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토록 쉽고 편한 길, 이토록 쉽고 편한 인생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오! 맙소사!!!

설악산의 공룡능선과

구룡령에서 한눈에 내려다 보인 국도의 경치와

줄줄이 이어진 단풍의 향연만으로도




나는 이미 대한민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모두 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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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내 앞에 나타난

목장을 품은 소황병산은

나를 또다른 아름다움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오! 맙소사!!!
이런 길이라니!
이런 길이 백두대간이라니!!

내가 너를 알게 된 것은
진정한 행운이었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물결처럼 아름다운 목초지를 꿈결처럼 걷다보면 어느덧 눈 앞에 대관령의 풍력발전기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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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의 사진으로만 봤던 그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 이상 길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죽치고 앉아 해가 지길 기다렸다가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길 잘했다. 이후로도 풍력발전기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으니까.




'동해 전망대' 라는 곳에 도착하자 관광객들이 제법 많았다. 어디서부터 올라오는 것인지 모를 삼양축산의 셔틀버스가 이곳 전망대에 관광객들을 뿌려놓고 갔다. 관광객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국인들 이었다.




관광객들은 '바람의 언덕' 이라는 예쁜 데크길 산책로를 걸었고, 나는 바람의 언덕과 나란히 가는 임도(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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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발전기는 선자령까지 계속 이어졌고, 선자령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백두대간 선자령'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대관령까지 가서 비박을 하려고 속력에 박차를 가했다.




한참 내려가다보니 동해바다 쪽으로 아주 좋은 전망데크가 설치되어 있었고, 때마침 오늘의 태양은 서쪽의 산 능선에 걸려있었다.




오케이! 오늘은 여기서 자자!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고

잘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나면

지체없이 거기서 멈춰야 한다.




'조금' 더 가려고 했다가

'다음날 아침' 까지 걷는 수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것이 백두대간이다.




역시나 거기서 멈춘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원래의 비박지로 예상했던 '대관령'은 그냥 시골의 작은 국도도 아닌 '고속국도' 가 관통하는 곳이었다. 차가 쌩쌩 지나가는 고속국도에서 비박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데크에는 텐트팩을 박을 수 없어서 데크전망대 맞은편 흙길에 텐트를 쳤다. 그리고 데크에 앉아 동해바다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저녁을 먹었다. 밤이라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고 바닷가마을의 야경만 보였다. 백두대간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저녁을 먹는다는 사실이 또다시 나를 무척이나 흐뭇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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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을 보다가 텐트로 들어가 누우니 하늘에선 별이 쏟아진다. 저 바다가 동해바다니까, 어쩌면 내일 아침은 텐트에 누워서 일출을 볼 수도 있겠다!




오늘은 왠지 최고의 명당에 비박을 정한 것 같았다. 드넓은 초원 옆 동해바다가 있는 곳. 하늘에선 별이 쏟아지고 땅에서도 별들이 반짝이는 곳. 바람 한점 없이 가을밤은 시원하고 등은 따뜻했다.




아아...

이런 곳에서 잠 들 수 있다니...

아아... 진정 축복이구나!




다음날, 6시 20분에 눈을 떴다.

텐트를 열고 고개를 삐죽 내밀었더니 전망데크 너머로 새벽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우왓-!!!




텐트에 누운 자세로는 데크의 울타리 난간 때문에 동해바다가 가려져 속 시원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10여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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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앗-!!!!
일출이다앗-!!!




날씨가 너무나도 맑아 정말이지 깨끗하고 예쁜 일출이 연출되고 있었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본 일출의 태양은 나의 새끼손톱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는데, 이곳 선자령에서 바라보는 태양은 500원짜리 동전만큼이나 크게 느껴졌다.




일생동안 일출이라는 것을 볼 일 없이 살다가 백두대간에서 보름만에 또 이렇게나 감격스러운 일출을 보게 되다니! 백두대간은 정말이지 내 인생에 선물과도 같구나!




일출은 언제봐도 장관이었다.

매일 일출을 보며 살게 되더라도

절대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날이 밝으니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내가 잠을 청하고 일출을 맞이한 전망대는 대관령과 선자령 사이, 정확히 중간에 위치한 곳이었다.




나는 아침을 지어 밥을 먹는 동안 데크에 텐트를 널어 말렸다. 비박을 함에 있어 데크란 정말이지 유용하고 편한 곳이다. 밥 먹기도 편하고 배낭을 풀고 싸기도 편하며 텐트와 침낭이 젖으면 그것을 넣어놓기에도 안성마춤이다.




오늘 새벽의 기온도 영하인 것인지, 텐트 안에 맺힌 나의 숨방울들이 죄다 얼어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잘 잤다. 역시 고가의 침낭이 돈 값을 하는구나!




