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내 별명은 백두대간 선녀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하하하~

그래, 그 총각들은 만났어요?

엄청 큰 박배낭을 메고 다니는 아가씨라고 했는데

작은 배낭을 메고 와서 내가 못 알아봤네."




하늘재 산장 사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총각이라니? 캔맥주 아저씨는 누가봐도 중년인데? 절대 총각으로 보일 비주얼은 아니었는데? 누굴 말씀하시는 거지?




"하하하~

아가씨가 백두대간 선녀라며?"




"네에?!!!"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아가씨가 엄청난 미인이라고 백두대간에 소문이 자자하대. 박배낭 멘 총각 두 명이 아가씨를 만나려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종주를 이어가고 있는데, 아가씨가 어찌나 빠른지 도무지 만날수가 없다고 하더라는 거야. 곧 만날 수 있을거라고 응원해 줬다고 하던데. 아직 못 만난 거야?"




도대체 어떤 총각들이길래 거북이보다 더 느린 나를 못 잡는다는 것인가. 젠장! 이것보다 더 느리게 걸었어야 했나? 혹시 어제 지나쳤는데 박배낭이 아닌 당일배낭이라 나를 못 알아본 건가?




백두대간 종주 내내 아저씨들은 많이 만났어도 미혼의 남성을 만난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 아니구나... 총각들을 떼로 만난적이 딱 한번 있기는 하다. 그들이 모두 스님의 신분이었기에 애당초 관심이 없었을 뿐. 그들도 엄연히 총각이긴 했지.




박배낭의 총각들이 나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만큼이나 나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것이 드라마와 현실의 극명한 차이였다. 그간 홀로 대간을 탄 것이 몇 날인데 어째서 여태까지 로맨스 한번 없다는 것인가!




이것이 드라마였다면 시청자들의 원성으로 진작에 조기종영 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총각들을 만날 수 있는 거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로맨스가 시작되는 거야? 삶의 희노애락이 모두 있는 백두대간에 딱 하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로맨스' 였다.




젠장!

비뚤어질테다...




하늘재 산장 사장님은 연신 '백두대간 최고 미인' '백두대간 선녀' 운운하며 그때마다 파하하 웃으셨다. 절대 비웃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단지 막걸리의 취기가 올라와서 그런 것일 것이다.




"실제로 보니 정말 미인이네~"




하는 말을 기대했지만 기대와 현실은 엄연히 다른 법. 사장님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 것인지 계속 웃기만 하셨다. 나 역시 재밌었다. 도시에서는 별 볼일 없는 인물도 대간길에서는 미인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내가 만약 선녀라면 이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나무꾼을 만나야 할텐데, 도대체 나의 나무꾼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장님이 주신 막걸리 덕분인지 이번에도 힘들지 않게 잠이 들었다. 종주구간이 너무나 수월했던데다 종주시간도 짧아서 잠을 잘 못 자리라 예상했는데 수월하게 잠이 드니 다음날 아침도 기분이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홀로 밥을 챙겨먹고 하늘재 사장님은 만나뵙지 못한채 오늘의 종주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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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종주코스가 매우 짧았던 것에 비해 오늘은 이동해야 할 거리가 매우 길었다. 어제는 고작 11km 였는데 오늘은 19.5km 를 걸어야 한다. 민박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끊어서 걸으려니 나의 페이스와 무관하게 적게 걷거나 많이 걸어야 한다.




이래서 민박보다 비박이 좋다. 어디든 내가 갈 수 있는 만큼만 걷고 아무데서나 쉬어갈 수 있으니까.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비박타령이다. 박배낭이 없어서 낮에는 걷는 것이 편하지만 박배낭이 없어서 아쉬운 마음도 너무나 크다.




하늘재에서 다음 코스인 포암산으로 오른다. 고갯마루에서 산 봉우리 정상으로 치고 올라가려니 역시나 오르막이 가파르고 힘들다. 오르는 길 군데군데 바위와 암릉지대가 나타났지만 로프는 없었다. 지옥의 코스는 아니라는 얘기다.




포암산은 정상 봉우리보다 올라가는 길에서 보여진 조망들이 훨씬 멋진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3일째 날이 흐리고 시야가 탁해서 생각보다 감탄스러운 경치는 아니었다. 등산과 여행에 있어 날씨가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종주 시작후 1시간 10분만에 포암산 정상에 도착했다. 가파른 오르막 덕분에 정상에 도착하기가 제법 힘들었지만, 포암산만 지나면 이후로의 코스는 완만하다고 했다. 정상에서 10분 정도 쉬다가 다시 길을 이어간다. 포암산 정상까지는 암릉구간이 많았지만 이후로는 나무가 울창한 숲길의 연속이었다.




백두대간을 시작할 5월에는 땡볕이 이글거리는 한여름 날씨더니, 6월에는 오히려 흐리고 바람이 선선하다. 산은 높은곳 낮은곳 할 것 없이 녹음으로 가득찼다. 문득, 4월 30일부터가 아닌, 6월 1일부터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종주를 처음 시작한 4월 30일, 지리산 천왕봉엔 봄이 오지 않았었다. 해발 1000m가 넘는 곳은 어디나 헐벗은 겨울풍경이었고, 그럼에도 날씨는 여름처럼 더웠었다. 철쭉따라 길을 이어가고자 했지만 철쭉을 만난 것은 딱 한번 뿐이었고, 그러니 아직 봄이 오지 않은 풍경과 땡볕과 황사와 예측할 수 없는 봄날씨 때문에 좋았던 기억보다 힘들었던 기억이 훨씬 더 많았다.





