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인생이 등산과 같다면, 이젠 잘 살 수 있겠지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이름없는 봉우리가 많은 것보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 즈음에 '백두대간 절반 표지석' 이 있는데, 각각 다른 위치에 2개나 있다는 것이었다.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남한의 백두대간 중 딱 절반이 여기라는데, 나의 걸음으로 거의 한시간 간격, 그러니까 2k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백두대간 절반 표지석' 이 두 개나 있었다.

도대체 어디가 진짜 절반이라는 것일까?




어디가 진짜 절반이든, 어쨌든 절반이나 왔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나는 작년 가을에 진부령에서 남진으로 소백산까지 완주한 상태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나의 백두대간 종주도 끝이 난다.




백두대간을 처음 시작할 땐 '완주' 를 목표로 하지 않았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싫어서 백두대간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걷다가 힘들면 아무데서나 자고, 대간길 주변에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 있으면 들렀다 가기도 했었다.




그런데 올 봄 다시 시작한 대간에서는 '완주' 가 목표로 되어버린 것 같았다. 힘들고 지쳐도 쉬어가지 않았고, 주변에 아름다운 곳이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올해의 백두대간에서는 그저 '빨리 완주해야지' 라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작년에 반쯤 종주를 하고 보니 남은 백두대간이 숙제처럼 여겨졌다. 그래서였으리라. 이번 봄의 대간이 작년 가을의 대간만 못하게 느껴진 것은. 작년에는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걸었던 길을 올해는 의무감으로 걸었다.




차갓재작은차갓재를 지나 마을로 내려선다. 이제는 민박집을 알아보아야 한다. 이화령에서 민박을 구하지 못해 서울로 돌아가야 했던 기억이 있음에도, 여전히 예약은 하지 않고 다닌다. 민박이 있으면 자고, 없으면 읍내로 나가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서울로 돌아가도 상관 없었다.




다행히 산에서 벗어나 첫번째로 만난 집에 '민박' 이라고 씌어있는 간판이 있었다. 그리고 마당에는 난닝구를 입은 아저씨가 나와계신게 보였다. 오늘 민박이 되는지 여쭈니 된다고 하신다. 혹시 저녁식사도 되냐 어쭈니 그것도 된다고 하신다. 하지만 지금은 사모님이 출타중이니 사모님이 들어와야 방을 안내 받을 수 있고 저녁식사도 내어줄 수 있다고 하신다.




그 집에 도착한 것이 오후 5시 30분. 사장님의 말투로 미루어보아 사모님이 동네 가까운 이웃에 마실을 나간 것으로 생각하고 그 곳 마당에 주저 앉아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주저앉기 전에 자세히 물어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30분쯤 기다리는데 날이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다. 기다리다 지쳐서 사장님께 사모님 언제 오시냐 여쭈니 7시 넘어야 오실거라고 한다. 으아아아! 아직도 한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니! 그때 그 말을 듣고 그냥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또 바보처럼 마당의 야외테이블에 앉아서 셀프로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추워서 여벌의 옷을 죄다 꺼내 껴입어가며.




시골의 마지막집이라 아래로 내려가봐야 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경험상 이 시간이 지나면 읍내로 나갈 수 있는 버스도 끊겼을 가능성이 100%였다. 이 집에 도착했을 때 자세히 물어보고 바로 나갔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그런데 나보다 더 신기한 것은 사장님이었다. 내가 그 집에 도착한 5시 반부터, 홀로 라면을 끓여먹고 도저히 추워서 못 참겠으니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사정한 7시까지, 한시간 반 동안 사장님은 저녁도 드시지 않고 난닝구 차림으로 마당에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뗄감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들어올 때까지 저녁도 안 드시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설사를 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이 빠졌고, 그래서 저녁은, 저녁 한끼 만큼은 진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도 라면이라니... 설사로 인해 속도 아프고 기운도 없는데 또 라면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게다가 해가 지면서 추위가 몰려와 이런 날씨에 멀쩡한 집을 놔두고 밖에서 식사를 해야한다는 것이 더욱 서글퍼지는 저녁이었다.




저녁을 다 먹고나서 7시가 되어야 겨우 집 안으로 들어갈 것을 허락받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모님이 돌아오지 않으니 별 수 없이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너무 너무 추워서 견딜수 없었다.




손님방이 엉망이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건가 싶었는데, 사장님께 안내받은 방은 이불도 잘 개어져 있고 나름 깔끔했다. 도대체 왜 나를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7시에 들어오신다던 사모님은 내가 잠을 청하기 위해 불을 끈 9시까지 들어오지 않으셨다.





