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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율 Jan 17. 2021

정신과 진단명 없이 마음 아프기

2021년의 계획은 소박하다. 꾀병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제거하기.

지난 늦봄부터 이른 겨울까지, 나는 일도 관두고 내게 무슨 정신병이 있는지 찾아내는 일에 집착했다. 무척 의욕적이고 하나도 우울하지 않은 겨울과 봄을 지낸 뒤 다시 우울감에 휩싸였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대중적인(?) 의심인 만성 우울증, 계절성 우울증, 월경전불쾌장애, ADHD에서 시작해서 경계선성격장애, 회피성성격장애, 강박성성격장애, 불안장애, 신체이형장애, 양극성정동장애 2형, PTSD, 자폐스펙트럼장애까지 내게 해당하는 점이 있는지 하나하나 뜯어봤다. 밥 먹고 잘 때만 빼고는 정신과 진단기준이나 치료 약물의 기전, 병을 가진 다른 사람들의 경험담을 섭렵했다. 나는 저 모든 병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했는데, 사실 아무 병도 앓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안 아프다기에는 너무 힘들게 살지만, 아프다기엔 너무 잘 살았다. 이 정도 우울감이나 에너지 기복은 누구나 달고 살 것 같고, 주변의 ADHD 인들과 비교하면 전혀 티가 나지 않는 편에, 성격장애가 있다기엔 사회생활도 무난히 하는 듯 보인다. 자살 사고야 시도 때도 없지만 실제로 죽으려 하지 않는다. 불안발작이나 공황발작도 경험해 보지 않은 것 같고, 나의 자폐 비슷한 특성으로 주변에 피해를 끼친 적도 (일정 연령 이후로는) 거의 없다. 약간씩 미숙하고, 약간씩 이상하고, 약간씩 모자란 행동을 하기는 하는데 그게 인간의 개별성 수준을 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 꾀병을 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꾀병이다.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스물여섯에는 창밖으로 소복소복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절망감에 휩싸여 주체할 수 없이 울면서 '내가 진짜 아팠으면 좋겠다. 이렇게 슬픈 게 정상이라니 죽는 게 낫겠어.' 하고 통곡했다. 스물한 살 청춘이 부럽다던 어른들의 조언을 잔뜩 듣고 들어와서 일주일 넘게 샤워도 하지 않은 채로 누워서 슬픈 생각만 하던 시절에도 그랬다. '나는 우울증도 아닌데 이렇게 누워만 있다니 한심해.' 정신과는 자살을 실행하기 직전이거나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거나 밥맛이 조금도 없는 사람만 가는 줄 알았다. 나는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가끔 친구도 만나고 재밌는 걸 보며 웃기도 했다.


작년 들어 정신병을 조사하면서야 나도 정신과에 가도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갔다. 내가 인생에서 겪었던 모든 우울감과 주요 이유를 말했다. 처방전에 찍힌 질병코드는 F33.9 상세불명의 재발성 우울장애와 F90.0 활동성 및 주의력 장애였다. 약을 받았다. 카페인을 들이붓지 않고는 할당된 일을 전부 해낼 수 없는 사회가 된 지 오래이듯, 이제 정신과 약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이겠지. 이런 사회에서 생존하려면 중추신경자극제와 항우울제, 기분안정제 따위를 생필품으로 구비해 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처방전을 받았어도 '내게 재발성 우울장애와 ADHD가 있구나'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가 않았다.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 근거로 처방을 내린다. 내가 꾀병을 부렸다면, 당연히 처방이 나올 것이었다. 그러니까 인생이 힘든 게 정상인데, 내가 너무 완벽주의자에 이상주의자인 것이 문제였다. 약은 효과가 있으니 계속 먹겠지만, 나는 바보 멍청이 의지박약인 걸로 결론을 내릴 참이었다.


그런데 정신질환 진단명과 진단기준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니 반복적인 패턴이 포착됐다. 주요우울장애 곁에는 '지속성우울장애'가 있고, 양극성장애 곁에는 '순환성기분장애'가 있고, 조현병 곁에는 '조현정동장애'와 '정신증을 동반하는 우울/조증 삽화'가 있었다. 자폐와 ADHD도 사람마다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스펙트럼 장애고, 경계선/회성/강박성 성격 장애의 곁에도 역시 딱 한 성격장애에 속하지 않는 '상세불명의 성격장애'가 있었다. 정신질환은 인간의 정신활동의 한 측면이 과대화 되거나 과소화 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누구나 슬플 때가 있고, 기쁠 때가 있고, 근거 없는 망상을 할 때가 있고, 주의력이 없을 때가 있고, 관심을 못 받으면 불안해지기도 하고, 남들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정신과적 증상과 일반적인 정신 활동 간에는 연결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정신 상태가 병이 되는 건 '지속적으로 기능상의 저하를 야기할 때'이다.


