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노인봉대피소에서 노인봉 정상까지는 딱 10분이 걸렸다. 지금껏 올라온 소금강계곡이 절경이긴 했지만 산의 허리 아래 있는 계곡 특성상 탁 트인 조망은 없었다. 그 아쉬움을 채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노인봉 정상이었다. 정상석이 있는 봉우리에서 오대산의 사방팔방이 다 내려다보였다.
이야아아아~~~
조망 끝내준다!!!
주변 모든 세상이 거칠것 없이 발 아래 펼쳐져 있었다. 노인봉 정상에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다가 다시 대피소로 내려왔다. '노인봉 대피소'는 무인대피소다. 그러니 상주하는 국립공원 직원들이 없다. 하지만 문은 잠겨있지 않아서 지나는 산객들이 그곳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나같은 대간러들은 하룻밤 잠을 청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국립공원 내에서의 비박 및 취침은 모두 불법이었다. 직원들이 상주하여 정식으로 투숙객을 받는 대피소에서의 취침이 아니고서는 모두가 불법행위로 간주되어 적발되면 벌금형에 처해진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백두대간에 대해 검색해보니 다들 노인봉대피소에서 하룻밤 자고 길을 이어간다기에 그것이 불법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따라했다가 뒷통수를 맞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노인봉대피소는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실내가 무척이나 더러웠다. 심지어 침상으로 사용해야 할 나무바닥도 더러워서 그냥 대피소 밖에서 텐트 치고 잘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소금강 계곡을 오르는 내내 햇볕쨍쨍 한여름 같던 날씨가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바람을 몰고왔다. 산에서의 가을 날씨는 항상 이모양인 모양이다. 낮에는 여름처럼 덥고 밤이면 바람이 불며 장소를 잘 못 정하면 한겨울 추위까지 느껴진다.
나는 대피소의 더러운 나무바닥에 텐트를 깔고 자기로 했다. 텐트를 설치하는 것이 아닌 텐트원단만 깔고 자는 것이다. 그 위에 취침용 매트와 새로 산 침낭을 펼쳤다. 큰 맘 먹고 새로 구입한 침낭이니 첫날부터 더러워지면 안된다.
새로 산 침낭에 몸을 누이니
아아아!!! 포근해라~~~
그래도 역시 밖보다는 안이 낫구나!!!
침낭이 넘 포근하고 따뜻해서 절로 행복미소가 지어졌다. 밤이면 밤마다 있는 옷을 다 껴입고 잠을 청해야 했는데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 얇은 등산복만 입고 다른 것은 걸치지 않았는데도 침낭 안에 누워있는 등에 온기가 전해졌다.
이거지! 이거야~
그래 이거야!
이 정도는 되어야
가을이나 겨울에도
비박할 맛이 나지!!
나는 침낭으로 몸을 휘감고 일기를 썼다. 그리고 일찍 잠을 청했다. 내일 노인봉 정상에서 일출을 보려면 일찍 자야했다.
다음날 알람소리에 눈을 떠 침낭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보니 으으으~~~ 너무나 추웠다! 밤 사이 대피소에서 잘 잤지만 침낭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는 못하고 잤다. 이 날은 올해 들어 처음으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날이었다.
침낭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던 나는 다시 침낭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일출은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으니 오늘은 좀 더 자자. 나름 실내에서 잤는데도 밤새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았다. 나는 30분 정도 더 자고 일어나 아침을 챙겨먹었다.
지금은 무인대피소가 된 노인봉대피소지만 과거에는 이곳에도 상주하는 직원이 있고 정식으로 투숙객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침상도 있고 음수대도 있었다. 계속해서 물이 흘러나오는 음수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같은 대간러들에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오늘의 대간을 시작하기 전에 물병을 가득 가득 채웠다. 지난주 대간으로 내가 뼛 속 깊이 깨달은 것은
할 수 있을 때 하라!
였다. 물을 채울 수 있을 때 채워야 하고, 밥을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하며, 씻을 수 있는 약간의 여지만 생기면 고민말고 씻어야 한다.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쉬어야 하고, 텐트를 칠 공간이 있으면 거기서 반드시 멈춰야 한다. 조금만 더 가서 할까? 아직 여유가 있으니 조금만 더 가보자, 라고 했다간 큰 코 다친다. 산에서의 일상이란 그렇다.
'다음' 이란 없다!
'조금' 더 가서 하려고 했다가
'저 세상' 문턱까지 가는 수가 있다.
