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황장산 정상은 숲이 우거져 별다른 조망이 없었다. 대신 정상 봉우리를 약간 벗어나자 멋들어진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탁 트인 암릉 위에서 건너다 보이는 산의 능선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시야가 깨끗하니 더욱 멋진 풍경이다. 최근 지나온 날들 중 오늘이 가장 깨끗한 날이다.
이런 멋진 날
이런 멋진 곳에서
이런 멋진 풍경을 허락받으니
모든 것이 감사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쉬면서 능선 저 너머를 바라본다. 힘들게 오르막을 올라온 나에게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쉼을 주듯, 나의 삶에서도 힘든 고비를 넘기면 그때마다 쉬어갈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나는 힘들어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든든하게 받쳐주는 부모가 없으니 남들보다 열 배 백 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쉬는 법도 몰랐고 억지로 참고 버티다보니 한계점에 다다르면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그렇게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러니 다시 일어서면 또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런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
느슨하게 살아야지.
등산을 하듯 천천히 오르고
오르막 끝에는 충분히 쉬고
내려올 때도 조심히 천천히
그렇게 내려와야지.
오르막을 오를 때도
내리막을 내려올 때도
쉬어야 할 곳에서는
반드시 쉬었다 가야지.
바위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는데 바람이 많이 분다. 바람은 저쪽에서도 많이 부는 것인지, 바라다 보이는 산의 능선도 금세 구름에 가리워져 버린다. 구름에 가리워진 능선도 멋있다. 시야가 깨끗하니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같다. 우리나라가 괜히 산수화로 유명한 것이 아니다.
다시 길을 이어간다. 해는 점점 떠오르는데 어째 날은 점점 추워진다. 6월의 바람이 깊은 가을바람 못지 않다. 나는 옷깃을 여미고 내리막을 내려간다. 황장산은 정상에 도착하기 위해 로프를 잡고 올라와야 했던 구간보다 정상 이후의 내리막 암릉이 더욱 아찔하다. 로프를 잡고 칼바위를 조심조심 내려선다.
황장산을 지나 황장재와 폐백이재로 이어지는 길을 걷는다. 이 곳은 숲이 우거진 흙길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암릉 사이로 탁 트인 조망의 바위지대가 번갈아 나타나는 길이다. 걷는 재미 보는 재미가 모두 쏠쏠하다.
오르락 내리락이 쉼 없이 이어지는데 날이 쌀쌀하니 힘든지도 모르겠다. 쉬지 않고 걷다보니 폐백이재 지나 지방도와 만나는 벌재에 도착했다. 벌재를 벗어나면 월악산 국립공원의 통제구간 역시 모두 벗어나게 된다.
벌재의 지방도 옆에는 국립공원 감시초소가 세워져 있었지만 여기에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평일에는 대간을 지나는 사람이 한명도 없는 날이 더욱 많으니, 초소가 있다고 하여 국립공원 직원을 상시 비치하는 것은 확실히 인력낭비일 것이다.
오전 11 반.
벌재의 나무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아침에 2인분의 밥을 지어 1인분은 아침으로 먹고 1인분은 주먹밥을 만들어 점심으로 싸왔다. 주먹밥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해봐야 튜브형 볶음고추장이 전부다. 이번 당일배낭의 종주기간에는 3일 연속 민박을 했는데도 3일 연속 제대로 된 집밥이나 식당밥을 먹지 못했다. 한 끼도 제대로 된 식사가 없었다. 매번 간편국 아니면 라면이었다.
이제는 누룽지나 주먹밥을 보기만 해도 질린다. 한끼 식사를 다 먹어봐야 배도 안 차고, 먹는 동안에도 맛이 없어 억지로 꾸역 꾸역 밀어넣는다. 아... 배 고파... 식당밥이 먹고 싶다. 고소한 산나물에 고기반찬이 먹고싶다. 반찬과 국이 있는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지도에는 벌재에 토속음식점이 있다고 표기되어 있었는데 얼마나 옛날 기록인지 그 어디에도 식당은 없었다.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황장약수 가기 전에 음식점이 있는 것처럼 표기되어 있었지만 음식점은 개뿔, 폐가 하나 안 나오고 바로 약수터가 나타난다. 나는 약수터 옆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주먹밥을 우걱우걱 밀어 넣었다.
점심을 먹었으니 다시 길을 이어가자! 지방도를 건너 이번엔 문복대로 향한다. 건너편 대간 입구를 찾고보니 늘어지게 한숨 자고 싶은 정자가 있었다. 여기서 편히 앉아 점심을 먹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부질없는 후회가 밀려온다.
문복대로 향하는 길은 초반 숲길이 무척이나 예뻤다. 하지만 역시나 오르막은 무척이나 가파르다. 그래도 보드라운 육산이나 걸을만 했는데, 점심을 부실하게 먹어서인지 암릉의 황장산 구간보다 흙길 육산인 이곳이 나는 더 힘들었다. 벌재 이후로 바위가 많은 암산은 끝난 것인지 이 곳은 끝까지 부드러운 흙길만 이어졌다.
빡센 오르막 끝에 '복이 들어오는 문' 이라는 뜻의 '문복대' 에 도착했다. 내게도 복이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절대 사양하지 않을테니 무한대로 들어와줬으면 좋겠다. 이제 백두대간 종주를 마무리 하면 살면서 받지 못했던 복이 일시에 터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소망해 본다. 복 많이 들어오라고 이 곳에서 충분히 쉬어간다.
