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저수령에서 도솔봉까지는 별다른 조망지가 없다더니 과연 그랬다. 조망지가 없어서 걷는 즐거움이 덜하긴 했지만 아침부터 무척이나 더운 날씨라 차라리 숲이 우거진 곳을 걷는 것이 더 나은 듯도 했다.
예쁜 오솔길 같은 등산로를 따라 걷는다. 딱 한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좁다란 오솔길의 연속이다. 조망은 없지만 초록으로 가득 찬 오솔길도 예쁘고 예쁘다.
몰랐는데 잠을 이룬 '흙목' 을 지나 뱀재와 솔봉 이후 '묘적령' 부터가 소백산 국립공원이라고 한다. 나는 어제 시작한 저수령부터 모두 소백산권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묘적령에 도착하자 처음으로 '소백산 국립공원' 의 탐방로 안내판이 나타났다. 그리고 완만하던 등산로가 묘적령부터 가파른 경사를 보이기 시작했다.
완만한 숲길을 지날때는 무거운 줄도 모르겠던 배낭이, 가파른 경사를 치고 올라가자 스스로 무게를 부풀리는 것인지 갑자기 허리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직 묘적봉에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오르막 초반부터 체력이 너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묘적령에서 묘적봉까지는 고작 40분이었지만 오르막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묘적봉으로 오르는 길에 처음으로 조망이 뚫렸고, 확 트인 전망을 바라보자 마음도 트인다. 몸은 힘들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퍼진다. 곧 도착한 묘적봉에서 30분을 쉬어간다. 이제 고작 10시 반인데 벌써부터 체력 방전이라니. 여기보다 더 높은 봉우리가 남아있는데 벌써부터 무섭다.
충분히 쉬고 다시 길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도솔봉으로 향한다. 묘적봉에서 바로 치고 올라야 할 봉우리이자 오늘의 최대난관인 도솔봉. 도솔봉으로 오르는 길은 어제 오늘의 코스 중 가장 힘든 구간이다. 하지만 탁 트인 조망지가 많아서 경치 감상을 핑계 삼아 가다 쉬다 가다 쉬다 한다.
도솔봉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계속 흙길 육산이었는데 도솔봉 정상은 바위가 적절히 섞인 암산이다. 멋들어진 바위가 보이니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다행히 도솔봉으로 오르는 바위는 로프구간이 아닌 모두 데크계단길이다.
허리는 점점 아픈데 소백산의 경치 덕분에 기분은 점점 좋아진다. 체력을 잡아먹는 로프구간이 아니라 다행이다. 데크계단을 따라 한걸음 오르고 돌아보고 한걸음 오르고 쉬어가고를 반복한다. 쉬지 않고 오르기엔 길이 너무 가파르다. 쉬지 않고 오르기엔 배낭이 너무 무겁고 나의 체력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다.
도솔봉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왁자지껄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함께 가까워졌다. 워낙에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평일임에도 산악회에서 단체 산행을 나온 모양이었다. 국립공원은 국립공원이구나. 평일인데도 이렇게나 사람들이 많다니. 조용히 자연을 만끽하고 싶었던 마음이 물거품으로 변하고 말았다.
도솔봉 정상부는 암릉지대인데도 제법 넓었고 정상부 일대에 울타리가 쳐져 있어서 안정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울타리를 따라 넓은 봉우리를 한바퀴 돌면 사방팔방이 다 내려다보이는 특급 조망지였다. 아름답게 흐르는 능선이 초록을 입고 멋들어짐을 자랑하는데 거기에 국립공원의 스케일이 더해져 입을 다물 수 없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 나온다.
너무 멋진 곳이다.
이런 곳에서 비박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비박을 하기엔 정상부가 너무 울퉁불퉁 하다. 텐트는 커녕 침낭만 덮고도 몸을 쭉 뻗을 공간이 나오지 않을 듯 하다.
도솔봉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이 아름다운 곳을 천천히 만끽하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넓은 정상부에 산악회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모두 왁자지껄 떠들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들 이 곳에서 점심 먹을 채비를 한다.
하아... 이 아름다운 곳을 그냥 지나쳐야 하다니... 아쉽고도 아쉽다. 나도 이런 멋진 풍경을 보며 천천히 음미하듯 식사를 하고 싶었는데. 사람들의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경치를 방해한다. 나는 조금 쉬다가 소음을 피해 다음 코스로 이동한다.
올라올 때도 급경사던 도솔봉은 내려갈 때도 여전히 급경사다. 급경사 내리막을 조심 조심 내려선다. 조금 완만한 길이 이어지는가 싶다가 다시 급경사 오르막이 시작된다. 고작 40분 거리의 삼형제봉에 닿기까지 몇번의 급경사가 오르락 내리락 한다.
