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조령산 정상에 도착하자 끝내주는 풍경이 펼쳐졌다. 초록나무와 기암이 적절히 섞인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촤라락 펼쳐진 것이다! 아름다운 바위가 섞인 봉우리를 보면 정신을 못 차리겠다. 너무 아름답다. 하지만 저 아름다운 봉우리를 지나 가려면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아름다움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지금 걷고있는 백두대간의 조령산-신선암봉-깃대봉-마패봉으로 흐르는 능선 동쪽으로, 고도가 낮은 산 아래에는 자동차가 지날 수 있는 지방도가 나란히 흐르고 있다.
'조령산'의 봉우리 동쪽으로 위치한 지방도에는 '조령 제1관문' 이 있고, '신선암봉' 동쪽으로는 '조령 제2관문'이 위치하며, 백두대간 등로와 나란히 흐르던 임도는 '조령' 이라는 곳에서 하나로 합쳐지는데 그 곳에 '조령 제3관문'이 위치한다.
'조령'의 다른 이름은 '문경새재' 이고 고도가 높은 곳의 고갯마루라서 날아가는 새도 넘기 힘든 곳이라 하여 '조령'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조령' 은 '새 조(鳥)' 에 '고개 령(嶺)'을 쓴 한자말이고, '새재'는 조령을 뜻 그대로 풀어 쓴 우리말이다.
이곳은 한양과 영남을 잇는 고갯마루로 예부터 교통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군사요충지였다고 한다. '영남지방' 이라는 이름도 '조령의 남쪽' 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선비들은 모두 이 곳 문경새재로 넘어가곤 했다.
이 곳은 한양에서 내려오는 좋은 소식이 제일 먼저 닿는 곳이라 하여 '문경' 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들을 문(聞)' 에 '경사 경(慶)' 자를 써서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 는 뜻이기 때문에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선비들이 가장 선호하는 고갯마루였다. 심지어 호남지방의 선비들도 먼 길을 돌아 이 곳 문경새재를 넘어 과거시험을 보러 갈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문경새재에 있는 3개의 관문 양쪽으로는 성벽이 세워져 있는데 이 것은 조선 숙종 34년(1708)에 완성된 것으로, 1592년의 임진왜란에서 육로로 올라오는 왜군을 막지 못했던 것이 이곳 문경새재에서 패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이 곳에 성벽을 쌓아 3개의 관문을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문경새재는 이 일대가 전부 도립공원으로 지정 될 정도로 역사적 가치도 높고 자연경관도 빼어나다. 백두대간 등산로만 쭉 따라가도 문경새재의 '조령 제3관문'을 지날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어릴 때부터 경주와 더불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문경새재였는데 한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 배낭을 메고 문경새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돌아보고 싶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해서 기분이 울적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곳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조령산 정상을 지나자 바로 암릉에 로프구간이 나타났다. 내리막은 굳이 로프를 잡지 않아도 이동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내리막 이후 이어지는 오르막 암릉구간은 로프 없이는 절대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대야산처럼 90도 직벽이 아니었고 나의 배낭은 그 때의 반도 안되는 무게라 무척이나 수월하게 오를 수 있었다.
대야산과 촛대봉처럼 절리가 형성된 뾰족바위가 아닌 반석처럼 넓고 평평한 바위를 오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발에 착착 감기는 바위가 느껴졌고 로프를 잡고 오르는 어깨의 힘이 느껴진다.
그래!
이 느낌이지!
배낭이 가벼우니 비실비실한 몸으로도 바위를 타는 것이 즐겁다. 이 둥글고 아름다운 바위를 나의 두 발로 직접 오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 곳에 로프가 없었다면 이 아름다운 곳을 오를 수 없고, 이 곳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면 산을 타는 즐거움이 뚝 떨어졌을 것이다.
누군가 신선암봉 앞뒤로 설치된 로프를 세어보았는데 그 수가 50개 정도 된다고 했었다. 하지만 굳이 로프를 잡지 않아도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곳이 많았기에 힘든지도 모르겠다.
백두대간 선답자들 중에는 이 곳이 대야산만큼이나 힘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그닥 힘들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가벼운 배낭 덕분이었을 것이다. 만약 박배낭을 메고 이 곳을 올랐다면 나는 또 다시 눈물을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신선암봉으로 향하는 바위구간에서는 끝내주는 조망이 연신 펼쳐진다. 로프를 잡고 오르면서도 경치가 기가 막혀 자주 멈춰 서게 된다. 자주 멈추어도 될 만큼 둥근 바위들의 향연이라 그것 또한 감사하다.
하지만 오늘의 시야는 영 별루였다. 지난번 종주를 마무리했던 목요일에는 안개가 짙고 구름이 낮게 깔려 흐리더니, 일요일인 오늘은 대기가 뿌옇다.
앞으로 이어질 깃대봉과 마패봉의 기암이 눈 앞에 촤라락 펼쳐져 있는데, 꿈같이 펼쳐진 능선을 바라보니 이 곳 어딘가에서 비박을 하고 싶은 욕망이 간질간질 나를 괴롭힌다. 박배낭을 메고 올 걸 그랬나?
아니다.
그건 아니다.
