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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율 May 05. 2021

서른 살의 웩슬러 지능 검사와 ADHD진단

얼마 전, 종합심리검사(풀배터리)의 일부로 웩슬러 성인 지능 검사를 받았다.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간 설레는 마음으로 '혹시 아이큐가 120 같이 나와도 자만하지 말아야지. 이건 전체 지능의 극히 일부를 검사하는 거잖아. 하핫.' 생각했다. 난 평상시 재빠른 이해력과 꼼꼼한 논리적 추론 능력을 생존 전략으로 삼아 왔으니까. 대망의 결과는! 보통이었다. 무난하고 흔한 보통. 이토록 보편적일 수 있을까 싶은 보통. 덧붙여 검사 보고서의 결론은 성인 ADHD였다. 볼드체로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이 탕탕 박혀있었다. 나는 집에서 신나게 도넛 파티를 열었다(=아껴 둔 도넛을 많이 먹었다). 감정이 풍부한 내 반려인은 기쁨의 눈물을 훔쳤다.


파티를 연 이유 = 진단까지의 여정을 마쳤으니까!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즉 다양성을 딱히 고려하지 않는 교육을 받고, 시험을 치르고, 이런 일과 저런 일을 해 보는 동안 그 누구도 내게 ADHD 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20대 중반까지는 정신에 관련한 질환이 단 하나도 없는 줄 알았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인데 진짜 하기 싫은 게 병일 것까진 없었다. 그냥 내가 게으르고 쓰레기고 의지가 부족하고 어쩌고 저쩌고, ctrl+c, ctrl+v 였다.


20대 중반에 How to ADHD 채널을 발견했다. 내 남동생의 ADHD를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ADHD를 오해한 밤 가족에게 생긴 일). 성인 여성 ADHD인 채널 운영자 제시카는 여자 아이들이 어째서 과소진단 될 수 있는지 말했다. 나도 조용한 ADHD 뭐 그런 거 아닐까 의심됐다. 대학 내 상담센터에 자문을 요청했다. "제가 ADHD가 있을까 고민이 되는데, 검사를 받을 수 있을까요? 어딜 가면 될까요?" 센터장인지 수퍼바이저인지 아무튼 자기가 굉장히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강조하던 중년 상담사가 답했다. "ADHD 없어요.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습관이 있다고 해서 ADHD 아니에요. 약물 치료를 받다가 더 망가진 사람만 수두룩하게 내가 치료했어요." 지금보다 용기가 없고, 거절에 민감하고, 내 생각에 확신이 없고, 정보가 부족하고, 더 명백히 우울하던 나는 그날 이후로 정신건강 전문가는 내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내치는 사람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래- 이 정도가 ADHD일리 없지


ADHD인들에게 도움되는 팁들을 인생에 적용했다. 포모도로 타이머, 각종 투두리스트 앱, 명상, 등 여기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도움이 됐다. 그래, 나는 ADHD 비슷한 증상을 갖고 있는 사람인가 보다. 그 증상의 원인은 ADHD가 아니고 뭔가 다른 이유인가 보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고칠 수 없겠지 뭐. 하하하. 왜 살지? '기승전-왜살지' 생각을 수시로 했다.


그로부터 4년이 흘러 나는 반복적인 우울감을  토로하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만났다. 우울이 자꾸 재발해요. 선생님은 항우울제를 1달 정도 주더니 어느 날 ADHD 약을 먹어 보지 않겠냐고 했다. 그래서 먹었다. 여태까지 먹고 있다. 그렇다. 나는 풀배터리 검사를 받기 전부터 이미 반년 넘게 F900 코드가 찍힌 ADHD 처방을 받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약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준다는데, 난 ADHD가 아닌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기분이냐면, 그냥 그 전과 마찬가지로 내가 쓰레기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ADHD 관련 글을 블로그에 쓰면서도 나를 '당사자'라고 소개할까 말까 21374646번 망설였다.


