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끝내 이루지 못한 꿈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소백산의 비로봉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 본다. 하루 종일 햇볕 쨍쨍하던 날씨는 비로봉에 닿기 직전 갑자기 흐려지더니, 영주에서 몰려온 구름이 삽시간에 정상을 에워쌌다. 세상이 훤히 내려다보이던 봉우리가 나와 정상석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바뀌는 데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산의 풍경이

지금의 내 기분과 같구나.




백두대간 종주를 하며 나도 반쯤 산신령이 되어버린 것일까? 나의 기분에 따라 산의 풍경이 변하는 것 같다. 수시로 바뀌는 변화무쌍한 산의 날씨를 닮아 내 마음도 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 마음 때문에 산의 날씨가 변하는 것일까?




국립공원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사람 하나 없다. 어제의 도솔봉에는 그렇게나 많은 산악회 회원들이 있더니, 주능선을 지나 온 오늘은 단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평일이라도 국립공원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제법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사람 하나 없을 수 있을까. 신기하다.




아무도 없는 소백산에서 홀로 구름에 갇혔다.

한참 앉아 있었지만 구름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걷히길 포기하고

다시 배낭을 멘다.

오늘은 국방봉에서 자야지.




아름답게 반짝이던 소백의 초지능선은 구름에 갇혀 발치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감상도 없이 묵묵히 걷기만 한다. 내 안에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후 5시. 국망봉에 도착했다.

국망봉의 바위봉우리 뒤편에 백두대간의 마지막 집을 짓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람은 차갑고 바람 따라 구름도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 이른 저녁을 먹고 텐트에 앉아 일기를 쓴다. 오늘은 백두대간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이면 하산해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 이후부터는 무엇을 해야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 오늘이 영영 지나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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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질락말락 하는 시간

텐트가 어둠에 반쯤 잠긴 시간




갑자기 밖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




텐트를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배낭도 없이 카메라만 든 부부가 국망봉의 바위 봉우리 위에서 나의 텐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쪽에서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넨다.




"네. 안녕하세요.

배낭도 없이 여길 오신 거에요?"




"아니요. 저희는 저기 바로 옆 풀밭에 텐트를 쳤어요. 구름이 멋있어서 사진 찍으러 잠깐 들른 거에요. 그런데... 혼자세요?"




"네."




"아이고, 젊은 여자분이 혼자서.

무섭지 않으세요?"




"무섭지는 않아요. 그런데 좀 쓸쓸하긴 하네요.

저 오늘이 백두대간 종주 마지막 날이거든요.

마지막 날 되고 보니 쓸쓸하고 서운하고... 그래요."




"백두대간 마지막 날이요?"




"네. 작년 가을에 진부령에서 남진으로 여기까지 내려왔다가 겨울에 잠시 쉬고, 올 봄에 지리산에서 북진으로 다시 대간을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저에게는 여기가 마지막 코스에요. 좀 특이하죠?"




"혹시,

파란운동화님?"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의 블로그 닉네임이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어?"




"맞죠? 파란운동화님 맞죠?"




"네에..."




"우와! 정말 반가워요. 정말 만나뵙고 싶었어요. 어쩜 여기서 이렇게 딱 만나죠? 혼자서 비박하며 백두대간 종주하는 모습이 넘 멋있고 부러웠어요. 남자인 저도 못하는 걸 젊은 아가씨가 혼자서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옆에서 아내분도 맞장구를 친다.




"이사람 여기 오는 내내 저한테 파란운동화님 얘기만 했어요. 아가씨 혼자서 백두대간 종주하는데 멋있고 부럽고 대단하다고요. 자기, 소원성취했네. 하루종일 이 아가씨 얘기만 하더니 어쩜 여기서 딱 만나지? 진짜 신기하다. 사인 받아야 하는 거 아냐? 하하하"




홀로 쓸쓸히 대간종주를 마무리 할 나를 가엾이 여겨 산신령이 이 분들을 보내주신 모양이다. 부부와 나란히 서서 소백의 능선을 빠르게 넘나드는 구름을 바라본다. 저 구름처럼 나도 빨리 나이를 넘어가고 싶다. 빨리 중년이 되고 빨리 노년이 되어 삶의 힘겨움을 모두 벗어내고 싶다.