배낭이 가벼워 웃으며 지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비박장비에 물까지 잔뜩 짊어지고 이 곳을 올랐다면 지금처럼 경치나 감상하며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비실대는 몸뚱이로 수월하게 오를 수 있는 것에 만족하자. 사람은 욕심이 과하면 못쓴다.
신선암봉 정상부를 지나자 너럭바위의 향연은 끝나고 각 있는 바위들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정도는 껌이다. 대야산과 촛대봉, 희양산 직벽처럼 칼바위는 아니니까. 칼각이 아닌 적당히 둥근면도 있는 각의 바위들이 즐비하게 이어진다. 지치지도 않고 이어진다.
바위를 정말 많이 지나오고 로프를 정말 많이 잡은 것 같은데도 여전히 '즐겁다, 재밌다, 할 만 하다' 고 생각되어지는 내가 신기하다. 배낭의 무게라는 것은 이토록 중요한 요인인 것이다.
처음부터 피앗재 산장 사장님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대야산부터 시작된 문경의 백두대간 코스는 모두 당일배낭으로 이동했어야 했다. 매일 산을 탈출하여 민박을 이용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저녁 어스름에 고라니 울음소리도 듣지 않았을 것이고, 대야산 촛대봉 구간에서 그토록 울음을 쏟아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귀신이 나온다는 배너미평전을 지나기 위해 급하게 걸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어른의 말씀을 새겨듣지 않은 죄로 나의 몸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너무나 가혹하고 혹독했다.
신선암봉을 지나고도 로프의 암릉구간은 1.5km나 이어졌다. 지치지 않고 이어지는 바위구간이 짜증날만도 한데 나는 기분이 좋았다. 이런 곳을 지나다보면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나를 괴롭히던 벌레같은 생각들은 모두 산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생각이 비워진 깨끗한 정신과 마음만이 산 정상을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로프를 하나 하나 지날수록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상쾌해졌다.
배낭만 작아도 이렇게나 행복하게 지날 수 있는 것을 왜 그토록 비박에 집착했던 것일까. 비박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는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그것을 놓아야 할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며, 그때는 미련없이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멈춰야 할 시기를 지나 다시 달릴 수 있게 되면, 잠시 멈추었던 시간까지 더해져 더욱 행복하고 기쁘게 좋아하는 일을 향해 마음껏 달릴 수 있으리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암릉구간도 끝이 나고 평평한 흙길이 나타났다. 드디어 평범한 등산로에 도착한 것이다. 완만한 내리막을 따라 내려가니 어느덧 '조령 제3관문' 이다.
우와아아아~!!!
성벽과 함께 한 '조령 제3관문' 의 웅장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나 멋진 성곽에 이렇게나 멋진 관문이 백두대간을 떡 받치고 있다. 멋지다! 너무나도 멋지다!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내 눈에도 이렇게나 멋진 곳이니 다른 사람들 눈에도 오죽 멋질까. 오후 5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일요일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3관문 앞으로 드넓은 잔디공원이 형성되어 있었고 곳곳에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 곳 식당에서 파는 산채전을 먹고 싶었지만 관광객들이 포진한 식당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공터를 한바퀴 휘 돌아보고 관문을 통과하여 서쪽으로 탈출한다.
이렇게 가볍게 둘러보고 떠나기엔 너무나 아까운 곳을 그냥 떠난다. 여기는 다시 꼭 와봐야지. 형제들과 사촌들과 친구들과 함께 와봐야지. 차를 타고 와서 문경새재 곳곳을 제대로 둘러봐야지. 이곳을 제대로 둘러보면 경주만큼 반할 것이 틀림 없다. 그리고 그때는 산채전도 꼭 먹어봐야지!
임도를 따라 15분쯤 내려와 민박이 가능하다는 식당을 찾았다.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자 사장님 한 분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사장님께 민박을 하려한다 말씀드리니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민박을 받지 않는다고 하신다.
당황한 내가 어쩔줄 몰라하자, 사장님은 임도를 따라 조금만 더 내려가 보라고 말씀하신다. 이 아래에 '조령산 자연휴양림' 이 있으니 그곳에서 숙박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아, 그렇지! 휴양림이 있었지!
지도에서도 봤다. 무려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자연휴양림이 여기 바로 아래에 있었다. 15분 더 내려오니 휴양림이 나타난다. 백두대간 등산로에서 휴양림까지 3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휴양림 안내동으로 가서 방을 안내 받았다.
식당에서 따뜻한 저녁을 먹고 싶었는데 휴양림에는 식당이 없었다. 아까 그 식당에서라도 저녁을 먹고 내려왔어야 했다. 민박이 안된다는 말에 당황하여 저녁식사는 생각지도 못하고 내려와버렸다. 그래서 오늘 저녁도 누룽지다. 숙박을 해도 누룽지 저녁이라니. 한숨이 나온다.
객실의 방문을 열어놓고 방충망만 닫은 채 밤을 맞이했다. 숲의 소리와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니 텐트에 누워있는 기분이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나의 심리상태는 꽤 안정적이었다. 로프에 의지해 바위를 지날 때 떨어져 나간 생각들이 오늘은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0구간
진행 구간 : 조령산(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의 경계)-신선암봉-조령 제3관문-조령산 자연휴양림 숙박(충북 괴산군)
진행 날짜 : 2012년 6월 10일 / 일요일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