 매력을 느끼는 요소는 사람마다 상대적이며 다양하다. 누군가는 외모나 옷차림에, 누군가는 말투나 목소리에, 누군가는 취향이나 성향에, 또 누군가는 특정한 행동이나 특별한 재능에 매력을 느낀다. (물론 이 외에도 언급할 수 있는 수많은 매력의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이 글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분석하려고 쓴 글은 아니므로 패스하겠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과도 연관이 있다. 그렇다. 바로, ‘지적미’다.
한 때, '뇌섹'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풀어쓰면 '뇌가 섹시하다'라는 말로 지적이거나 똑똑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사실 나는 이 말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데, '지적이다'라는 말은 품격이 있어 보이는 반면, '섹시하다'라는 말에는 반대의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두 단어의 조화가 어울리지 만은 않아 보인다) 아무튼, 이러한 단어가 유행을 타고 사회의 키워드로 자리를 잡아가는 현상을 보면서, 이제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해진만큼 물질적 풍요보다는 정신적 풍요를 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해지고 싶은 갈망, 지식 팽창에 대한 열망 그리고 앎을 통해 우월해지고 싶은 욕망은 시대의 요청과 맞물려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이자 이상향이었다. 때문에 이러한 이상향을 공유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매력을 느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지적 욕구는 나를 당기게 했고, 지적미는 나를 유혹했다. 심지어 나는 레크리에이션을 할 때도 몸을 쓰는 것보다 머리를 쓰는 게임들을 좋아했다. 그만큼 나는 지적인 활동을 누리는 게 좋았다.
그러나, 지적 활동을 누리기 위해서는 나 역시 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니, 나부터가 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바로 이러한 연유로부터 기인했다. 이 책은 나의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에 더할 나위 없는 책이었다. 그동안 내가 도외시했던 분야들에 대한 지식을 쉽게 흡수할 수 있었고,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과 가치관을 재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단, 제목 자체부터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지 않은가.
“주어진 환경과 개인의 경험이 다르다면 우리는 같은 말을 한다 해도 서로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위와 같은 문장을 던진다. 이 문장은 구조주의에 입각한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에서 도출해낸 문장인데, 대화를 하는 데 있어 언어는 무용지물 하다는 것이다. 대화를 하는데 필요한 것은 공통분모의 지식이며 그것이 곧 교양, 인문학이라고 얘기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에 대한 이해와 나에 대한 이해로부터 기인한다. 즉, 서로 공유되는 지식이 있을 때, 티키타카식의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 책은 그런 대화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총 다섯 파트로 구성되어 지식을 전달한다. 이 다섯 파트는 개별적 파트로 보이지만 사실 각각의 파트들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고,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독성이 좋고 쉽게 읽힌다. 그렇다고 만만히 봐서는 안 되지만.
첫 파트인 역사는 시대를 5단계(원시 공산사회 - 고대 노예제 사회 - 중세 봉건제 사회 - 근대 자본주의 - 현대)로 구분하며 막을 연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생산수단’이다. 어쩌면 이 개념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책의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생산수단의 소유는 권력의 획득, 즉 부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곧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생산수단은 고대에는 토지, 중세에는 장원, 근대에는 공장과 자본으로 발전해갔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자본주의의 특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자본주의의 특성은 공급과잉이다. 넘치는 공급량을 해소하기 위해선 상품의 가격을 내리거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공급과잉은 식민지를 개척하는 제국주의 시대를 요청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은 공급과잉의 문제는 결국 세계대전, 경제대공황, 냉전시대를 발발시켰고, 이후 자본주의가 독주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즉, 역사를 움직이는 핵심 개념은 다름 아닌 생산수단과 공급과잉이라는 경제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경제를 두 번째 파트로 책정한 이유다.
경제 파트에서는 4가지의 경제체제를 구분한다. 초기 자본주의, 후기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공산주의다. 4가지의 경제체제를 구분하는 기준은 단순하다. '정부의 시장 개입 정도'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면 세금은 늘어난다. 세금이 늘어나면 안정된 재정을 바탕으로 복지가 증가한다. 반대로 정부가 시장에 자유를 허락하면 세금은 줄어든다. 세금이 줄어들면 재정은 축소되고 복지 역시 축소된다. 즉, 세금과 복지는 비례한다. 세금과 복지의 확대와 축소는 시장의 침체와 활성화를 가져오며, 사회의 내부적 갈등과 사회적 안정에 영향을 미친다. 앞서 말한 4가지 경제체제는 정부의 시장 개입 정도로 결정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장의 자유를 허락하는 경제체제는 초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써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정부의 개입을 요구하는 경제체제는 후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써 분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경제체제를 선택하는 것에 답이란 없다. 각 나라마다 어떠한 가치를 중요시하고, 시기가 어떠한지에 따라 정할 몫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논의가 바로 정치이다.
