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능경봉과 횡계치를 지나 오르막을 깔딱깔딱 하고나면 시원한 전망데크가 나타난다. '대관령 전망대' 라는 안내판이 있고, 멀리 보이는 풍경으로 내가 어제 지나온 소황병산과 삼양목장, 선자령과 대관령이 한눈에 펼쳐보였다.
불과 어제 내가 지나온 곳이 이렇게나 멀게 느껴지니 신기할 따름이다. 보통의 산객들보다 훨씬 걸음이 느린데도 하룻만에 이렇게나 많은 곳을 이동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내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후로는 별다른 풍경이 없어서 그저 땅만 보며 걸었다. 낙엽도 다 지고 가지는 앙상하다. 단풍이나 초록 잎이 없어서 아쉬움은 있었지만 대신 대리석같은 계단이 나타났다. 아까보다 더 멋진 돌계단이 나선형으로 휘어져 있는데, 이것은 마치 폐허가 된 신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흔하디 흔한 등산로의 돌계단이
이렇게나 아름답고 고혹적일 수 있다니!
백두대간이 품은 매력은 도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고루포기산 정상을 찍은 후, 내리막과 내리막과 내리막을 다 내려오면 소나무군락지가 나타난다. 겨울 문턱의 빛깔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보다가 짙은 초록의 소나무를 만나니 또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소나무 사이로 건너다 보이는 산 능선의 여린나무들은 수채화의 풍경처럼 편안하고 아릿한 감정을 선사한다.
국도와 만나는 닭목령에서 물을 구하고 싶었지만 구하지 못하고 다음 코스인 화란봉으로 향했다. 닭목령에서 화란봉으로 오르는 길은 화려한 소나무를 많이 만날 수 있는 길이었다. 역시 계절이 깊어질수록 산에는 소나무가 있어야 산의 느낌이 산다.
화란봉에 도착했지만 딱히 야영할 공간이 없어서 10분쯤 더 걸어 소나무 아래 약간의 공터가 있는 곳에서 멈췄다.
지나온 고루포기산도 경사가 꽤 있고 힘들었는데, 비박을 하기 위해 올라온 이곳 화란봉도 결코 낮은 산이 아니었다. 국도까지 내려가는 대관령을 거쳐 고루포기산을 올랐다가 다시 국도와 만나는 닭목령까지 내려갔다가 이곳 화란봉까지 다시 치고올라오느라 오늘은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시간차를 두고 양갱 2개와 떡 2개를 먹었지만 계속 배가 고팠다. 다음번엔 행동식으로 프랑크쏘세지도 챙겨오리라 다짐했다. 힘들게 산행을 하고나면 단백질을 보충해줘야만 다시 힘이 나는 것 같았다.
해가 제법 짧아져 오후 5시 30분만 되어도 주변이 어두웠다. 헤드랜턴을 켜고 저녁밥을 먹은 후 코펠을 닦고 있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서 어느 짐승의 낮고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가까운 곳에서!
모르긴 몰라도 3m 이내였을 것이다.
나는 흠짓 놀라서 고개를 팟! 쳐들었다. 그랬더니 울음소리가 바뀌어 더 낮고 더 날카로운 소리가 그르릉 그르릉 들려왔다. 울음소리가 고양이와 비슷했지만 고양이보다 더 날카롭고 더 낮은 음이었다. 아마도 삵의 울음소리인 모양이다. 녀석은 나의 헤드랜턴 불빛에 놀란 모양이었다.
삵 (Leopard Cat)
고양이처럼 생겼으나 고양이보다 몸집이 크고 불분명한 반점이 많다. 입을 크게 벌릴 수 있고 머리는 둥글며, 턱의 근육이 발달하여 먹이나 다른 물건을 물어뜯는 힘이 매우 세다. 꼬리에는 고리모양의 가로띠가 있으며 눈 위 코로부터 이마 양쪽에 흰 무늬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삵은 산림지대의 계곡, 바위굴, 연안, 관목(비교적 키가 작은 나무)으로 덮인 산골짜기 개울가에서 주로 살며, 마을 근처에서 살기도 한다. 단독 또는 한 쌍으로 생활하며, 야행성이지만, 골짜기의 외진 곳에서는 낮에도 먹이를 찾아다닌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나는 너무나 놀라고 무서워서... 조용히 하던 일을 마저했다. 무서워도 별 수 있나. 하던 일은 마저 해야지. 녀석이 멧돼지나 늑대도 아니고 이유없이 먼저 사람을 공격할 리는 없으니 나는 그저 조용하고 차분하게, 더이상 녀석이 놀라지 않도록 부드러운 몸짓으로, 작게 움직이면서 내 할 일을 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무섭기는 정말 무서워서 텐트에 들어가자마자 입구를 닫아버렸다. 원래는 텐트에 들어가면 누워서 일기를 쓰는 동안 입구를 열어놓고 별도 보고 달도 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나뭇가지를 보기도 했는데, 오늘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일기를 거의 다 써 갈 즈음, 이번에는 두 놈이 싸우는지 어쨌는지 아주 죽는 소리가 났다.
격렬한 울음소리가 텐트를 찢을 듯 들려왔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황급히 랜턴을 끄고 침낭을 머리 끝까지 끌어당겼다. 그런데...
