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비탈에서 자라는 나무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국도와 만나는 죽령을 지나 제2연화봉으로 향한다. 어제 지나온 길도 모두 소백산 국립공원이었지만, 죽령을 지나 주능선에 접어들자 이제야 '진짜 소백산' 에 들어선 기분이다.




소백산의 주능선은 죽령부터 '제2연화봉'을 거쳐 '연화봉' 까지, 장장 7km나 되는 길이 시멘트바닥 임도로 이어진다. 흙길도 나무숲도 없는 널찍한 시멘트길을 3시간 넘게 걸어야 하는 것이다. 연화봉 정상에는 천문대가 있어서그 곳까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이 닦여진 것이었다.




3시간 넘게 시멘트 길을 걸어가려니 등산이 등산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등산하는 재미는 떨어져도 잘 포장된 길을 걸으니 계속되는 오르막을 오르면서도 힘든지 모르겠다. 역시 등산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다 좋다!




생각해보면 어린시절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받았고, 괴로움에 몸부림 치느라 이룬 것도 해낸 것도 없는 인생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는 그 집을 벗어 났잖아? 덕분에 홀로 살며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고, 백수로 지내며 일년 가까이 등산만 하며 살고 있잖아? 그러니 나의 인생도, 이정도면 꽤 괜찮은 것 아닌가?




종주의 마지막 날이 되니

밑도 끝도 없이 긍정의 힘이 솟아 오른다.

이것이 백두대간의 힘인가 싶었다.




제2연화봉 이후에 만난 샘터에서는 물이 얇은 실처럼 가늘게 떨어졌지만, 묵묵히 참고 기다려 그 물을 받아 마셔보니 이렇게나 시원하고 맛 있을 수 없었다. 살면서 물이 맛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이 곳의 물은 정말이지 맛있었다.




캬아~!

물 맛 한번 끝내주는구나!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




곧 나의 인생도 그리 될 거야.

참고 기다린 만큼

끝내주는 인생이 펼쳐질 거야!




백두대간의 힘이

단전에서부터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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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대를 지나자 드디어 흙길의 진짜 등산로가 시작되었고, 연화봉 정상석을 지나자 나무가 울창한 숲길이 시작 되었다. 국립공원의 등산로 양 옆으로 정령들이 살 것 같은 숲의 정원이 펼쳐진다. 자연 그대로 아무렇게나 자라는 나무와 풀들인데 잘 가꿔진 정원처럼 예쁘다. 아! 나의 집 앞마당에 이런 정원을 두고 살 수 있다면, 아! 얼마나 행복할까!




정원같은 숲을 벗어나자 이번엔 키 큰 나무 하나 없이 낮은 풀만 자라는 초지 능선이 나타난다. 잘 닦여진 데크길 양쪽으로 온통 초록풀이 가득하다. 소백산의 부드러운 능선이 여린 풀옷을 입고 제 몸매를 뽐낸다. 여기 가까운 곳에서부터 저 먼 곳까지 펼쳐진 능선들이 가도 가도 끊임없이 펼쳐진다. 봉우리 정상도 아닌 능선일 뿐인데 탁 트인 조망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등산로 양 옆으로 낮게 자란 나무들은 모두 철쭉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너무 늦게 도착한 모양이다. 철쭉의 꽃망울은 단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지난 겨울 나를 그토록 울렸던 철쭉이 도대체 어떤 녀석들인지 그 낯짝 좀 보려고 했는데, 소백의 철쭉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름다운 숲의 정원과 끝없이 펼쳐진 초지능선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길을 걷다보면, 어느덧 주목관리소에 도착한다. 작년 겨울에 딱 여기까지 걷고 종주를 중단했었다. 백두대간의 북쪽 끝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걸음으로 내려오다, 소백산에서 폭설을 만나 허벅지까지 쌓인 눈길을 홀로 헤치며 국망봉과 비로봉을 거쳐 여기 주목관리소까지 왔었다.




그때 나에게 따뜻한 된장국과 차를 나눠주셨던 분들은 지금 잘 살고 계실까? 당신들의 사소한 도움이 나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이 길 위에서 참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고 때로는 그것이 꺼져가는 내 생명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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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을 처음 시작했던 작년에는 아침에 눈을 뜨면 한숨으로 시작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아침에 눈을 뜨면 설레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오늘은 또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직도 가끔은 우울하고, 아직도 가끔은 어린시절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밤새 울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만 살고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나의 백두대간 종주는 무척이나 성공적이다.




살고 싶지 않은 인생에서

살고 싶은 인생으로의 전환,

그 중심점에 백두대간이 있었다.




아침부터 햇볕이 쨍쨍하던 날씨는 소백의 초지능선과 푸른하늘 아래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나의 기분은 더할 나위없이 상쾌했다. 비록 나의 백두대간 종주를 축하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 아름다운 자연이 나에게 축포를 쏘아올려 주는 것 같다.





그런데 어쩌다가,
능선의 남쪽 비탈에 있는
엎드린 나무를 보게 되었을까.