백두대간에서 만난 중년의 부부들은 하나같이 여유로워 보였다. 그들은 젊은 나를 부러워 했지만 나는 언제나 그 사람들이 부러웠다. 배우자가 있고, 그 배우자와 손을 잡고 등산을 한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고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느긋해 보인다.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저런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까? 이미 많은 것을 이뤄 낸 평범한 사람들이 언제나 부러웠다.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자 부부와 인사를 하고 각자 텐트로 흩어졌다. 그 분들 덕분에 외롭고 쓸쓸하던 마음이 조금은 달래졌다. 덕분에 울적하지 않게 잠들 수 있었다.




다음날은 알람도 맞춰두지 않고 늦게까지 잤다. 오늘은 마지막 하산만 남은 상태다. 서두를 것도 없고 서두르고 싶지도 않다. 텐트를 열고 밖을 내다본다. 어제 저녁처럼 여전히 구름 속이었다. 어제 저녁처럼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아침을 대충 먹고 상월봉을 지나 늦은맥이재에서 을전으로 하산 한다. 작년 겨울 이곳을 찾았을 때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곳이 늦은맥이재에서 상월봉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높이 쌓인 눈밭 위 낮게 드리운 철쭉 터널을 지나며 무릎이 꿇어야 했었다. 납짝 엎드리고도 지나가기 어려웠던 곳이 도대체 어디였는지 모를 정도로 이곳의 철쭉은 높이가 높다. 같은 길인데도 겨울과 여름의 풍경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늦은맥이재에서 을전방향으로 내려서자 원시림의 숲이 나타난다. 이쪽으로 다니는 등산객들이 많지 않은 듯, 잘 정비된 국립공원의 느낌이 아닌 자연 그대로 보존된 원시림의 느낌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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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 마음이 왜 이런 것일까.




종주를 끝내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다. 숙제처럼 남겨진 백두대간 때문에 미뤄두고 못 한 일도 많았고, 시간이 없어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대간 종주가 빨리 끝나길 소원했었다. 대간 종주가 끝나면 기쁘고 성취감이 느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성취감은 커녕

산을 벗어날수록 점점 슬픈마음만 커져간다.




끝끝내 엄마를 만나지 못했다.




영혼의 모습으로도 만나지 못했고

꿈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엄마는 이미 이 세상을 완벽하게 떠난 것일까?

엄마는 이미 나를 완벽하게 잊은 것일까?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인적 없는 계곡에서 몸을 씻어내며 서럽도록 울었다. 엄마를 꼭 만나고 싶었다. 다른 것은 다 필요없었다. 겨울 눈길을 홀로 헤치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암릉의 로프에 매달려 그 고생을 하고도 백두대간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엄마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엄마에게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왜 나를 만나주지 않는 것일까?

아직도 나의 노력이 부족한 것일까?

나에게 엄마의 존재가 있기는 했던 것일까?




이십대 후반의 어느 날이었다. 사촌동생과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 그쪽 동네로 갔다. 사촌동생은 조금 늦을 것 같으니 집에 들어가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아무도 없는 친척집에 앉아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tv를 켰다. 토크쇼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날의 주제는 '어머니' 였고, 평소에 명언 쏟아내길 좋아하던 진행자가 얘기한다.




"왜 이런 말이 있잖아요.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 고요."




프로그램의 모든 출연자들은 그 말에 깊이 공감하며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다. 모두가 공감하던 그 말이 나에겐 비수가 되어 날아 꽂혔다.





그렇다면 나는

신도 없는 세상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 날 이후로 가슴이 더욱 아렸다. 나의 세상에는 엄마도 없고 신도 없었다. 나를 품어주고 감싸줄 존재가 아무도 없었고, 그러니 나는 내 삶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어린시절보다 더욱 강력하게 나를 눌러대고 있었다.




단 한번

딱 한번이라도

엄마를 만나고 싶었다.




맹목적으로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나에게도 존재했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엄마를 통해

내 삶의 이유를 알고 싶었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싶었다.




이 산을 벗어나면

엄마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정말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직도 엄마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이 길이 끝나는 것이 서러워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엄마가 야속해서,




울고 또 울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2구간

진행 구간 : 소백산 비로봉(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국망봉 비박-상월봉-늦은맥이재-을전으로 하산(충북 단양군)

진행 날짜 : 2012년 6월 21일~22일 / 목~금요일

SE-56c52b42-6680-457d-9e7d-23c2e71543aa.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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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긴 이야기의 마지막회가 연재됩니다~^^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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