국립공원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경치의 스케일도 남다르지만 길을 걷는 힘겨움도 남다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쉴새 없이 이어지고 거기에 따른 보상도 쉴새 없이 나타난다. 탁 트인 조망지가 많으니 힘들어도 기분은 꽤 좋다. 그리고 오르막의 끝에는 또 하나의 봉우리, 삼형제봉이 있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삼형제봉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오늘은 삼형제봉 지나 죽령까지만 진행할 생각인데 죽령은 국도와 만나는 곳이라 그 직전 샘터에서 비박을 할 예정이었다. 삼형제봉에서 샘터까지는 3km도 안되는 거리라 나는 벌써부터 오늘의 여정이 끝난 듯 여유로웠다. 천천히 점심을 먹고 천천히 길을 이어간다. 삼형제봉에서 샘터로 이어지는 숲길을 마실 나온 듯 천천히 걷는다.
삼형제봉을 벗어나자 완만하고 편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완만한 숲길 양쪽으로 산죽 군락이 끝없이 펼쳐진다. 무릎 아래 높이로만 자라면 기분 좋은 산죽길. 이 더운 날씨에 시원한 숲길을 걸으니 또 기분이 좋다. 탁 트인 곳을 걸으면 경치가 아름다워 기분이 좋고 빽빽한 나무숲을 걸으면 시원해서 기분이 좋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 좋다.
등산이 아닌 일상에서도
힘겨움보다 좋은 것을
더 크게 느낄 수 있기를!
한가로울 땐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어 좋고
바쁠 땐 삶을 열심히 살아낼 수 있는 기회라서
그 또한 좋다고 생각할 수 있기를!
과거의 나는 즐거운 순간에도 마냥 즐기지 못했고, 그러니 힘든 순간에는 더욱 힘들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탁 트인 전망지에서는 햇볕이 너무 뜨겁다고 툴툴대고, 빽빽한 나무 숲에서는 한 치 앞이 안 보인다고 툴툴거리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등산을 하면서도 하루종일 인상만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과거의 나였을 것이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 겠다. 이제는 인생도 등산처럼 생각해야 겠다. 나무가 없으면 햇볕이 뜨겁다고 툴툴댈 것이 아니라 시야가 훤하다고 기뻐해야 겠다. 나무가 빽빽하면 한치 앞이 안 보인다고 툴툴댈 것이 아니라 햇볕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겠다. 즐거운 일이 생기면 모든 생각을 비우고 즐거움을 만끽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곧 나타날 전망지를 상상하며 묵묵히 걸어볼 수 있어야 겠다.
그러면
길이 힘들고 인생이 힘들어도
그 안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찾아낼 수 있겠지.
오후 3시 20분. 벌써 샘터에 도착했다. 벌써 오늘의 종주가 끝났다. 다행히 샘터 옆에 텐트를 설치하고도 남을 평평한 공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유후~ 오늘의 비박지로 딱이로구나!
샘터의 수량이 풍부하면 머리도 감고 샤워도 하려고 했는데, 수량은 둘째치고 물이 너무 차가워서 도저히 씻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요 며칠 낮에는 여름처럼 더워도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했는데, 햇볕이 없는 나무숲에서 걸음을 쉬자 서늘한 기운이 점점 강해진다. 나는 샤워대신 수건을 물에 적셔 몸을 닦았다.
일찍 야영을 시작한 덕분에 몸도 닦고 저녁도 먹고 일기까지 다 쓰고 났음에도 이제 겨우 6시였다. 이젠 뭘 하지? 나무로 가득한 안부라 경치를 감상할 것도 없었고, 나에겐 책도 없고 음악도 없어서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하릴없이 샘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나는 6시 30분, 아직도 밖이 훤한 시간에 텐트를 닫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정확히 6시 30분에 눈을 떴다.
열 두시간 동안 내리 잔 것이다. 참으로 징그럽게도 잤다. 산에서까지 이렇게 장시간 잠을 자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허리가 아프기는커녕 그간의 피로가 싹 풀린 기분이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지만 평소보다 기분이 좋았고, 아침부터 묘하게 에너지가 솟아 올랐다.
오늘은 대간 종주의 마지막 날!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었다!
죽령을 지나 소백산의 주능선을 타고 연화봉 3봉우리를 모두 지나 비로봉에 닿으면, 길고도 길었던 종주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중간에 멈추었던 겨울을 제외하면 4개월 간의 여정이었고, 집으로 돌아가 쉰 날을 제외하고 오로지 백두대간에서 보낸 날만 합쳐도 65일간의 대장정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 65일째의 마지막 날인 것이다!
오지 않을 것 같은 날도 오긴 오는구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도 끝이 나는구나!
아침부터 기분이 무척이나 좋다. 길었던 백두대간 종주를 기분 좋게 마무리 할 수 있을 것 같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1간
진행 구간 : 흙목(충북 단양과 경북 예천의 경계)-뱀재-솔봉-모시골-묘적령-묘적봉-도솔봉-삼형제봉-샘터 비박(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6월 20일 / 수요일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