사실 의사도 약간 확신이 없어보였다. "확진을 내리려면 추가적인 검사가 필요하긴 하지만, 저는 상당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같은 말을 하기도 했고, 내가 어떤 검사를 받으면 찐 성인 ADHD로 판명되냐고 물었을 때도 "의사 입장에서 확신이 설 정도로 전형적인 양상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히 CAT 테스트를 권해요. 율 씨 같은 경우엔 종합심리검사를 해 봐야 하는데, 그것도 성인 ADHD를 판별하는 완벽한 검사는 아니라서 결과가 애매하게 나올 수 있어요. 그렇다고 ADHD가 없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고, 있다고 확진 내릴 수도 없어서 더 혼란스러워지죠. 비용도 들고요." 라고 답했다. 고민에 빠졌다. 40만 원이면 마라탕이 몇 인분이야.


내가 검사 받는 건 사치겠지?
난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으니까


사실 진단과 검사를 몇 년씩이나 망설인 이유가 돈이 절대적으로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조금 일하고 많이 놀기를 좋아하는 내게도 50만원 남짓의 돈을 쓸 여유는 종종 있었다. 그 돈을 꼭 필요하지 않은 데 쓰기도 했다. 단지 나는 많이 안 아프니까 정신을 검사하는 데 그만한 돈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검사를 하고 나서 만약 <아무 병이 없습니다. 알아서 잘 사시면 됩니다. 영원히 안녕.> 같은 말을 들으면 얼마나 괴로울까 겁도 났고, 내가 괜히 긁어 부스럼 내서 꾀병을 정당화 하려는 걸까- 자기검열도 더해졌다. 치료 받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된 환자들이 그렇듯 치료 받아봤자 안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데다, 설령 성인 ADHD라고 해도 난 경증이니까 굳이 공식 진단이 필요없을 거라는 셀프 진단도 종종 내렸다. 그렇게 검사와 진단을 회피했다.


머리 아픈 고민 중에 지난 1월에 블로그에 대대적으로 공개한 새해 다짐이 기억났다(정신과 진단명 없이 마음 아프기).

2021년의 계획은 소박하다. 꾀병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제거하기. 휴식이 필요할 때 쉬고, 이런저런 검사와 치료를 받기. 이 병도 저 병도 아니에요, 라는 말을 들어도 괜찮다. 진단명을 받지 않고도 내가 아플 땐 마음껏 아프고 힘겨워할 거니까.

이 정도 돈을 내는 종합심리검사라면, ADHD가 없다는 결과가 나와도 정확히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났는지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맞든 아니든 어느 한쪽이라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과감히 일시불로 검사비를 긁었다.



웩슬러 성인 지능 검사 결과가 이렇게 ADHD처럼 나오다니

검사일에만 해도 결과지가 너무 평범해서 당혹스러울 거라고 굳게 믿었다. 웩슬러 지능 검사 할 때는 적당히 내 능력을 발휘했고, 실수는 딱 한 개가 있었고(엄청난 착각이었음이 곧 밝혀진다), 중간 수준의 난이도에서 더이상 모르겠다고 말한 것 같았다. 투사 검사, 문장완성검사, MMPI-2 자기보고식 검사에 답할 때도 '내가 인생에 이렇게까지 건강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나?' 싶은 느낌이 들었다. <예민성과 취약성이 관찰되지만, 임상적 수준의 문제는 발견되지 않음. 자신의 정신건강을 실제보다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음. 시각 전환을 요함> 정도의 결과를 예상했다.


결과를 받아보는 날,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모든 실마리를 연결한 탐정처럼 나를 앉혀 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자 봐요. 생각보다 지능이 낮게 나왔어요. 저는 율 씨가 평균 상에서 평균이상 정도의 지능일 걸로 예상했어요. 그런데 이 소검사 결과를 보세요. 검사 결과가 들쭉날쭉 하죠? 토막 맞추기는 잘했으면서 행렬 추론은 왜 이렇게 점수가 낮은 걸까요. 이러면 지능이 높게 나올 수가 없어요. 답변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검사자에게 질문을 여러 번 되물었대요. 난이도와 무관하게 틀린 답을 하고, 검사 중 부주의한 실수를 반복했대요. 게다가 작업기억 영역이 유난히 낮아요. 율 씨, 진짜 ADHD가 있었네요."


