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산 정상에서 사용한 침낭의 충격적인 비밀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진고개휴게소에서 평창의 진부로 가는 59번 국도는 아침부터 내린 비로 절정의 단풍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을비를 머금은 단풍이 국도변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아줌마와 아저씨도 마치 10대의 소년소녀처럼 감탄을 쏟아내었다.



"이야~ 여기 단풍 진짜 끝내준다~"



아저씨는 운전 속도를 더욱 낮추어 우리 모두가 단풍을 보는데 아쉬움이 없도록 해주셨다.



"여기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멋진 코스였네."



아줌마도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여기서 내려달라고 해서 이 단풍길을 걸어갈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었다. 아직도 국도변이니 여기서 내리면 어디서 시내버스를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저씨는 고속도로로 빠지기 직전에 나를 내려 주었다. 히치하이킹의 가장 큰 장점은 헤어짐에 아쉬움이 없다는 것이다. 태워주실 때도 너무나 감사한데 내려주실 때는 더욱 감사하다. 그저 감사한 마음 뿐이다. 다른 감정은 끼어들 새가 없다. 그래서 언제나 헤어짐이 기쁘다. 부부와 나는 밝고 경쾌한 표정으로 서로의 안전을 빌어주며 헤어졌다.



아저씨 입장에서는 '그냥 아무데나' 내려준 것이었는데, 근처에 있던 평창군 관광안내판을 들여다보니,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진부터미널이 왠지 엄청 가까운 것 처럼 느껴졌다. 인근의 주유소에 물어보니 아니나다를까 그냥 쭉 직진하면 터미널이 금방이란다. 터미널까지는 걸어서 2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센스쟁이 아저씨!

정말이지 감사합니다!!



비가 내려 산능선 아래로 운무가 낮게 깔렸다. 그런 풍경을 보며 걷는 시골길이 좋았다. 우비를 입고 내리는 비를 맞는 느낌도 좋았다.




SE-96da36f9-d7de-4ff5-ad98-b1b112350c31.jpg?type=w1




서울의 내 집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언제나 샤워다. 오랜 산행후 돌아와 하는 샤워는 온 몸이 기쁨의 함성을 내지를만큼 좋다. 행복한 느낌마저 든다. 출근 전 의무적으로 하는 샤워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침에 눈 뜨면 샤워를 해야하는 것이 귀찮도록 싫었는데 등산 후 하는 샤워는 행복하리만치 좋았다.



샤워 후엔 치킨을 주문하고 치킨이 도착할 때 까지 배낭을 정리한다. 텐트와 침낭을 탈탈 털어 베란다에 널어 놓고, 이번엔 비까지 내려서 배낭도 꼼꼼이 닦아 베란다에 널었다.



치킨에 맥주는 언제나 옳다!

특히나 오랜 등산 후 집으로 돌아오면 그저 '도시음식'을 먹는다는 것 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치킨은 산행 후 먹으면 더욱 맛있었다. 주당은 아니지만 매일 반주를 즐길 정도로 애주가인데, 산에서는 배낭이 너무 무거워 술까지 챙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면 반드시 술을 마셨다. 캬아! 그래 이 맛이지! 이 맛이야!



그때는 몰랐다. 정말이지 나란 인간은 인생에 도움이 되는 기본 상식이란 없는 사람이었다. 오랜 산행으로 위장이 텅 빈 상태에서 짜장면을 씹지도 않고 삼킨 것도, 기력이 많이 쇠한 상태에서 기름에 튀긴 치킨과 차가운 맥주를 들이켠 것도, 모두 몸 상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이정도면 몸이 상하는 정도가 아닌 망하는 지름길이었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치킨에 맥주는 기력이 쇠한 오랜 등산자에게 사약을 1g씩 먹는 것과 같았다. 치킨에 맥주가 언제나 옳은것은 아닌 것이다.



나는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난 이후에

더욱 몸이 망가져 있었다.




SE-5eaa9abe-46bf-467c-92b6-09e38d70ebd9.jpg?type=w1




거의 항상 기력이 탈탈 털릴때 까지 걸었고, 그렇게 걸으면서도 등산 전후에 스트레칭을 하지 않았다. 산에서는 말린 누룽지와 말린 블럭국만 먹었고, 집으로 돌아오면 치킨에 소주 맥주 아이스크림 등 도시의 패악을 뭉쳐 놓은 음식만 찾았다. 몸 생각은 1도 하지 않고 그저 입이 달라는 대로 넣어주었다. 왜? 몰랐으니까!



나는 정말이지 몰랐다.



등산을 할 때는 체력의 70%만 사용하고 30%는 무조건 남겨두어야 한다는 사실도, 등산 전후에는 꼭 스트레칭을 해서 근육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사실도, 기력을 쥐어짜서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부드럽게 익힌 음식을 먹어야 하며 뜨겁고 차갑고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도, 정녕 몰랐다.



