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응원이 되는 책 속 징검다리
다르다는 것 괜찮다는 것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제목만으로 성찰을 가져다주는 류시화 님의 이 책(더숲 출판사, 2019년 출간)은 나에게 비슷한 듯 다른 질문하나를 던져 주었다.
'옳은지 그른지 누가 아는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 그 말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나의 내면과 외부에 있는 세상의 모든 일을 마주 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고 분별하되 판단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나의 삶은 그러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나는 비교하고 판단해 왔다. 결핍을 인정하지 못했고, 부러움을 시기와 질투로 억압하여 열등감에 시달리면서도 짐짓 괜찮은 척해왔다. 존재하지 않는 완벽함을 추구했으며 스스로에게 가혹했고 타인에게 인색했다. 인내심이 많다고 호기롭게 여겼던 것은 단지 거드름에 지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한계를 거치고 나서 나는 그 과정들이 내가 스스로 만든 감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야기한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지만 진정 듣는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는 알고 있을까? '경청'이란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지 않을까.
황희정승님의 일화 중 하녀들의 다툼 일화에서 '당신의 말도 옳소'라는 마지막 말은 고슴도치처럼 뻗어져 나가는 미세한 신경의 조각들을 하나씩 거두어들이고 내 안의 뾰족함을 바라보고 그것의 무익함을 수용하게 하는 힘이 있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기에 우리는 다름 속에서 괜찮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르기 때문에 괜찮다. 다르다는 이름으로 특별해지고 다르다는 이름으로 괜찮아진다.
평범함의 미학이건 안정성을 위함이건 타인과 똑같아지고 싶어 하는 생존본능은 때로 똑같음을 넘어서 조금이라도 앞서나가려 하는 승부욕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그 둘은 서로 얽히고설켜서 그 근간이 안정성이건 투쟁심이건 상관없이 서로에 대한 몰인정을 낳는다.
착한 아이콤플렉스는 누구에게나 있는 걸까?
착하다는 것과 무관하게 착한 아이콤플렉스는 존재한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착함인가? 착하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단지 외부의 시선만을 의식하고 내면의 나를 이해하지 않은 채 짐짓 괜찮은 척 연기하는 것은 때로 착함으로 명명된다. 연기인지 아닌지 진정 괜찮은지 괜찮치 않은지 과연 누가 알겠는가. 그것은 오직 본인만이 알 수 있다.
이유를 막론하고 내 안의 뾰족한 가시 돋친 말이 내면으로만 향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를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결코 유익하지 않다.
"극단적인 이타주의는 이기주의보다 더 나을 것도 없다."는 월러스 워틀스(부자가 되는 과학적 방법, 이담북스, 2019)의 말은 유효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천하려면 내가 먼저 바로 서야 하고 내가 충분히 강해야 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가 와닿는 요즘이다. 아이들에게 1층 2층 없이 어떻게 3층 이상의 튼튼한 건물을 짓겠느냐고 으름장을 놓곤 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천 못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닌지 말하고 있는 순간 깨닫는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아이에게 하라고 할 수 없기에 스스로 성장을 위해 나만의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각기 다른 개성과 성향으로 우리의 길은 다르겠지만 그 길의 보편성에 있어 작은 도움이 될 테니까.
백만 번의 실패가 백만 번의 교훈이 되듯
실패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다는 것은 괜찮다는 것.
결국 시간이 지나 알게 된다.
미워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남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