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하늘 아래 첫 집, 내가 원하는 이상향의 집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밤 10시에 잠들어 아침 7시에 일어났다. 9시간 동안 푹 잤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수면시간이었고, 내가 원하는 질 좋은 수면이었다. 잠이 들기까지 힘들지도 않았고 꿈도 꾸지 않았다. 정말 달고 편하게 잘 잤다.




방문을 여니 싱그러운 새소리와 함께 아침의 시원한 공기가 밀려 들어온다. 아아! 좋다! 비박까진 아니어도 이런 휴양림에서 매일 잠들고 일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방문 앞으로 나무가 울창한 숲이 보이는 것이 정말로 상쾌하고 행복하다.




오늘의 일정은 매우 여유로웠다. 야영없이 민박만 이용하려니 민박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끊어가며 종주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딱 11km 만 걸으면 된다. 마패봉과 탄항산을 지나 하늘재까지만 가면 오늘의 일정이 끝난다. 그래서 오늘은 평소보다 한시간 가량 늦게 종주를 시작했다.




휴양림을 나와서 조령 3관문 쪽으로 향했다. 임도를 따라 걷다가 어제 잠시 들렀던 식당 앞을 지나는데, 어제 잠시 뵈었던 사장님이 가게 앞 마당을 쓸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렸더니 사장님이 나의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하신다.




"아유~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요. 어제 그 남자손님들이 먼저 와서 숙박을 물어봤는데, 여자 하나 없이 남자들만 있으니까 겁이 덜컥 나더라구. 그래서 오늘은 마을에 내려갈 일이 있어서 숙박 안된다고 했거든. 그 남자손님들 오기 전에 아가씨가 먼저 왔으면 우리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을건데. 아유, 정말 미안해요."




나는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고도 말씀 드렸다. 하지만 사장님은 미안함이 쉬이 풀리지 않으시는지 믹스커피를 타주시며 마시고 가라 하신다. 사장님과 마주앉아 믹스커피를 마셨다. 시작부터 당충전을 하니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조령 3관문 방향으로 걷다보니 바로 '마패봉'으로 바로 향하는 등산로가 있었다. 이 길은 어떤 길일지 궁금하여 조령 3관문을 거치지 않고 눈 앞의 등산로로 들어섰다. 끝없는 오르막이었지만 별로 힘들지는 않았다. 아침에 믹스커피도 마셨고 나의 배낭은 어제보다 조금 더 가벼워졌기에.




가도 가도 숲깊의 연속이다. 오르막 중간에는 별다른 조망지도 없다. 1시간 20분 만에 마패봉에 도착했다. '마패봉' 이라고도 하고 '마역봉' 이라고도 한단다. 어사 박문수가 마패와 갓을 걸어놓고 잠시 쉬었던 곳이라 해서 '마패봉' 이란다.




아무리 편히 쉬어도 그렇지, 마패는 암행어사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징표인데 그걸 몸에서 떼어 걸어 놓다니! 그것도 산적 도적이 기승을 부리던 조선시대에!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박문수 선생님도 참 보통사람은 아니다.




마패봉 정상에는 뜬금없이 '월악산 국립공원' 의 안내판이 있었다. 하늘재 이후로 월악산이 시작되는 것인줄 알았는데 벌써부터 월악산이란다. 속리산을 지나니 문경새재고, 문경새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월악산이다. 백두대간이 품은 스케일에 다시 한번 놀란다.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4년 6월 백두대간 ※





더욱 놀라운 것은 마패봉 정상에서 펼쳐보이는 경치였다. 안개가 끼어 시야가 별루임에도 불구하고 장쾌한 능선에 감탄이 터져 나온다. 산객들의 소원을 담은 돌탑에 나도 돌맹이 하나를 살포시 얹어놓고 대간을 이어간다.




완만한 숲길과 걷기 좋은 등산로가 이어진다. 시간이 여유로워 대간로에서 살짝 벗어난 '부봉' 에 올라보기로 한다. 부봉갈림길에서 부봉까지는 고작 500m 지만 암릉에 로프를 잡고 올라가는 구간이다. 암벽 타기 좋은 둥글고 예쁜 바위도 있지만, 발 디디기 불편한 90도 직벽도 있다. 고작 500m에 있을 건 다 있다.




하지만 역시나! 부봉에 오르길 잘했다. 부봉의 봉우리 자체가 둥글고 예쁜 너럭바위라 쉬어가기 일품인데 조망이 탁 트여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안개 낀 날씨가 야속할 뿐이다. 맑은 날이라면 끝내주는 경치였을 텐데. 부봉에 앉아 점심도 먹고 친구와 전화통화도 한다.




부봉에서 점심을 먹으며 40분쯤 쉬었는데, 나중에 든 생각은 이 곳에서 한시간 정도 더 놀다가 내려올 걸 그랬다는 것이었다. 하늘재까지 하루 종일 지나온 코스 중에 부봉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백두대간 정규코스보다 대간길에서 벗어난 부봉이 더 좋은 날이다. 부봉에서 일기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신선놀음 좀 실컷 하다 내려올 걸 그랬다.




다시 대간길로 돌아와 조금 걷다보니 주흘산 갈림길이 나온다. 좌측의 등산로를 타면 대간길이고 우측의 등산로를 타면 주흘산이란다. 주흘산은 이 곳 문경에서 조령산만큼 유명한 곳이다. '조령 제1관문' 의 정식 이름이 '주흘관' 인데, 이는 관문의 동쪽에 위치한 주흘산에서 따온 것이다.




서쪽의 조령산과 동쪽의 주흘산, 그 사이 고개에 위치한 것이 3개의 관문이다. 조령산과 주흘산은 둘 다 높이가 1000m 가 넘고 산세도 험하다. 그러니 이 두 곳 사이에 성벽을 쌓고 관문을 세운 것이다.