여느 산객들보다 걸음이 느리니 갈 수 있는 만큼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일생에 준비운동이나 스트레칭은 몰랐으며, 뭘 먹든 안 먹는 것 보다 낫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산에 있는 동안 본의아니게 금주를 한 덕분에 집에 오면 항상 술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잘못된 습관으로 인한 나쁜 결과는 그 반응이 서서히 젖어들듯 찾아오게 마련이다. 나는 백두대간을 끝마칠 때 까지도 내가 무엇을 잘 못 하고 있는지 몰랐다.



나는 서울에 있는 주말동안 겨울용 침낭을 마련하기 위해 등산용품점을 찾았다. 매일 밤마다 추위때문에 잠이 깨는 것은 이제 그만 하고 싶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간 등산용품점에는 넓은 매장에 직원이 둘 있었는데, 그 중에 나보다 어려보이는 여자가 나를 맞이했다.



나 : 겨울용 침낭이 필요해서 왔어요.


직원 : 어디에서 사용하실 건가요? 난방시설이 있는 캠핑장인가요, 아니면 노지에서 비박용으로 사용하실 건가요?


나 : 비박용이요. 지금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거든요. 지금부터 한겨울까지 쓸 수 있는 침낭이 필요해요.



직원은 천장에 매달아 전시해놓은 침낭코너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큰 침낭을 추천해주었다.




SE-21b5a7d1-3609-428d-8969-77c07ffab4d4.jpg?type=w1 사진출처 : 아웃도어 매장 '가야미' 블로그




나 : 헉! 이렇게나 큰 걸 어떻게 가지고 다녀요?


직원 : 이게 펼쳤을 땐 이정도인데 접으면 아주 작아져요. (침낭 보관 파우치를 보여주며) 이 안에 다 들어가요.


나 : 이것도 너무 큰데요?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침낭은 이것 반도 안돼요.


직원 : 지금 쓰고 계신 침낭의 필파워(fill power) 가 얼마 정도인가요?


나 : 350 이요.


직원 :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정도면 한여름용 인데요? 지금 계절에 그정도 침낭으로 비박을 하시면 엄청나게 추우실텐데요?


나 : 네. 맞아요. 엄청나게 추웠어요! 그래도 나름 구스다운(거위털) 인데... 그게 한여름용 이라구요? 구스다운이요?


직원 : 구스다운이 보온성도 좋지만 여름에 얇은 구스를 사용하면 청량감도 좋아요.


나 : 아...!





구스다운 (gooes-down)
거위의 가슴에서 배에 걸친 부분의 솜털. 가볍고 보온성이 좋아서 방한용 의류의 충전재로 사용된다. 보통 '다운패딩' 이라고 하면 오리나 거위의 털을 사용한 보온패딩을 일컫는데 덕다운(오리털) 보다 구스다운(거위털)이 더 가볍고 보온력이 높다.
필 파워 (fill power)
다운 1온스(28g)를 24시간 압축한 후 압축을 풀었을 때 부풀어 오르는 복원력을 말한다. 수치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다운재킷이 공기를 많이 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수치가 높을수록 보온력도 높아진다. 캐주얼 브랜드 제품은 대개 600 안팎이며, 아웃도어 브랜드 제품은 700~900 수준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한경 경제용어사전)





그렇다. 나는 한여름 실내용 침낭으로 10월 중순에 산 정상에서 비박을 한 것이었다. 하아... 어쩐지 춥더라니... 알고보니 내가 사용한 침낭은 해외여행 갈 때 장거리 기차의 침대칸에서 사용하는 침낭이었다. 한마디로 10월 중순의 산 정상에서 한여름 홑이불만 덮고 잔 격이었다.



필파워 350 짜리를 사용하던 내게 여직원은 1500 짜리를 추천해주었고,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 직원이 추천해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생각보다 침낭 가격이 너무 비싸서 고민이 되었지만 그 여직원을 믿어보기로 했다.



나보다 나이는 어려보였지만 이 여자는 등산 및 캠핑, 암벽장비까지 모르는게 없었다. 중년의 남자손님이 암벽로프를 비교하며 알은체를 했다가 결국 여직원의 일목요연한 설명에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동계용 비박침낭을 들고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가격은 피눈물나게 비쌌지만ㅠㅠ 이제 더이상 산에서 피눈물 흘리며 추위에 떨 일은 없으리라!



어서 빨리 월요일 아침이 돌아왔으면!



집에서 새로 산 침낭을 펼쳐 그 안에 누웠더니 진정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젠 이 따수움을 산에서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대간 뛸 일이 더욱 설레었다.



그리고 드디어 월요일!!

나는 백두대간을 이어가기 위해 지난번 마무리 했던 평창의 진부터미널이 아닌 강릉터미널로 향했다. 오늘은 대망의 소금강계곡에 퐁당 빠지는 날이다!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 23 -



월화 목금 주4일 연재합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










이전 02화#22. 외로운 히치하이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