너무 더웠다! 침낭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으니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더운 것이다. 하아...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어서 침낭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텐트입구를 한 뼘 열어놓고 다시 잠을 청했다. 찬바람이 들어오니 그제야 숨이 자유롭게 쉬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뭔가 이상한 느낌이 서서히 잠을 걷어갔다.
뭐지.....? 이 이상한 느낌은.....?
나의 왼쪽 어깨를 무언가 푹신하고 커다란 덩어리가 지긋이 누르고 있는 느낌이, 잠 자던 나의 세포들을 깨우고 있었다. 텐트 밖에서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잠에 빠져있던 나의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사고와 생각들이 하나씩 잠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팟!
눈을 떴다.
순간, 열어놓은 텐트 구멍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삵과 눈이 마주쳤다. 발광체로 빛나는 삵의 눈동자에 잠식당할 것 같았다. 삵과 나의 얼굴은 불과 10cm도 떨어지지 않았다. 삵이 주둥이를 벌리고 달려들면 나의 면상은 죄다 뜯겨 나가리라.
으아아아아악!!!
극한의 공포에 다다르자 나의 비명은 뇌에서만 울릴 뿐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질러서라도 삵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무서워서 얼굴이 덜덜덜 떨렸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깜빡이는 것 밖에 없었다. 눈을 깜빡이고 두번 깜빡이고 세번 깜빡였더니 삵의 얼굴이 희미하게 사라졌다.
꿈이었던 것이다!
'꿈이었다' 는 것을 자각하기까지 한참이 걸렸고, 자각하고 나서도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삵은 사라졌는데 나의 왼쪽 어깨를 짓누르는 푹신한 엉덩이의 느낌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뭐지? 꿈이 아니었나? 진짜로 삵이 내 텐트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는 건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았다.
나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고 있던 녀석은...
다름 아닌
나의 커다란 배낭이었다.
아하하핳하하하하 그제야 실소가 흘러나왔다. 항상 어깨 근처에 놓아두던 배낭이 자는 동안 몸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배낭이 어깨를 누르자 초저녁에 들었던 삵의 울음소리가 무의식의 공포를 깨운 모양이다. 아 진짜 ㅎㅎㅎㅎㅎㅎ 뭐니 ㅎㅎㅎㅎㅎㅎㅎ 웃음이 나왔지만 사실은 아직도 무서웠다. 아직도 꿈의 기억이 생생했다.
간밤의 악몽 때문에 이후로 자다깨다를 계속 반복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일어났고, 일어났더니 아침 이슬 때문에 텐트가 안팎으로 다 젖어있었다. 안그래도 잠을 못자 몸이 천근만근인데, 텐트천에 젖어서 붙어있는 흙과 낙엽까지 떼어내려니 기분이 상당히 엿 같았다.
젠장!!!
대간 종주고 나발이고 이쯤에서 그만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젯밤은 너무 무서웠고 오늘 아침은 날씨부터 끝내주게 우울하다. 웃을 일이 하나도 없다. 이런 기분으로 꾸역꾸역 산에 있어봐야 뭐 좋을 일이 있겠는가 싶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세월아 내월아 텐트를 접었다.
오늘의 날씨에 걸맞게 이어지는 종주 코스도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능선이 지루하게 계속 이어졌고 낙엽이 다 떨어진 산풍경은 스산하기 그지 없었다.
심지어 하루 종일 걷는 동안 탁 트인 조망을 딱 두 번 만났을 정도로 사방은 꽉 막혀 있었다. 볼 것도 즐길것도 없이 사방이 시든 나무로 빽빽한 길만 걷다보니 정말이지 우울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구름은 낮게 깔리고 날은 너무도 흐렸다. 구름이 점점 내려와 나의 머리를 꽁꽁 묶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으으... 탈출하고 싶다...!
나는 울고싶은 기분을 달래며 걸었다. 국도를 만나는 삽답령에 닿으면 히치하이킹을 해서 백두대간을 벗어나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산을 탈출할 일만 생각하며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미치지 않으려면 일초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국도는 나타나지 않고 갑자기 임도가 나타났다. 뭐지? 여기가 삽답령이 아닌가? 내가 길을 잘 못 내려온 건가?
지도를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저 앞에 소풍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남자 둘 여자 둘, 중년의 커플들이 돗자리를 펴고 음식을 먹고 있었다. 사람 없는 곳에서 한적하게 소풍을 즐기던 그분들은 산에서 퐁 튀어나온 나를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저기요,
여기가 삽답령이 아닌가요?"
내가 길을 묻자
"맞아요.
이쪽으로 가면 바로 아래가 삽답령이에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휴우... 다행이다. 길을 잘못 내려온 것은 아니구나. 그런데 그때
"아가씨, 고기 좀 먹고 가~"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셨다.
고기 좀 먹고 가
고기 좀 먹고 가
고기 좀 먹고 가
아흑... 세상에...!
세상에 이보다 더 달콤한 말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아저씨의 권유가 떨어지기 무섭게
체면이고 뭐고 없이
예의상 사양이라는 미덕도 없이
"네! 감사합니다!!!"
하며 냅따 자리에 앉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사람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으니 아줌마 아저씨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9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능경봉(강원도 강릉과 평창의 경계) - 고루포기산 - 닭목령 - 화란봉 지나 비박 - 석두봉 - 삽답령 (강원도 강릉시)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19일 수요일 ~20일 목요일
월화 목금 주 4일 연재합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