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람들이 몰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지도를 보면 '청학동 소금강' 이라고만 씌어있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알고보니 여기까지가 모두 오대산 국립공원 구역내였다. 어떤 사람들은 오대산은 '산' 보다 소금강계곡이 훨씬 더 아름답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곳은 몰라도 백두대간을 하며 소금강계곡은 꼭 들러야지!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 7시에 동서울터미널에서 강릉행 버스를 타고, 오전 10시 20분에 강릉터미널 앞에서 소금강행 시내버스를 탔다. 강릉터미널에서 소금강 까지는 50분이 넘게 걸렸는데, 버스는 내가 타기 전부터 이미 만원이었고 버스 안의 승객들은 모두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이 월요일에 말이다!



한적한 시골의 버스에서 편하게 앉아 창밖 풍경을 감상하리라는 기대는 무참히 깨어지고, 나는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에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50분간 서 있었다. 월요일부터 이런 버스 안에 있으려니 꼭 서울에서 출근하는 기분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지옥철 체험이었다. 가출한 이후로는 이런 버스를 탈 일이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등산로 입구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버스가 등산로입구 바로 앞에 딱 내려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수가 없다. 어떤 산은 버스종점에서 나무가 우거진 등산로입구까지 30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그럴때면 내가 흙길을 걸으러 온 것인지 시멘트바닥을 걸으러 온 것인지 구분되지 않으며, 뙤약볕 아래서 등산로 입구를 찾다가 진이 다 빠져버리기도 한다.



소금강의 버스 종점에서 등산로 입구까지 가는 5분 동안 길 양 옆으로 식당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파전에 막걸리 한잔 마시고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참고 걸음을 재촉했다.



입구에 세워진 국립공원 안내판을 보니, 오대산 국립공원은 크게 '월정사지구' '소금강지구' 로 구분된다고 한다. 지난주에 백두대간을 타며 지나갔던 비로봉은 월정사지구에 포함되며 산세가 부드럽고 웅장한 게 특징이라고 한다. 소금강지구는 수많은 기암괴석과 폭포가 있는 곳으로 남성스러움과 화려함을 갖춘 곳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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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시작부터 함성 연발이었다. 소금강계곡은 큰 소와 너른 바위를 품은 엄청나게 큰 계곡이었다! 이제 겨우 등산로 초입인데도 너럭바위에 둘러앉아 점심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계곡의 '골'

그 안에 담긴 '소'

주변을 둘러싼 기암괴석

이 모두가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아! 나는 바위가 정말이지 너무 너무 좋다! 산세를 이루는 기암괴석을 보면 끊임없이 감탄이 흘러나온다.



알록달록한 단풍들은 강렬하게 내리쬐는 가을볕을 받아 선명하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계곡물에 비쳐보이는 단풍의 모습은 유화로 그려진 그림을 보는 듯 이채로웠다.



역시 국립공원이라 등산로정비도 잘 되어 있고 경사도 완만해서 샌들을 신고 가볍게 걸어도 좋을 곳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구룡폭포!

아! 진정 좋구나! 좋고도 좋구나!

계곡과 폭포와 기암과 나무들의 조화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이 곳에서 감탄이 나오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이런 경치를 보고도 감탄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심장이 얼어버린 것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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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글대는 등산객들을 피해서 폭포 안쪽 바위에 나란히 앉아있는 부부가 있었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나란히 앉아 두 분 다 눈을 지긋이 감고 자연에 취해 있었다. 진정한 신선놀음이란 바로 저런것이지! 나도 딱 한시간만 그렇게 쉬고 싶었다.



구룡폭포의 크기에 실망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곳 소금강지구는 가을보다 여름이 더욱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수량이 풍부한 여름이라면 폭포가 더욱 장관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글대는 등산객들은 구룡폭포에서 더이상 위로 올라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구룡폭포를 벗어나자 산객의 수가 확 줄었다. 하지만 주변경치는 구룡폭포를 지나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없으니 조용히 걸을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소금강계곡의 물이 어찌나 맑은지 물 아래 바위는 물론이고 그곳에 떨어진 단풍들도, 여전히 물 안에서 형형색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이 너무나 투명해서 하늘이나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은 수면에 담기지 못했다. 그저 물 속의 낙엽들이 제 빛깔을 뽐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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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니

분명 죽은나무 같은데

분명 살아있는

신기한 나무가 있었다.



죽어가는 것인지 이미 죽은 것인지 모를 이 나무에 여전히 싱싱한 잎새가 붙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자양분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뿌리임이 틀림없을텐데 여전히 땅과 흙에 단단한 유대를 맺고있는 것이 경이로웠다.



나무의 생명력과 '무던하게 질김'은 내가 아직 배우지 못한 삶의 방식이라서 나는 왠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무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고맙다...
고맙다...
이렇게 버텨줘서
고맙다...