문복대에서 저수령까지는 1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몇번의 봉우리와 급경사가 있었지만 내리막이라 그리 힘들지 않았다. 힘들것도 없는 길에서 배가 고파 현기증이 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어제부터 설사가 시작되었는데, 어제는 하루 종일 네 번의 설사를 했고 오늘은 벌써 세 번의 설사가 나왔다. 평소에도 설사를 하면 기력이 쭉쭉 빠지는 체질이었는데 등산을 하며 먹는 것도 부실하니 더욱 기력이 빠진다. 먹은 것도 없는데 왜 계속 설사가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저수령에 도착했을 때, 그 곳 휴게소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을 발견했을 때, 행복에 겨워 비명이 터져나왔다! 꺄아~ 만세~!! 나 드디어 밥 먹을 수 있게 되었어!!! 평일의 대간길에 문 열린 휴게소가 웬말인가! 이런 횡제라니! 확실히 문복대에서 오래 쉰 보람이 있구나!
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나 하다못해 비빔밥이라도 먹고 싶었는데, 휴게소에서 가능한 요리는 감자전이 전부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그거라도 주문하고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위장은 더욱 쪼그라들어 뱃속이 비틀어지는 것 같았다.
감자전이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먹었다. 감자전에 막걸리가 빠질 수 없으니 막걸리도 한병 주문했다. 이러니 아무리 대간을 타도 몸이 좋아질 리 없다. 체력을 보충하기도 전에 언제나 술로 배를 채운다. 심지어 설사가 멎지 않는 몸으로도 술을 찾으니 더욱 답이 없다.
나는 왜 이렇게 술이 좋은 것일까. 술 취한 아버지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도 술이 좋은 것 보면 확실히 나도 정상은 아니다. 잘못은 술을 마신 사람이 한 것이지 술이 한 것은 아니니까.
신기하게도 우리 삼남매에게는 주사가 하나도 없었다. 임계점 넘어까지 술을 마시면 우리 삼남매가 하는 주사란, 평소에 하지 못했던 애정표현을 하는 것이었다. 가끔 언니나 오빠가 밤늦게 전화해서 허파에 바람이 든 것처럼 헤실헤실 웃으며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날은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신 날이었다.
새언니의 전언에 따르면, 우리 오빠는 회식에서 술을 엄청 마시고 들어온 날이면 '계속 실실 웃는 것으로' 주사를 부린다고 했다. 문을 열어준 아내의 얼굴을 보고도 웃고,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만지면서도 웃고,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웃고, 화장실에서 씻으면서도 계속 웃는다고 했다. 새언니가 "오빠, 왜 계속 웃어?" 라고 물어보면 "아니, 아니~" 라고 대답하며 계속 웃는다고 했다. 그러면 새언니도 웃겨서 같이 웃어버린다고 했다.
아버지의 주사를 닮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인데, 웃고 애교를 부리고 사랑을 표현하는 주사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있을 수 있을까!
저수령 휴게소는 한때 어떤 전시관이었던 것인지 벽면 가득 천장부터 바닥까지 장식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래된 장식장을 채우고 있는 것은 모두 유리병에 담긴 '직접 담근 효소' 였다. 우리가 흔히 아는 매실청 같은 것 말이다.
매실과 설탕을 물 없이 1:1로 섞어 상온에 오래 보관하면 삼투압이 생겨 매실에서 점점 물이 나오게 되는데 그 원액을 '효소' 라고 한다. 효소는 소화기관에 매우 도움이 된다고 알고있는 것이 내가 가진 상식의 전부였다. 어릴때부터 소화가 되지 않으면 할머니는 나에게 매실액 한스푼을 꿀꺽 삼키게 하셨었다.
이 곳 저수령 휴게소에는 매실 뿐 아니라 각종 산에서 나는 열매로 효소를 만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 아무도 없이 아줌마 혼자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아줌마 사장님이 말씀하시길, 암투병 중인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효소를 공부하기 시작하셨다고 했다.
사장님은 평일이면 이 곳 저수령 양쪽으로 산을 올라 효소에 쓰일만한 것을 채취해 오신다고 했다. 오늘은 오전 내내 개복숭아를 따왔다며, 쉬지 않고 땄지만 유리병 두 개 밖에 안되더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래서 평일에는 휴게소를 종일 운영하기 힘들고, 휴게소 운영보다 효소 만들기에 더 집중하다보니 메뉴가 감자전 밖에 없다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사장님께 나의 막걸리를 권하며 함께 드시자 했더니, 사장님은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한다고 하신다. 자신은 산에 목적이 있어 올라가는데도 홀로 산에 있으면 제법 무서운데, 젊은 아가씨 혼자 백두대간 종주를 하다니 무척이나 대단하다고도 하셨다.
내 생각엔, 홀로 산에 있는 것이 무서움에도 매일 산을 오르는 사장님이 더 대단하신 것 같았다. 두려움이 있음에도 매일 산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역시 남편을 위한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사장님은 오전 내내 개복숭아를 따느라 무척이나 지친 것 같았지만, 자신의 효소 덕에 남편의 암이 많이 호전되었고 지금은 일상생활도 잘 하고 있다며 얼굴 가득 웃음을 피어 올리셨다.
목표를 이뤄 성공을 거둬낸 사람의 미소였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1구간
진행 구간 : 황장산(경북 문경시)-황장재-폐백이재-벌재-들목재-문복대-옥녀봉-저수령-저수령 휴게소(충북 단양과 경북 예천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6월 13일 / 수요일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고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