노인봉에서 소황병산을 지나 매봉까지 연결되는 대간길은 통제구간이었다. 이 사실은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통제구간이라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백두대간 지도에는 그것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업데이트가 늦어도 한참 늦은 지도다. 지도 없이는 대간을 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지만 지도만 믿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통제구간도 거침없이 이어가기로 한다.
통제구간을 한번 겪어보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침 일찍 혹은 오후 늦게 통제구간을 지나면 국립공원 직원과 마주칠 일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통제구간을 모두 건너뛰면 백두대간의 1/3 이상을 놓쳐버리는 것이 된다. 백두대간은 시작점부터 끝점까지 6개의 국립공원을 지나는데 그 때마다 통제구간을 몇번이나 만나게 된다. 하나의 국립공원 안에서도 통제구간과 개방구간이 핑퐁으로 섞여있어서 통제구간을 모두 건너뛰는 것이 오히려 더욱 어려운 일이다.
노인봉대피소에 소황병산으로 가는 길을 몰라 헷갈렸는데 '여기서부터는 통제구간입니다' 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지난주 마딱뜨린 통제표지판과 같은 것이었다.
아하! 알겠다.
'통제구간 안내' 표지판 바로 뒤가 백두대간 등산로겠구나! 울타리를 넘어 표지판 뒤로 가보니 역시나 예상대로 선명한 등산로가 나에게 길을 안내한다. 산객들을 막으려던 통제 표지판이 오히려 산객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처음으로 영하로 떨어진 데다 이젠 제법 가을이 깊어져 산 정상부에는 정말로 볼 것이 없었다. 알록달록 색을 뽐내던 단풍은 모두 떨어지고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외롭게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외롭고 스산한
늦가을의 느낌
그게 다다. 높은 산의 정상부는 이 계절에 오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떨어진 낙엽이 얼마나 높게 쌓였는지 발이 푹푹 빠질 정도였다.
처음엔 낙엽 아래 무엇이 있을지 몰라 약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계속 걷다보니 낙엽에 발이 푹푹 빠지는 길도 제법 낭만적이었다. 마른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흙이 보이는 곳에는 곳곳에 얼음이 얼어있었다. 오늘이 춥긴 추운 날이구나.
그러다가 갑자기!
너무나 쌩뚱맞게!
시야가 확- 트였다!
소황병산에 도착한 것이다.
우와~~~ 소황병산은 엄청나게 넓은 목초지였다. 목초지의 풀은 다 베어져있었고 누워서 데굴데굴 구르고 싶을 정도로 부드럽게 느껴지는 초지가 엄청나게 넓게 펼쳐져 있었다. 감히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 멀리 원두막이 보였다. 아무도 없는 초원의 원두막에서 이 풍경과 이 낭만을 만끽하고 싶어서, 백두대간 등산로와 진행방향이 다른데도 원두막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원두막에 가까워질수록 원두막이 더욱 작게 느껴졌다. 멀리서 커 보이던 원두막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작아지는 형국이라니.
가까이서 본 원두막은 원두막이 아니라
그저 표지판. ㅋㅋㅋㅋㅋ 아 ㅋㅋㅋㅋㅋ 제대로 낚였다! ㅋㅋㅋㅋㅋ 난 정말이지 원두막인줄 알고 저기 멀리서부터 여기까지 목초지를 가로질러 온 것이다. ㅎㅎㅎㅎㅎ
원두막은 없었지만 거기서 건진 것이 하나 있었다. 근처에 넓다란 표석이 있기에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그것은 '삼양식품' 에서 만들어놓은 표석이었다.
앗! 삼양식품?
다시 백두대간 지도를 펼쳐보았다. 소황병산에서 매봉을 거쳐 곤신봉을 지나 선자령에 닿을 때 까지 '삼양축산대관령목장' 이 근처에 있다고 표기되어 있었다. 나는 그저 '그 유명한 대관령 목장이 백두대간 근처에 있나보다' 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대관령 목장이 백두대간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관령 목장이 곧 백두대간 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소황병산에서부터 선자령 직전까지 계속 계속 이 아름다운 목초지를 따라가는 것이 곧 대간을 타는 것이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0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오대산 노인봉 (강원도 강릉과 평창의 경계) - 노인봉 대피소 - 소황병산 (강원도 강릉과 평창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18일 / 화요일
내일 수요일은 쉬고
목요일에 다시 찾아뵐게요~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