그 옛날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산세가 험한 이곳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등산로가 잘 되어있고 로프가 설치되어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주흘산으로 방향을 틀고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대간길을 이어간다.




산 속의 공원같은 평천재를 지나고 탄항산을 오른다. 평천재가 쉬었다 가기 딱 좋은 평평한 곳인데 여기서 탄항산까지도 힘들 것 하나없는 완만한 숲길이다. 거의 평지 같다.




탄항산 정산은 나무가 꽉 찬 곳이라 조망이 하나도 없지만 정상석을 지나 조금만 더 진행하면 너럭바위의 멋진 조망지가 나타난다. 하지만 여기의 전망보다 부봉에서의 전망이 더 좋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탄항산에서 하늘재까지는 계속 계속 내리막이다. 이제 겨우 2시 조금 지났는데 벌써 오늘의 종착지라니 뭔가 허전하다. 민박을 기점으로 끊어다니자니 이런 것이 불편하다. 더 걷고 싶어도 더 걸을 수 없다. 에너지가 충만해도 멈춰야 하고 기가 막힌 비박지가 있어도 눈물을 훔치며 지나가야 한다.




오후 3시.

하늘재에 도착했다.




헐! 벌써?

이렇게나 이른 시간에

종주를 멈춰야 한다구?




세 시간 정도 더 걷고싶은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체력도 좋고 기분도 좋은데 여기서 멈춰야 하다니. 아아... 오늘은 너무나 아까운 날이다. 으윽... 내 비박장비... 왜 하필 오늘같은 날 없는 거야! 이러니 배낭에 깔려 죽을 것 같아도 박배낭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비박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평평하고 넓은 잔디공원에 엄청 큰 '백두대간 하늘재' 표석이 서 있었다. 비박을 하라고 만들어 준 공원인가 싶을 정도로 유혹적인 곳이다. 그곳에서 대간꾼들에게 유명한 '하늘재 산장' 이 내려다보였는데 사람도 없고 문이 닫혀있다.




하늘재 산장은 평일엔 주인이 없고 주말에만 영업한다는 정보가 많았다. 그러니 월요일인 오늘도 주인은 도시로 출타중인 모양이다. 오늘은 임도를 따라 마을로 내려가서 민박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잔디공원에서 조금 쉬다가 임도로 내려섰다. 그런데 앗! 하늘재 산장의 문이 열려있고 그 안에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아저씨 두 분이 마당의 수돗가에서 뭔가를 하고 계셨다.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4년 6월 백두대간 ※





"안녕하세요~

혹시 오늘 산장 영업 하시나요?"




"네. 그럼요. 하지요.

어서 들어오세요."




"앗! 진짜요?

평일엔 영업 안한다는 말이 많더라구요."




"하하 맞아요.

원래는 어제 서울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일이 있어 하루 더 머무르는 거에요.

아가씨가 운이 좋네요."




좀 전에 위에서 봤을땐 문이 잠긴것처럼 보였다고 했더니, 두 분이 산으로 오디를 따러 갔다가 방금 내려왔다고 하신다. 야호~! 나는야 타이밍의 여왕!




일찍 산행을 마무리한 덕에 사장님께 막걸리도 얻어 마시고 산딸기도 얻어먹고, 저녁으로 라면도 얻어먹었다. 사장님은 막걸리값도 라면값도 받지 않으셨다.




하늘재 산장은 처음부터 산장이 아니었고 넓은 농장 귀퉁이의 밭을 위한 창고였는데, 백두대간이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많이 찾기 시작한 이후로 창고를 개조해 식당 겸 찾집으로 운영한다고 하셨다. 물론 숙박도 함께.




대간에 위치한 산장에서 쉬어갈 때마다 이렇게 사장님들께 '산장의 역사' 에 대해 듣는 얘기들이 좋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고 흥미진진한 역사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




웅장하고 울창한 높은 산 아래의 첫 집.

넓은 마당이 있고 마당 안에도 수령 깊은 나무가 있는 곳. 그 나무 아래 낮잠을 자도 좋을 넓은 평상과 수돗가도 있는. 산 바로 아래지만 임도와 연결되고 인근 마을과도 그리 멀지 않은 집. 내가 원하는 이상향의 집이 바로 이 곳 하늘재 산장이었다.




라면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며 사장님의 얘기를 듣는다. 사장님이 직전에 다녀갔다는 어느 대간꾼의 얘기를 하시는데, 왠지 그 사람이 내가 아는 캔맥주 아저씨 같았다. 지리산 서북능선의 정령치에서 함께 캔맥주를 마시고 이후로도 종종 마주쳤던 그 아저씨 말이다.




그 대간꾼의 인상착의가 이러저러하지 않았냐, 그 사람 배낭이 이러저러하게 생긴 검정야크 브랜드가 아니었냐, 여쭈니 맞다고 하신다.




"저랑 같은 날 백두대간 시작한 아저씨에요.

이후로도 몇번이나 대간에서 마주쳤거든요. ㅎㅎ

그 아저씨 얘기를 여기서 듣게 될지 몰랐네요."




"어?!! 그럼 아가씨가 그 아가씨에요?

아아~ 맞구나! 아가씨가 맞아!"




"네? 무슨...?"




사장님은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파하하 웃어가며 얘기를 꺼내셨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0구간

진행 구간 : 조령산 자연휴양림(충북 괴산군)-조령 제3관문-마패봉.마역봉-동암문-부봉-평천재-탄항산-하늘재-하늘재산장 숙박(경북 문경시)

진행 날짜 : 2012년 6월 11일 / 월요일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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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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