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마지막 종주의 첫 걸음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배가 불러도 감자전은 끝까지 다 먹어 치웠다. 하지만 막걸리는 두 잔 밖에 못 마셨다. 남은 막걸리가 아까웠지만 억지로 마셨다간 집에 도착하기 전에 쓰러질지도 몰랐다. 나는 술을 매우 좋아했지만 잘 마시는 사람은 아니다.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휴게소로 중년의 부부가 들어왔다. 휴게소에서 판매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묻더니 음식은 주문하지 않고 벽면에 전시된 효소를 찬찬히 둘러본다.




"사장님 이 것도 파는 거에요?"




부부 중 여자가 사장님께 묻는다.




"1리터 패트병에 담긴 것은 숙성이 다 되어 파는 거구요, 유리병에 담긴 것은 아직 숙성 중이에요."




부부가 관심있게 둘러보자 사장님은 판매중인 효소의 맛을 보여주셨다. 몇가지를 시음하던 부부는 그 중 하나를 골라 셈을 치른다. 부부가 계산을 하고나자 사장님이 부부에게 부탁한다.




"이 아가씨가 백두대간 종주 중인데 오늘 서울로 돌아가야 한대요. 시내버스 다니는 마을까지만 이 아가씨 좀 태워주시면 안될까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를 가리키며 부탁을 하신다. 부부는 평소에 히치하이커를 태워 본 적이 없어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휴게소 사장님이 재차 부탁하신다. 민망해서 내가 사장님을 말리고 싶었다. 마지못한 듯 부부 중 여자가 알겠다고 대답한다.




부부를 따라가며 내가 개미만한 목소리로




"택시타고 가도 되는데..."




했더니, 휴게소 사장님이 말씀하신다.




"아가씨, 먼길 가야 하는데 한 푼이라도 아껴. 젊을 때는 도움도 받고 그래도 돼."




어차피 히치하이킹을 할 생각이었지만 원치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부탁하는 것은 나로서도 불편한 일이다. 히치하이킹은 '본인 스스로' 차를 세워준 사람에게서 하는 것이 제일 좋다. 하지만 휴게소 사장님 덕분에 두 팔을 격렬히 흔들어 지나가는 차를 세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중년의 부부는 조용히 말이 없었지만 내가 먼저 이런 저런 얘기로 대화를 시도하자 나중엔 나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저씨는 원래 말이 없는 분 같았고 아줌마는 조용한 여행길에 대화 할 사람이 생기니 나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부부는 젊은 시절 밤낮도 없이 주말도 없이 일만 하셨다고 했다. 막내까지 대학을 졸업하고 나자 이제는 두 분 모두 일을 그만두고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전국을 유랑중이라고 했다. 주말에는 어딜 가나 사람들이 붐비고 방값도 비싸서 금요일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서 쉬다가, 월요일 아침이면 또 두 분이서 차를 몰아 먼 곳으로 떠난다고 했다.




백두대간을 타는 지금의 내 모습과 비슷했지만 부부와 나에게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나는 밤낮없이 주말도 없이 열정을 쏟아부어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함께 다닐 사람마저 없다는 것. 여유가 느껴지는 부부가 부러웠다. 중년의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여행을 다니며 시종일관 웃고 있는 것도 부러웠다.




"저도 이런 남편 만나서

함께 여행다니며 살고 싶어요."




진심이었다. 나도 여행 좋아하고 등산 좋아하는 남편을 만나서 함께 여행도 하고 등산도 하며 그렇게 살고 싶었다.




"이런 사람 만나기 힘들어요.

이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거든요."




아줌마의 대답은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나는 단지 취미가 통하는 배우자를 말한 것이었는데, 아줌마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자상하고 좋은 사람인지를 말하고 있었다.




아줌마의 말에 아저씨는 당황하여 움찔하였고, 아줌마는 자신이 한 말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 아저씨를 보며 웃는다. 아저씨도 움찔하긴 했지만 이내 자신을 칭찬하고 자랑하는 아줌마가 고마운 표정이다. 자칫 재수없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는데 그날의 분위기와 아줌마의 말투가 재수없기는 커녕, 저토록 자신감 넘치게 자신의 배우자를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멋져보였다.



이런 사람 잘 없긴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결혼은 정말 중요한 문제거든요.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아가씨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그런 남자를 만나세요.




그러면서 아줌마는 젊어서 고생은 누구나 하는 거라고 했다. 부부가 함께 살다보면 좋은 날도 있지만 힘들고 괴로운 날도 분명 온다면서. 힘들고 괴로운 순간에도 서로를 탓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줄 수 있는 사람이 진짜라고 했다. 그래야 자녀들이 다 자라고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때, 함께 손 잡고 여행다니고 싶은 사이가 되는 거라고 했다.




부부는 나를 단양시 대강면의 버스정류장에 '대강' 내려주었다. 아무곳에나 대강 내려준 것이었지만 단양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터미널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는 곳이었다. 마침 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금방 도착했고 나는 무척이나 수월하게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것이 수요일 이었다. 나는 배낭만 바꿔메고 다음날 다시 백두대간으로 출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도 설사가 멈추지 않았고, 그래서 일주일을 쉬어버렸다.