이곳 전망대에서 가야할 방향으로 내려다보면 뭔가 굉장히 신기하게 생긴 구조물이 있는게 보였다. 새하얀 첨성대 같이 생긴 그것이 무엇일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래서 대간길을 약간 이탈하여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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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한국공항공사 강원항공 무선표지소' 라는 간판이 있었고 하얀 첨성대 말고도 건물이 몇 동 있었다. 어쩐지 새벽에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자주 그리고 참으로 가깝게 들렸었다. 이곳 대관령이 비행기가 지나가는 하늘길 바로 아래인 모양이었다.




비박지에서 국도가 있는 대관령까지는 계속 계속 완만한 내리막이었다. 대관령까지 편히 잘 내려왔는데 여기서부터 다음코스로 이어지는 길이 어디쯤인지 도저히 가늠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지척에 뭔가 초소같은 것이 있었다.




초소에는 군인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국도변을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그 군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저기,

능경봉과 고루포기산으로 가는 길이 어디에요?"




그러자 일병이 상병에게 묻는다.

"거기가 어딥니까?"




그러자 상병이 나에게 대답한다.

"글쎄요... 거기가... 어디지...?"




내가 다시 대답한다.

"아하하... 그냥 제가 알아서 찾아볼게요."




보초를 서듯 초소에 앉아 있는 군인들이 주변 지리를 전혀 모르자 어이가 없었다. 지리를 모르면서 어떻게 보초를 선다는 거지? 이른 아침이라 차가 거의 없는 '영동고속국도'를 건너 지도에 표시된 '고속도로 준공기념비'를 찾았다. 기념비 앞에 서니 오른쪽으로 등산로 입구가 보이고 그곳에 백두대간 선행자들의 리본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오! 여기구나!

다행히 금방 길을 찾았다.




능경봉 방향으로 조금 오르자 다시 임도가 나타나고 '능경봉과 고루포기산'의 등산로 안내표지판이 세워져 있는것이 보였다. 백두대간 지도에는 이 즈음에 '물' 표시가 있었고, 나는 이 쯤에서 물을 꼭 채워야 했다.




다시 등산로 안내표지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표지판에 위치한 '현위치'에 '영천약수'라는 글자도 함께 표시되어 있었다. 여기에 약수터가 있다는 말인가? 주변을 한바퀴 휘~ 둘러봤더니, 바로 등 뒤에서 약수가 콸콸콸 쏟아져 나오는게 보인다.




와~ 약수다 약수!!

이렇게나 수량이 풍부한 약수를 만나다니!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냅따 배낭을 내려놓고 물통을 꽉꽉 채웠다. 그리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얼른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나서 양치도 했다. 오늘이 백두대간을 이어간지 3일째여서 머리를 감아줄 필요가 있었다. 개운하게 씻고나서 다시 대간을 이어갔다.




능경봉으로 오르는 길에 아저씨 두 분을 만났다. 그분들은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쪼그만 망치로 등산로의 돌을 탁탁 두드려보고 있었다. 한사람은 돌을 두드리고 다른 한사람은 서류에 뭔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질조사를 하는 사람들 같았다. 백두대간을 타며 참으로 다양한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산 속을 돌아다니며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라니, 아 부럽다!




하루종일 산책 같던 어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오늘은 등산다운 등산을 했다. 능경봉에서 횡계치로 이어지는 곳의 돌계단은 그 빛깔이 참으로 밝았다. 돌계단의 색이 밝다못해 거의 하얗게 보여서 대리석 계단을 밟는 기분이었다. 아까 지질조사를 하는 사람까지 만난 것을 보면 이 곳의 돌이 보통 돌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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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계단도 많고 돌멩이도 많고, 돌멩이를 쌓아 올린 돌탑도 여느 산보다 많았다. 심지어 돌탑을 쌓으라고 친절하게 데크가 설치되어 있는 곳도 있었다.




우리나라 '돌탑'의 기원에 대해 설명한 안내표지판도 있었는데, 옛 조상님들은 산을 넘어 이동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마다 산길 정비도 하고 산에서의 안전을 기원하는 뜻에서 돌을 하나씩 주워 주변에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돌탑을 그저 '소원을 비는' 용도로만 생각했던 나는 조상님들의 지혜에 감탄이 나왔다. 돌을 하나씩 쌓아 산길정비도 하다니. 한사람당 고작 돌 하나임에도 그것들이 모이고 쌓여 안전한 등산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작은 힘이 모여

이렇게나 큰 산에

지워지지 않는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0~19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소황병산 (강원도 강릉과 평창의 경계) - 매봉 - 곤신봉 - 선자령 - 새봉 지나서 비박 - 대관령 - 능경봉 (강원도 강릉과 평창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18일 화요일 ~19일 수요일

episode26.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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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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