내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버리고 싶었을 때, 이 나무처럼 그저 무던히 그저 가만히 나의 자리를 지키고 나면, 내 주위사람들도 언젠가는 이런 말을 해주겠지...




고맙다...
고맙다...
이렇게 살아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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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가끔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느냐보다

'그저 삶을 이어가는 것'

가장 중요할 때가 있다.



낙영폭포를 지난 이후로는 경사가 상당히 가팔라지며 등산로도 좁아졌다. 헥헥대면서 땅만 보고 걸었는데 아직도 500m 밖에 안왔단다. 말도 안돼! 이래서 어떤 사람이 '노인봉에서는 하산만 하세요. 등산할 곳 못 됩니다.' 라는 글을 남긴 거구나!



낙영폭포 이정표가 있는 곳이 해발 830m인데, 500m 떨어진 '낙영폭포위' 의 해발이 1,180m 나 된다. 그러니까 나는 저 500m동안 아파트 125층을 걸어 올라온 셈이다.



우와~! 이런 식이라면 나는 우리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나도 사는데는 지장 없겠다. 그까이꺼 뭐 등산배낭 짊어지고 마트 6번 왔다갔다 하는 것이, 이 곳 낙영폭포 위를 오르는 것 보다 수월할 테니까.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낙영폭포위' 를 지나자 경사는 더욱 가팔라졌다. 아악... 내 종아리... 내 종아리...! 등산을 다니면서 허벅지가 땡긴 적은 있어도 종아리가 땡긴 적은 처음이었다.



죽을 똥을 싸며 오르막을 오르고 있는데 왠 남학생 하나가 운동복 차림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배낭도 없이 생수 한병 들지 않은 빈 손으로 말이다. 천천히 올라가던 내가 먼저 인사를 했더니 학생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대답한다.



"여기를... 올라서 가시네요?"



너무 힘들어서 뭐라고 대꾸도 못하고 학생과 나는 서로를 지나쳐 각자 자신의 길을 갔다. 저렇게나 가벼운 차림으로 이 곳을 내려가는 거라면, 저 아이는 진고개휴게소에서 알바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신기하고 궁금했다.



학생과 헤어지고도 죽을똥 살똥을 몇번이나 더 쌌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기어서, 정말이지 네 발로 기다시피해서 드디어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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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아아아!!!

노인봉대피소에 도착했다아아아!!!!



죽을 것 같았다. 주5일 등산제의 첫 날이라 꽉 찬 배낭으로, 좋은 침낭을 사서 더욱 무거워진 배낭으로 이 험한 오르막을 오르다니... 흑흑흑... 넌 도대체 왜 도망을 친 거니? 이 오르막을 오른 집념으로 니가 못할 일이 도대체 뭐니?



너무 너무 힘들었지만 내친 김에 더 가보기로 했다. 생수로 목을 축이고 배낭은 대피소에 던져놓은 채로 10분 거리의 노인봉 정상을 향했다.






금요일 저녁, 언니부부가 우리를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왔다. 토요일도 출근을 해야하는 우리부부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우리부부를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스케쥴이었던 언니부부는 거나하게 마셨다.



첫번째 식당에서 한차례 마시고 두번째 식당으로 이동하는 길. 형부와 남편은 앞서 가고 언니와 나는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나 최근에 <우아한 거짓말> 이라는 영화를 봤어. 너 그 영화 알아?"



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 응. 예전에 봤어. 김희애랑 김향기 나오는 영화.


언니 : 거기서 동생인 김향기가 자살을 하고, 언니인 고아성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오잖아.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 친구관계 때문에 고민하던 김향기가 '언니... 이럴땐 어떻게 해야 해?... 그럼 저럴땐 어떻게 해야 해?... 엄청 고민하며 물어보는데 고아성은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버려. 친구가 없으면 그냥 혼자 다녀.' 라고 대답하잖아... 그리고 얼마 후에 김향기는 자살을 하잖아...


나 : 응. 기억 나.


언니 : 영화 속 언니가 꼭 나 같았어. 영화 속 자살하는 동생은 꼭 너 같았고...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일을 겪고도 나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우리동생은 무척이나 섬세하고 예민했지... 나는 그걸 너무 몰라주었고...


나 : ...


언니 : 그때 죽지 않고 살아줘서 정말이지 고마워. 이렇게 살아 있어줘서. 10년 전에 니가 가출했을 때 만약 죽어서 돌아왔다면... 나는 평생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 싶어.


나 : ...


언니 : 내 동생. 언니가 진짜 많이 사랑해. 표현 못해줘서 미안하고 니 마음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도 넌 네가 할 일 다 했어. 이렇게 내 옆에 있어줘서 정말이지 고마워.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20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청학동 소금강 (강원도 강릉시) - 구룡폭포 - 만물상 - 낙영폭포 - 오대산 노인봉대피소 (강원도 강릉과 평창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17일 / 월요일

episode24.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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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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