예쁘고 반짝거리는 것이 가득한 이 곳에서

어쩌다 홀로 엎드려 자라는 나무를 보게 되었을까.




주목관리소에서 비로봉으로 향하는 걸음. 백두대간 종주의 완주를 향한 마지막 걸음. 고작 10분도 안되는 그 짧은 걸음에서 나는 그만, 깍아지른 경사의 남쪽능선에서 위태롭게 자라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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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엔 칼바람이 자주 분다. 특히나 겨울이면 폭설과 함께 손가락이 잘릴 듯한 칼바람이 주능을 타고 휘몰아친다.




저 나무의 씨앗은

어쩌다가 저런 험한 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까.




나무도 이토록 험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옥한 황토가 있고 적당한 햇빛과 선선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곳, 주위에 다른 나무 친구들도 많고 나무의 암수를 맺어줄 벌나비와 숲속 동물 친구들도 있는 곳, 그래서 외롭지 않고 그래서 힘들지 않은,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위로 옆으로 쭉쭉 자랄 수 있는, 그런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무시로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곳, 그래서 아무리 애를 써도 똑바로 자랄 수 없는 곳, 아무리 애를 써도 올곧게 자랄 수 없는데 도와주고 의지해 줄 친구 하나 없는 곳, 그런 곳에 저 나무의 씨앗이 떨어진 것은 그도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 운명이었을 것이다.




나무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안에서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칼바람을 맞고 맞다가

등을 구부리고 엎드린 자세로

힘겹게 자라고 있었다.




저 나무가 예쁘지 않다고 돌을 던질 이 누가 있는가. 저 나무가 올곧지 않다고 돌을 던질 이 누가 있는가. 저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돌을 던질 이 누가 있는가. 하지만 세상은 기어이 돌을 던지고 만다. 그가 자라온 환경은 봐주지 않고 현재의 모습만 보며 손가락질을 하고야 만다.




현재의 삶에 버려지듯 태어나,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그토록 노력했는데, 산비탈에서 싹이 터 똑바로 서 있는 것 조차 힘든데, 무시로 부는 칼바람은 그를 무릎 꿇리고 그의 등을 굽게 만들었다.




그는 잘못한 것도 없이

세상 모든 것에 무릎을 꿇고

이 바람이 멎게 해달라고 빌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를 탓하기만 한다.




"네가 더 노력을 했어야지. 네가 예쁘지 않고, 네가 올곧지 않고, 네가 결실을 맺지 못하는 건, 너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이 따뜻한 봄날, 초지 위에서 숨을 돌리며 이제 막 겨울의 칼바람에서 벗어난 그를 향해 비난을 퍼붓는다.


"도대체 뭐가 힘들다고 엄살이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저 나무보다
더 처절한 삶을

살아본 적이 있는가.






평지에서 태어난 사람은

비탈에서 태어난 나무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하늬바람의 상쾌함만 아는 사람은

칼바람의 공포가 뼈에 새겨진

나무의 한을 느끼지 못한다.




나의 잣대로 상대를 봐선 안 된다.

세상의 기준대로 상대를 재면 안 된다.

현재의 상황만 보고 상대를 폄하해선 안 된다.




그가 헛간에서 태어나

들개와 밥을 나눠먹고

삶에 이뤄낸 것 하나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할지언지





우리에게
그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날씨만큼이나 상쾌하던 기분이 삽시간에 우울해져 버렸다. 저 나무가 꼭 나와 같아서... 저 나무가 꼭 나와 같아서... 그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고 싶었다. 너무나 비탈진 곳에서 위태롭게 자라고 있어서 서로 의지조차 못하는 현실이 더욱 서러웠다.




나도 그랬을까? 너무나 위태로워서 누구도 감히 다가올 수 없었을까? 저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나처럼, 과거의 누군가도 나를 바라보며 멀리서나마 위로하고 응원해 준 적이 있었을까?




주목관리소에서 비로봉까지

10분도 안되는 그 짧은 거리에서

반짝이는 햇살처럼 웃고 있던 나는




어느새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오후 3시 30분.

비로봉에 도착했다.

눈물을 흘리며 도착했다.




길고 길었던 나의 백두대간 종주가

드디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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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머리 위로 마지막 일곱번째 보석이 '팡' 나타난다. 도의 경계를 지날때마다 하나씩 획득했던 보석을 마지막 7개까지 모두 모았다. 마지막으로 획득한 7번째 보석은 나머지 여섯 개의 보석보다 훨씬 크고 강렬하게 반짝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떨군다. 7개의 보석으로 내가 무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보석은 얻었지만 그 보석을 사용하는 방법은 아직도 모른다. 그냥 반짝여서 좋았고 그래서 갖고싶었을 뿐이다.




완주의 희열은 없었다.

벅찬 감동도 없었다.




무척이나 차분했고

꽤 많이 우울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2구간

진행 구간 : 죽령(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제2연화봉-연화봉-제1연화봉-주목관리소-소백산 비로봉(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6월 21일 / 목요일

SE-03558232-2a89-4d4e-9be7-313176bb0643.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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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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