집에서 요양을 하며 쉬고 있는데 주문한 적도 없는 택배가 도착했다. 이게 뭐지? 누가 보낸 거지?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지난 겨울부터 올 봄 대간종주를 시작하기 전까지 꾸준히 다녔던 한의원 이름이 씌어있었다. 택배상자를 열어보니 파우치에 든 한약과 작은 알갱이의 환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꾹꾹 눌러 쓴 손글씨로


1. 설사할 때

2. 소화가 안 될 때

3. 체기가 있을 때 먹으라며

세 가지 약의 복용법을 설명해주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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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매일 대간종주기를 올리며 설사 때문에 힘들다고 썼더니 그걸 보고 보내주신 것 같았다. 당장 한의사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택배 보내주신 것 받았어요.

어머, 너무 감사해요!"




"잘 도착했어요?

약 받으러 오라고 하면 안 올 것 같아서

그냥 제가 택배로 보냈어요."




"정말 감사해요.

저 지금 집에서 쉬고 있는데도 설사가 낫지 않아요. 이제 한번만 더 가면 대간 종주 끝나는데 설사때문에 출발도 못하고 있었거든요."




"선유씨 대간종주기 볼 때마다 조마조마해요. 기력도 없는 사람이 밥도 안 먹고 다니고, 물도 아무데서나 떠서 마시고. 원래 이런 계절에는 설사를 조심해야 하는데 정수도 안 된 물, 끓이지도 않은 물을 마시니 설사가 생기는 거에요. 그리고 식사도 대충 하는 사람이 막걸리는 왜 그렇게 마셔요? 몸이 허 할수록 술을 멀리해야 하는 거에요. 제발 본인 몸 좀 챙겨요. 제가 보내드린 약은 종주할 때 챙겨가서 배 아프면 꼭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해요 선생님."




"이제 정말 마지막이네요. 그간 종주한다고 고생했어요. 마지막까지 다치지 말고 무사종주 하세요."




"네. 종주 완주하고

한의원 들르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설사를 멎게 한다는 한약을 쭉 마셨다. 낮에도 하나를 먹고 밤에도 또 먹었다. 그리고 다음날, 일주일만에 드디어 집을 나설 수 있었다.




평소엔 집에서 출발 할 때도 아침 일찍 동서울터미널로 향하곤 했는데 이번엔 여유롭게 출발했다. 단양터미널에서 저수령으로 들어가는 버스 시간이 애매해서 천천히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3시, 일주일만에 다시 저수령에 도착했다. 저수령 휴게소의 사모님은 다시 대간을 이어갈 때도 꼭 들르라고 하셨지만, 휴게소 앞으로 가보니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사모님은 오늘도 열매를 채취하기 위해 산에 가신 모양이다.




오늘의 종주는 급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었다. 종주를 시작하는 시간이 이미 오후 3시라 3시간 정도만 걸으면 되었고, 출발지인 저수령이 이미 해발 850m 인 곳이라 첫번째 봉우리인 촛대봉까지도 힘들 것이 전혀 없었다.




이 곳 저수령에서 소백산 비로봉까지, 2박3일로 걸어도 여유롭게 지날 수 있는 곳을 나는 굳이 3박4일 일정으로 끊어가기로 한다. 첫날 저수령에 도착한 시간이 너무 늦은 것도 있었지만,




이번엔

그냥 좀

천천히 걷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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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니 금새 촛대봉이 나타나고 또 걷다보니 금새 투구봉과 시루봉이다. 몽환적인 잣나무 숲길이 나타나고 헬기장도 나타나더니 어느덧 오늘의 목적지인 '흙목' 에 도착했다. 정말로 딱 3시간이 걸렸다. 2인용 텐트까지 넣은 박배낭을 메고도 지도에 표기된 것과 시간이 정확히 일치했다. 딱히 힘든 곳도 없고 딱히 전망이 멋진 곳도 없으니 시간이 지체될 이유가 없었다.




오후 6시. 흙목의 안부에 텐트를 설치한다. 백두대간 종주의 마지막에 호사 좀 누려보겠다고 일인용 비비쌕을 놔두고 2인용 돔텐트를 챙겨왔다. 3박4일치의 식량밖에 없어서인지 2인용 텐트를 챙기고도 배낭이 무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천천히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천천히 국을 끓이고

천천히 음미하듯 밥을 먹는다.




천천히 지도를 펼쳐보고

천천히 일기를 쓰고

천천히 밤하늘과 어두운 숲을 둘러본다.




마지막이 다가오니 아쉬운 모양이다. 그토록 쉬지 않고 걷더니 벌써 마지막인 것이 아쉬운 모양이다. 밤이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




다음 날. 5시에 눈을 떴다. 이젠 9시 언저리에 잠이 들어 5시 언저리에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이렇게만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소처럼 7시에 오늘의 종주를 시작한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1구간

진행 구간 : 저수령 휴게소(충북 단양과 경북 예천의 경계)-서울로 귀가-다시 저수령-촛대봉-투구봉-시루봉-배재-싸리재-흙목 비박(충북 단양과 경북 예천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6월 13일, 수요일 / 6월 19일, 화요일

SE-efe67513-30fa-4f2c-a62f-2bf17ee557e8.png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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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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