실제 결과보고서의 그래프는 비즈니스적인 색깔로 칠해져 있다

웩슬러 성인 지능 검사 보고서에는 지능이 네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각각 언어이해, 지각추론, 작업기억, 처리속도. 전형적인 ADHD 프로파일은 작업기억과 처리속도 점수가 낮다고 한다. 각 항목에 해당하는 소검사는 내가 위에 그려 둔 그래프와 같지 않을까 추정한다. 모든 소검사 통틀어 압도적으로 제일 잘한 게 토막인데, 같은 영역을 테스트하는 행렬추론을 참 못했다. 비일관적 수행과 난이도와 관계없는 오답 등을 통틀어 보건대, 인지적 효율성이 저하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성인 ADHD와 더불어 우울 삽화를 겪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내가 비교적 잘한 소검사 [토막 디자인], [동형 찾기], [기호 코딩]은 눈으로 지금 내가 제대로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과제였다. 내가 잘 못한 [행렬추론]과 [도형퍼즐], [숫자]는 머릿속에서 요소들을 이리저리 다뤄야 하는 과제였다.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숫자] 소검사가 특히 그랬다. 귀로 들은 숫자들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상상력을 사용해서 재배열해야 했다. 나는 손이 두 개밖에 없는데, 다섯 살짜리 어린이 7명과 놀이공원에 간 기분이었다. 자꾸 어디로 애들이 없어졌다. 집행기능과 더불어 ADHD인의 2대 고난 요소인 작업기억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종합심리검사의 나머지 검사들에서는 성인 ADHD보다는 기분장애 및 미성숙한 감정 대처 방식에 관해 결과가 나왔다. 그 중 많은 ADHD의 특성인 충동성이 발견됐다. 나는 스스로 신중하고, 겁이 많은데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감정 표현이 절제된 편이라 충동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ADHD 자가진단 문진표에서도 항상 충동성에 관련한 문항에는 <아니오!>라고 답했다. 그러나 검사 결과에 따르면 감정적으로 충동적이고, 외부 자극이 주어졌을 때 신중하게 넓게 보지 않고 몇 가지 요소만을 관찰한 뒤 충동적으로 판단을 내린다고 한다. 임상심리사가 그런 결론을 내는 데 사용한 근거가 너무 여러 개라 수긍했다.



나는 성인 ADHD다! 신난다!


결과를 받고 며칠동안은 내가 과장된 답을 했을 가능성 등을 계속 검토해 봤다. 그런데 아무리 뜯어봐도 웩슬러 성인 지능 검사 결과가 너무 ADHD처럼 나와서 더이상 의심할 수 없었다. 이제 내가 꾀병 부리는 것 아닐까, ADHD도 아닌데 왜 집중을 못 하고 자빠졌을까, 하는 고민은 안 해도 된다. 안 아픈 것 치고는 인생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던 참에 해답이 등장해 줬다. 내 뇌가 비전형적이라 힘들었던 거다! 그리고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유전이다. 인간의 다양성일 뿐이다. 마음이 가볍다. 검사 없이 자책을 멈출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난 그렇게 성숙하지 못한가 보다. 아쉽게도 외적으로는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 어차피 ADHD 팁들을 사용한지 5년도 넘었고, 약도 이미 먹고 있었으니까. 달라지는 거라면, 온라인에 글을 쓸 때 성인 ADHD 당사자라고 망설임 없이 밝힐 수 있게 됐다는 것 정도일까? 그럼, 이 특권을 지금 당장 써 봐야지.


저는 성인 ADHD 당사자이고, 서른이 넘어 확진을 받았습니다. 나는 주의력 때문에 인생살이가 너무 어려운데, 주변 사람이 <네가 ADHD일리 없어, 이 게으름뱅이야!> 라고 말하면 두 가지 팩트를 체크하세요. 그 사람은 정신건강 전문가인가? 그 사람이 납득할 만한 근거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가? 두 가지 질문에 모두 '예'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부디 무시하세요!




ADHD는 정신과적 질환 중에서도 예후가 좋은 편입니다. 유전적 요인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적당한 환경적 도움과 약물, 운동, 전략을 통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ADHD가 있는 사람에게 어떤 일은 더 어렵기도 하지만, 어떤 일은 훨씬 쉽기도 합니다. 낙인과 차별, 비난보다는 이해와 포용, 존중을 원합니다. ADHD를 가진 어린이와 성인들이 사회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세요.

생각이 많아서 인생 살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렇다면 글이라도 많이 쓰려고요. 누구나 생각에 시간을 쏟아 붓지는 않기 때문에, 저의 결과물들이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깨달음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을 흥미롭게 보셨다면 구독하고 종종 읽어 주세요.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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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oey Nicotr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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