SE-5df1e6e7-9a1c-4f8b-84b9-28dfaa335d69.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5년 9월 백두대간 ※





다음날. 5시에 일어났다. 전날 사모님 얼굴도 못 뵈었는데 새벽부터 식사를 요구하기가 불편해서 이번에도 역시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 셀프로 밥을 지어먹었다. 홀로 밥을 먹고있는데 사모님이 나오셔서 반찬도 없이 밥을 먹냐며 반찬 몇가지를 가져다 주셨다.




사모님께 어제 몇시에 들어오셨냐 여쭈니 10시에 들어오셨다고 한다. 내가 볼멘소리로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자 사모님이 굉장히 미안해 하시며 미리 예약을 하지 그랬냐고 하신다.




"그러게요...

제가 왜 예약도 안하고 왔을까요...?"




미리 예약을 하지 않은 것은 나의 잘못이니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오늘의 종주를 시작한다. 오늘은 당일배낭 종주의 마지막 날이다. 황장산과 벌재를 지나고 문복대와 장구재를 지나 저수령에 도착하면, 거기서 탈출하여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다.




저수령에서 지방도를 건너면 드디어 소백산 국립공원으로의 진입이고, 소백산의 주능을 타고 비로봉에 닿으면 나의 백두대간 종주도 끝이 난다. 그 마지막은 비박으로 장식하고 싶었다.




어제 저녁부터 이상하게 춥다 싶던 날씨는 오늘 아침에 더욱 추워졌다. 나는 처음으로 고어텍스 점퍼를 입고 등산을 시작한다. 날은 추웠지만 시야는 깨끗한 날이다. 어제까지 안개인듯 황사인듯 흐리던 시야가 오늘은 무척이나 깨끗하다.




어제 백두대간 능선에서 탈출했던 작은차갓재에 도착하여 이번엔 황장산으로 오른다. '재' 에서 '봉' 으로 오르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깎아지른 오르막이다. 경사가 가파른지 완만한지의 차이일 뿐인데 백두대간 구간 중 '재' 에서 '봉' 으로 오르는 길이 완만한 곳은 거의 없었다. 이제는 이마저도 그러려니 한다. 낮은 곳에서 편히 잤으면 응당 시작부터 고생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러려니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투덜대고 불평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상황은 같아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전자로 생각하면 즐거운 등산이 되고 후자로 생각하면 풍경이 제아무리 좋아도 피곤하고 짜증스럽다.




내가 백두대간 종주를 마무리 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날도 머지 않았다. 이제 나에겐 힘든 일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그러려니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치가 조금 더 생겼을 것이다. 산이 아닌 일상에서도 말이다. 예전의 나는 그런 능력이 무척이나 부족했다. 불만이 너무 많았고 개선해볼 노력을 하기보다 그만두고 도망칠 생각만 했다. 그래서 직장을 다녀도 한 곳에 오래 버티지 못했고 일년마다 이직을 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

인생이 등산과 같으니, 사회생활도 내가 좋아하는 백두대간 종주와 같다고 생각해야지. 너무 힘들면 산 정상에 도착하기 직전이라 그런가보다 생각해야지. 그것보다 더 힘들면 대야산 로프구간이 나타났구나 생각해야지. 대야산 구간을 무사히 넘긴 덕분에 남들은 더 힘들다던 희양산과 조령산을 무척이나 가볍게 넘었던 것처럼, 앞으로의 인생과 나의 사회생활도 그러하리라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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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때마다 도망쳤던 것 때문에 낯선 일이 매번 힘들게 느껴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 한번만 꾹 참고 넘어가봤다면, 이후로 만나는 일은 다 별거 아닌 일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한번을 참지 못하고 매번 도망을 쳤다.




정신이 혼미하고 눈물을 쏙 빼더라도 버텨봐야 겠다. 높고 험한 봉우리를 지나면 낮고 편한 고갯길이 나타나고, 발 디딜 틈도 없는 칼바위 능선을 지나면 곧 누워 지내도 좋을 편한 안부가 나타나는 것이 인생이리라.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이라도 끝나지 않는 일은 없다는 것을, 백두대간이 내게 알려주었다.




작은차갓재에서 황장산으로 오르는 길은 돌멩이와 작은 바위들이 즐비한 너덜지대다. 너덜의 오르막을 조심조심 오른다. 쌀쌀한 날씨에 배낭마저 가벼우니 그럭저럭 할 만 하다. 황장산 정상부에 다다르자 또 암릉에 로프가 나타났다. 웃음이 난다. 이놈의 백두대간엔 도대체 로프가 몇 개일까? 날이 쌀쌀하니 오히려 진땀 나는 로프가 고맙기도 하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렇게나 달라진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0구간

진행 구간 : 새목재(경북 문경시)-차갓재-작은차갓재-민박-황장산(경북 문경시)

진행 날짜 : 2012년 6월 12일~13일 / 화~수요일

episode84.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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