정치는 경제체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다. 따라서, 정치에서의 보수와 진보 개념은 경제체제로부터 도출되는 개념이다.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입장을 보수라고 하며, 정부의 개입을 주장하는 입장을 진보라고 한다. 그리고 보수와 진보는 각각 자본가와 노동자를 대표하며 이것은 계급 간의 이익 대결 구도로 나아간다. 자본가는 자신의 부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시장의 자유를 원하며 안정된 세계를 지향한다. 반대로 노동자는 부를 쌓아야 하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을 통한 복지 증가를 원하며 변화하는 세계를 지향한다. 이렇듯, 정치는 경제체제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완벽한 경제체제가 없는 한 완벽한 정치체제도 없다. 보수와 진보가 늘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익을 모두 우선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자본가들은 소수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다수다. 소수가 다수를 이기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대체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 이유는 한국의 역사적 경험(공산, 사회주의 체제와 적대적 관계 형성)과 미디어 및 교육의 영향(미디어의 생존 방식, 기득권의 세계관을 교육에 반영)으로 비롯되며, 이로 인해 대중들은 보수성향에 쉽게 노출된다. 그래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소수의 자본가의 편을 드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따라서, 그런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주체적인 삶의 힘을 길러야 한다. (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자신이 자본가든 노동자든 그냥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는 정치 진영의 편을 상황에 맞게 들면 된다고 생각한다. 박쥐 같다고 해도 어쩌면 그게 합리적인 것이니까.)
사회는 개인의 권리와 사회의 이익 대결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대결이다. 개인주의는 말 그대로 사회보다 개인을 우선하는 입장이고, 집단주의는 개인보다 사회를 우선하는 입장이다. 중요한 것은 입장의 차이는 있어도, 옳고 그름은 없다는 점이다. 어느 입장을 지지하는 건 어디까지나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극단화되면 이기주의와 전체주의로 변질된다. 특히, 전체주의는 역사 속에서 어떤 비극을 낳았는지 가시적으로 증명되었기에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위험성을 방지하고자 재산, 생명,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자연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나친 자연권 보호는 다수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하려는 전체주의적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재밌는 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치 파트에서도 봤듯이, 대중들은 보수성향을 띄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조금 다른 양상인 것 같지만)
윤리는 앞선 4개의 파트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다. 그래서 윤리는 정의하기가 애매한 유동적 개념인데, 사람이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윤리적 판단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윤리를 의무론과 목적론으로 나누어서 판단을 한다. 의무론은 의무나 도덕 법칙을 준수하는 이론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마땅히 해야 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을 준수한다. 종교인을 예로 들 수 있으며,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이 있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에크가 의무론을 대변하고 있다. 반면에, 목적론은 결과적으로 이득이 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가 있으며, 최근에는 원초적 입장을 내세운 롤즈가 목적론을 대변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대부분 목적론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이 책은 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쉽고 간소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틀을 제공해준다. 물론 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편협적인 시각을 길러줄 위험이 다소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데는 아주 유용한 틀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도 이 책을 통해 기존의 나의 경험과 지식에 덧붙여 세계를 바라보는 기준들이 재정립되었다. 세상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가지고 싶다면, 접해보지 않았던 분야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의견을 내보고 싶다면 이 책을 통해 관련 지식을 습득하면 될 것 같다.
사실, 나는 이 책을 4년 전에 한번 읽었었다. 즉, 재독을 한 셈인데, 재독을 하게 된 이유는 이 책의 속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편'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2편은 1편과 동시에 출간되었다) 그래서 0편을 읽기 전에 복습 차원에서 1편을 다시 읽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에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내 시야와 현재에 이 책을 읽고 나서의 내 시야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과거보다 현재의 나는 현실 속 각양각색의 이슈들의 물줄기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바라보는 눈이 길러진 것 같다. 그렇게 세상을 더 탐구하며, 세상을 더 공부하며, 세상을 더 연구하는 지성인으로 성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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