SE-88cf3bc8-50a9-4698-bb74-2bfe32bdb41f.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4년 6월 백두대간 ※





하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6월 1일부터 종주를 시작했다면 산이 품은 풍경은 더욱 아름다웠겠지만, 7월로 접어들수록 더위와의 싸움에 이길 수 없었을 것이고, 그동안 백두대간에서 만났던 고마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놓치고 말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인지도 모른다.

내게는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인지도 모른다.




백두대간을 타기 전에는 언제나 지난날을 후회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대간을 시작하고 난 이후로는 지난날 보다 오늘날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많아졌다. 이 또한 내가 백두대간에서 얻은 귀한 것 중 하나였다. 그깟 풍경쯤 놓치면 뭐 어떠랴, 오늘의 나를 잡았는데! 기분이 좋다.




기분도 좋고 배낭도 가볍고 날씨까지 선선하니 더욱 걷는 것이 편하다. 편한 걸음으로 걷다보니 어느덧 마골치다. 마골치에 도착하니 또 국립공원의 출입금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헐! 이건 또 뭐야?! 지도에는 전혀 표시되지 않은 통제구간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국립공원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반면에 통제구간이 너무 많아서 짜증나는 길이기도 하다. 월악산 국립공원의 표식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부터 통제구간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지도에도 없고 미리 예상하지도 못한 덕분에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출입금지 안내판을 자세히 보니 이곳에는 멸종위기종 1급인 산양과 멸종위기종 2급인 하늘다람쥐가 서식하는 곳이라고 한다. 야생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마골치에서 대미산과 황장산을 지나 벌재까지 통제한다고 한다. 무려 22km를 통제하는 것이다!




백두대간의 통제구간만 다 합쳐도 족히 100km 는 넘을 것 같았다. 무턱대고 통제를 할 것이 아니라, 통제하는 곳은 고도가 낮은 곳으로 우회하는 등산로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지리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이런 것 처럼 말이다.




능선 중간에서 갑자기 통제구간을 만나면 하산할 곳도 없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 한다. 처음부터 통제구간은 완벽하게 제외하고 종주하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한, 누가 출입금지 표지판 앞에서 되돌아 갈 것인가. 특히나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통제구간이 많으니 지도만 믿고 걷는 나같은 사람은 황당하고 당황스럽다.




나는 한숨을 쉬며 통제구간을 넘는다. 처음부터 알고 시작하는 것과 몰랐다가 갑작스럽게 맞닥뜨리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등산로가 워낙 완만하고 위험할 것도 없는데다 걷는 내내 숲길의 연속이라 통제구간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은 곧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SE-797fe50d-b369-45f9-8c49-6d9a9555b575.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7년 7월 백두대간 ※





오르락 내리락 숲길이 이어지던 완만한 등산로는 꼭두바위봉에 다다르자 암릉에 로프가 나타났다. 하지만 직벽도 아니고 로프도 짧다. 후훗~ 이정도 로프라니, 귀엽군! 꼭두바위봉 정상에 서자 끝내주는 조망이 펼쳐지는 것 같은데 여전히 시야가 흐리다. 이렇게 흐린 날은 멋진 조망지보다 숲이 아름다운 길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탁 트인 조망지 하나 없이 꽉 막힌 숲길만 이어지면 너무나 답답하다.




바람처럼 걸어서 부리기재대미산을 지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길이지만 힘들만한 포인트는 하나도 없었다. 아마도 가벼운 배낭과 선선한 날씨 덕분이었겠지만. 다른 백두대간 선답자들은 이 구간이 상당히 지루하고 힘든 구간이라고 했는데, 나는 지루한지도 힘든지도 전혀 몰랐다. 배낭과 날씨에 더해 잠을 푹 잘 잤고 기분도 꽤 괜찮았기 때문이리라.




오늘은 운행거리가 긴 데다 해 지기 전에 목적지에 닿아야 했기에 열심히 쉬지 않고 걸었다. 그랬더니 지도에 적혀있는 시간과 거의 비슷하게 기점을 통과할 수 있었다. 나는 원래 느리게 걷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배낭무게에 짓눌려 기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대미산을 지나고도 오르막과 내리막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 구간의 특이점은 정확한 명칭이 있는 봉우리보다 이름 없는 봉우리가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통제구간이 시작된 마골치 이후로 정확한 명칭이 있는 곳은 꼭두바위봉과 대미산 두 곳 뿐이었는데, 이름 없이 고도로만 표시된 봉우리는 7개였다. 심지어 대미산을 지나고도 이름 없는 봉우리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한마디로 오르막과 내리막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는 뜻이다. 박배낭과 함께였다면 "뭔 놈의 오르막이 이렇게도 쉬지 않고 나와?!!" 라며 짜증을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0구간

진행 구간 : 하늘재(충북 충주와 경북 문경의 경계)-포암산-마골치-꼭두바위봉-대미산-새목재(경북 문경시)

진행 날짜 : 2012년 6월 12일 / 화요일

episode83.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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