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혼자서 등산할때 가장 무서운 것은

by 파란동화


10월 중순을 넘어가는 가을인데도 낮에 그렇게나 덥더니 밤에도 제법 따뜻했다. 저녁잠이 들었다가 한시간 만에 깨어버렸는데 밤하늘의 별이 정말 정말 예뻐서 배고픔마저 잊혀질 정도였다.



그렇게 넓은 공터의 신선목이에서 포근하게 잘 잤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포근한 밤이었다. 새벽에 몇 번 깨지도 않고 잘 잤지만 그렇다고 춥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어제나 그제보다는 따뜻했다는 뜻이다.



아침 6시 20분쯤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누운채로 텐트 입구를 열어서 하늘을 봤더니 또 기분이 무지하게 좋아졌다. 하늘 위로 보이는 나무들에게 아침인사를 했다.



"안녕? 잘 잤니?

나도 잘 잤어. 너희들 덕분에 정말 잘 잤어.

밤동안 보살펴줘서 고마워~"



오늘은 '주5일 등산제'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이다. 그래서 오늘의 일정은 오대산의 동대산을 찍고 진고개로 내려갔다가 진고개휴게소에서 배터지게 밥을 먹고, 다시 건너편 대간길인 노인봉을 올라 청학동 소금강으로 하산해서, 강릉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것이다.



진고개에서 노인봉을 오르면 그 곳에서 소황병산으로 가야 제대로 된 백두대간이지만 강릉의 '청학동 소금강' 이 절경이라는 소문을 진즉부터 들은터라 그곳을 꼭 가보고 싶었다. 소금강은 '작은 금강' 이라는 뜻이다. 금강산을 압축해놓은 아름다움 이라는 뜻으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소금 강' 이 아니라 '小 금강', 강이 아닌 계곡이다.



하지만 오늘은 비 예보가 있었다. 제발 비가 오후 늦게부터 내려야 할 터인데, 비가 예상보다 일찍 내린다면 소금강계곡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제 남겨놓은 200ml의 물로 핫초코를 끓여 몸을 데웠다. 핫초코를 끓이는데 100ml를 썼고, 이제 딱 100ml가 남았다. 여기서부터 휴게소가 있는 진고개까지는 그야말로 지척이니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텐트를 걷어 배낭을 챙기고 종주를 시작하기 직전에 남겨두었던 땅콩캬라멜 2개를 한꺼번에 먹어버렸다. 진고개 휴게소에 도착하기 전에 동대산을 지나게 되어있는데, 오대산의 동대산은 나름 유명한 곳이고 여기는 국립공원이니까 동대산에 도착하면 등산객 두어팀 정도는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어제처럼 아무말도 못하고

사람들을 지나치는 일은 없어야지.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꼭 간식과 물을 부탁드려야지.

그래, 동대산까지만 힘을 내보자!



그런데 제길! 출발한지 10분도 안되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출발하자마자 오르막이길래 땀이 나서 껴입었던 옷을 벗기 위해 배낭을 잠시 내려놓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행동을 멈추고 감각을 곤두세웠더니 제길... 비가 한두방울씩 툭툭 떨어지는 것이다.



아! 비가 왜 이렇게 일찍 와?



나는 부랴부라 레인커버를 꺼내 배낭을 씌우고 우비를 꺼내 입었다. 안그래도 먹은 게 없어서 기운이 딸리는데 비까지 내리니 몸은 으슬으슬 떨리고 속도는 점점 쳐졌다. 나는 거북이 기어가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자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밤사이 비가 내렸다면 아침부터 빗 속에서 텐트를 걷고 배낭을 싸야 했을텐데, 그러자면 나의 몸은 물론이고 배낭 속까지 모두 비에 젖었을 것이었다. 그래도 새벽이 아닌 이 아침에, 내가 배낭을 모두 챙기고 걸음을 옮기고 난 이후에, 비가 내린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등산이라는 불편한 일상을 시작한 이후로 '그래도 다행' 이라는 생각이 내 안에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도시의 사회생활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을 땐 '그래도 다행' 이라는 생각이 점점 사라져 어느샌가 내 안에는 '왜 또 이런 일이?' '뭘해도 안되는 인생' 이라는 생각만 가득 차있었다.



도시에 있던 나의 관점이라면

'오후에 예보된 비가 왜 아침부터 내리고 지랄이야. 아 진짜 되는게 하나도 없네' 였을 것이었다.



'비가 일찍 왔지만 그래도 배낭을 모두 챙긴 이후에 내려 다행이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만으로도,

나의 백두대간 종주는 이미 '성공' 이었다.