정신병 진단 기준은 사람을 본질적으로 다른 두 그룹으로 분류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누가 더 진정성 있게 아픈가 겨루기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정신적 활동이 그가 견딜 수 있는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상황을 발견하고, 원인을 파악해서 제대로 도와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렇게 다양한 병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요우울장애를 진단하다 보면 그 기준에는 못 미치지만 명백히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거다. 그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새로운 진단명을 만든다. 개개인의 아픔에 인색하고, 건강한 욕구를 억하는 사회이니 계속 새 정신병을 제정해서 인구의 대다수를 정신병자의 범주에 넣는 어쩌면 필연적인 전개다.


게다가 내가 자폐스펙트럼에 속한다는 공식 문서를 얻는다고 갑자기 나의 어설픈 말투와 행동이 괜찮아지지는 않는다. 약간 이상한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가 많이 이상한 사람을 존중할리가 없다. 공식적인 의료 기록에 의하면 나는 '상세불명의 재발성 우울증'을 앓고 있다. 이 기록이 생긴 뒤로 슬퍼할 자격이나 기능이 저하되어도 괜찮다는 배려를 더 얻은 것 같지는 않다. 내게는 슬퍼할 권리가 언제나 있었고, 슬퍼하며 누워있을 여유는 언제나 없었다. 죽어가는 사람과 시끄러운 마찰을 빚는 사람에게만 못내 휴식과 치유의 시간을 내어주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임에도 나에게 휴식과 치유를 허락하지 않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선 사람은 나였다.


사실 누군가 내 힘듦을 공식화하는 절차를 밟지 않아도 나는 힘들 수 있다. 힘든 사람은 쉬어도 되고, 치료받으면 더더 좋다. 내 지친 몸과 마음을 돌보기 위해서 어떤 요건을 충족할 필요는 없다. 진단명은 아프기 위한 자격증이 아니니까. 너의 아픔이 병으로 지정되지 않았으니 의지력으로 이겨내야만 한다고 몰아붙이는 건 심술이다. 살면서 고통을 겪고 그걸 이겨내는 일은 자연스럽지만, 현대 사회에는 자연스러운 게 별로 없다. 해가 뜨고 지는 주기를 인위적으로 24로 나눈 다음 매일 같은 시간에 맞춰 30km쯤 떨어진 곳까지 달려가서 아홉 시간씩 경쟁과 성과의 스트레스를 견디는 삶, 땅에서 석유를 뽑아서 썩지도 않는 쓰레기를 잔뜩 찍어내는 일, 개인들에게 감정과 인정을 억제하고 더 이기적이어지는 법을 가르치는 공동체는 정말 조금도 자연스럽지 않다.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소중한 이들과 나란히 햇살을 맞으며 산책할 시간 없이 사는 고통은 극도로 인위적이다. 그걸 자연스럽게 흡수해내지 못한다고 나를 바보 멍청이 의지박약이라고 몰아세우지 말았어야 했다.


비난에도 자비에도 인지능력이 든다. 그간 나는 일을 똑바로 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더욱더 엄격한 관리자가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더 자기비판을 잘하면 내가 정신을 차릴 줄 알았는데, 과도한 비판에 되려 나가떨어져 버렸다. 그래서 앞으로는 나를 용서하고 아끼는 데 내 모든 인지능력을 쏟아부을 생각이다. 너무 슬퍼서 집에 가서 쉬고 싶거나, 적재적소에 센스있는 대꾸를 할 수 없거나,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기가 너무 싫어서 제출하기를 포기해도 날 혼내지 않을 테다. 그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는 걸, 나와 같은 상황에서도 잘해내는 사람들 얼마나 많든지 는 그러지 못한다는 걸 인정하기로 다짐했다. 다음엔 나를 더 응원해야지. 내가, 힘들어, 싫어, 하고 호소할 때 '닥쳐' 같은 모진 말을 이제 하지 않아야지.


과도한 낙관과 의욕으로 가득 찼던 지난해, 나는 새해 다짐으로 온갖 걸 적었다.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성취할 거라고 썼다. 돌아보니 그중에 딱 하나, 블로그를 시작하겠다는 목표만을 이뤘다. 사실 글쓰기는 5년 연속 실패에 빛나는 다짐이었다. 지난해에 마침내 글이 써진 이유는 휴식할 시간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전부 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를 채찍질하지 않았다. 일을 하면 당연히 쉬어야지, 집중이 안 되면 약을 먹어야지, 하고 나를 부둥부둥 돌봐 주자 마침내 글이 써졌다. 2021년의 계획은 소박하다. 꾀병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제거하기. 휴식이 필요할 때 쉬고, 이런저런 검사와 치료를 받기. 이 병도 저 병도 아니에요, 라는 말을 들어도 괜찮다. 진단명을 받지 않고도 내가 아플 땐 마음껏 아프고 힘겨워할 거니까.




생각이 많아서 인생 살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렇다면 글이라도 많이 쓰려고요. 누구나 생각에 시간을 쏟아 붓지는 않기 때문에, 저의 결과물들이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깨달음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을 흥미롭게 보셨다면 구독하고 종종 읽어 주세요.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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