배는 고팠지만 밤하늘의 별을 보아 다행이었고

목은 말랐지만 새벽 잠자리가 포근해서 다행이었고

지도에 표시된 식수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지만

물을 가진 산객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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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차돌백이' 라고 표기된 곳에 도착하자 커다랗고 하얀 바윗덩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모래가 열과 압력을 받아 형성된 바위인데 그 표면이 매끄러운 것을 '규암' 이라고 한단다. '차돌백이' 이정표를 지나자 커다랗고 하얀 바위들이 계속 나타났다. 이렇게 하얀 바위는 본 적이 없었다. 신기하고 재밌다.



비가 내려 어둡고 축축한 산길에서 하얀 바위는 더욱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배고프고 지치고 다리는 천근만근인데 또 웃음이 났다. 차돌백이 근처에는 A4용지 크기보다 약간 큰 규암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만약 백두대간 종주 중이 아니고 나의 배낭이 가벼웠다면 규암 하나를 몰래 주워오고 싶을 정도였다.



오대산엔 정말정말 신기하고 특이한 나무가 많았다. 이 나무들이 모두 주목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늘로 곧게 뻗은 나무들보다 가지가 다양하게 구부러지고 휘어진 나무들이 더 많았다. 오대산은 '나무 전시장' 같았다.



아주 커다란 나무 하나가 아주 커다란 가지 하나를 수평으로 쭉 뻗고 있는데, 그 가운데가 높은 아치형으로 구부러져 그 아래로 등산로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아치형으로 구부러진 커다란 나무 아래를 지나가야 했는데, 성인 남자들도 고개를 숙일 필요 없을 만큼 높이가 상당했다. 나무가 사람들 지나가라고 힘들게 팔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자연이 만들어낸 문' 을 통과할 때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문을 통과한 순간 상상도 못할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분명 같은 길이지만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는 다른 공간 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나무에 갖다 대었다.



문 이후에 있는 나는
문 이전에 있던 나와
다른 사람이 된다.



자연이 인간에게 허락한 범위를

한 단계 넘어선 사람이 되며



그렇게

자연의 심장이

나의 심장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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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통과한 후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자연이 내게 하려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자연이 나를 안아주는 품이 느껴진다.



오대산에서는 이런 '자연의 문' 을

제법 만날 수 있었다.



얼마 후 동대산에 도착했다. 동대산 역시 두로봉처럼 헬기장으로 만들어진 곳에 '동대산'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오대산에는 특이한 나무만큼이나 헬기장이 많았다. 어제 오늘 이틀동안 만난 헬기장만 7~8개 였다.



동대산에 도착하면 분명 지나가는 산객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날씨 때문인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주린 배를 잡고 다시 길을 이어간다. 동대산 이후로는 계속해서 내리막이 이어지는데 내려갈수록 경사가 더욱 심해졌다.



내리는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지고 텅 빈 위장은 점점 요동쳤다. 동대산을 지나면서부터는 거세지는 빗줄기와 경사가 심해지는 내리막 때문에 정말이지 발끝만 쳐다보며 걸어야 했다. 일초라도 빨리 진고개에 닿기 위해 미친듯이 걸었다. 주변 풍경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발끝만 보며 걸었다.



그랬는데... 등산로에 세워진 이정표는 내가 지나온 길 보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더 많이 남아있음을 알려주었다.



이웃들의 블로그를 보면 혼자서 백두대간 종주를 할 때 '가장 무서운 것' 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살인적인 배낭무게' 가 제일 무섭다하고

어떤 사람은 '밤의 추위' 가 가장 무섭다하고

어떤 사람은 '물과 식량이 떨어지는 것'

가장 무섭다고 한다.



흔히들 생각하는 산짐승의 공격이나 산비탈에서의 추락이나, 홀로 종주하는 여자의 경우 깊은 산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게 되는 것 등을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 것들도 걱정되긴 하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아무래도 '늘, 자주, 맞닥뜨리는 것' 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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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나는 산에서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고 있을 때' 가 가장 무서웠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치즈처럼 쭉쭉 늘어나서 아무리 가도 가도 목적지가 나타나지 않을 때, 여기가 거기같고 거기가 거기같아서 왠지 계속 같은 길을 맴돌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질 때, 길 위에 갇혀 벗어나지도 멈추지도 못하고 그저 계속 걷기만 해야 할 때, 그럴 때가 가장 무서웠다.



그런 느낌은 길을 잃고 체력도 떨어져가는데 해가 져서 어둠과 추위가 한꺼번에 몰려올 때 찾아오곤 했다. 멘탈이 붕괴되며 거친숨을 몰아쉬다보면 내 숨소리에 내가 놀라 화들짝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어떤 거친 남자의 숨소리가 귓가에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1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신선목이 비박 (강원도 평창과 강릉의 경계) - 차돌백이 - 동대산 - 진고개 (강원도 평창과 강릉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14일 / 금요일

episode21.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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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수요일은 쉬고

목요일에 다시 찾아뵐게요~ ^^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