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자고 일어나니 기분이 좋았다.
잠 들기 직전에는 백두대간 최대의 공포였던 삵의 울음소리가 떠올라 살짝 무서웠지만, 곧 엄마를 느끼며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 공포는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가장 무서운 것은 '나의 마음' 이었다.
게다가!
어젯 밤에 먹고도 남은 고기가 있어서
오늘 아침도 고기다! 고기~!!! 꺄하하하!!!
먹는 것이 사람의 인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나는 대간 종주를 하면서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분명 날씨가 좋았는데, 식사를 하는 그 잠깐 동안 짙은 안개가 산을 가득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부랴부랴 배낭을 챙겨 길을 나섰다.
안개가 가득한 산길은 제법 운치와 멋이 있었지만 혼자 걷기엔 오싹했다. 나는 '전설의 고향'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이왕이면 더블캐스팅으로 총각귀신이 나타나주길. 처녀귀신아, 내 앞에 나타나봐야 나는 너랑 할 얘기 없단다. 그러니 굳이 나타나지 않아도 돼.
쉬지 않고 걸어 석병산에 도착했다. 햇볕이 없고 날이 서늘해서 평소보다 힘들지 않게 빨리 걸을 수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석병산에는 '일월문' 이라는 바위구멍이 있는데 꽉 찬 안개 때문에 구멍 너머에 어떤 풍경이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바위든 나무든 자연이 만들어 낸 '문'을 좋아하는 나는 무척이나 아쉬웠다. 일월문 너머의 풍경도 분명 절경이었을텐데. 그동안 비 내리는 산길도 걸어봤고 안개나 구름이 낮게 깔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길도 걸어봤지만, 오늘의 석병산처럼 오싹한 적은 없었다.
그 오싹함이 심장을 눌러
안개가 걷힐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은
무리였다.
어쩐지 안개는 아까보다 더욱 짙어진 기분이었다.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주5일 등산제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이었다. 나는 석병산을 지나 '고병이재'를 거쳐 마을로 하산하기로 했다. 오싹한 날이 마침 하산하는 날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이런 날 비박까지 해야했다면 나는 밤새 삵의 울음소리와 귀신의 환청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었다.
고병이재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등산로는 다행히도 무척이나 선명했다. 30분쯤 내려오자 안개가 옅어지며 산 아래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이야아~ 예쁘다!
마을을 둘러싼 산세가 예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고병이재에서 등산로를 따라 동쪽으로 하산하면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라는 동네에 닿게 되는데, 관광지로 유명하거나 경치가 수려하기로 소문난 곳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곳으로 하산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백두대간 지도에 '옥계석화동굴' 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유명 관광지 중에는 동굴도 많지만, 나는 동굴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동굴 탐험도 해보고 싶었다.
하산하는 길은 미친듯한 경사의 내리막이었다. 나는 벌써부터 다시 돌아올 월요일이 걱정되었다. 이 경사로를 다시 기어서 올라가야 한다는 거지? 아아... 괜찮을까? 종주 첫날은 배낭도 무거운데... 괜찮을까? 경사가 얼마나 심하면 등산로의 시작부터 끝까지 로프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산을 내려가면 갈수록 기가막힌 단풍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곳의 단풍은 지금이 절정인 것인지 며칠간 만나지 못한 단풍을 이곳에서 원없이 만났다. 등산로의 로프를 잡은채로 단풍에 넋이 빠졌다. 길이 너무 가팔라서 로프를 잡지 않고 넋 놓고 있다가는 발을 헛디뎌 데굴데굴 구르게 될 것 같았다.
단풍과 소나무의 조화를 감상하며 쉬엄쉬엄 내려왔더니 어느덧 동굴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동굴이 폐쇄되었다!!!
매표소로 쓰였을만한 작은 건물엔 여기저기 금이 가 있고 동굴 앞의 나무테이블은 박살이 나 있었다. 동굴은 쇠창살로 입구가 막혀있고 날씨와 더불어 음침하고 무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캄캄하고 깊숙한 동굴의 안쪽에서 무엇인가 튀어 나올까봐 겁이 났다.
버려져도 한참은 버려진 곳이었다. 한때 관광지로 개발되었다가 사람들이 찾지 않으니 폐쇄된 모양이었다. 매표소의 크기나 나무테이블이 있는 공간을 보았을 때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는 아니었다. 그러니 관광객을 모집하기가 더욱 어려웠을테지.
동굴이 폐쇄되었어도 그 곳에 옛 유적지의 낭만이 있었다면 배낭을 내려놓고 좀 더 시간을 보낼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엔 을씨년스러움만 남아있었다. 나는 서둘러 동굴앞을 벗어나 마을로 향했다.
동굴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나무와 숲이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바닥이 온통 자갈인 너덜지대여서 똥 싼 바지를 입은 것 마냥 걸어야 했다. 관광지로 개발하기엔 여러모로 불편이 많은 곳이었다. 흉가로 변해버린 신당과 산장을 지나쳐 드디어 마을에 닿았다.
산에서 내려와 만난 첫번째 집 마당에 할아버지 두 분이 나와계셨다. 그 할아버지들이 산에서 내려온 나를 마치 귀신보듯 하시길래 먼저 다가가 밝게 인사를 드렸다. 인사를 하며 은근슬쩍 평상에다 배낭을 내려놓고, 마당의 호스에서 물이 콸콸 흘러나오는 것이 아까워서 물병도 하나 가득 채웠다.
할아버지들 말씀을 들어보니 이곳의 '옥계석화동굴'은 얼마 운영되지도 못하고 금방 폐쇄된 모양이었다. 폐쇄된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며, 동굴을 보러 여기까지 왔다는 얘기는 실로 오랜만에 듣는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타주신 믹스커피를 얻어마시고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보건소 방향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댁에서 보건소까지는 걸어서 30분이었고,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두세시간에 한대씩 있다고 했다. 나는 보건소 앞에 앉아서 버스가 올 때까지 죽치고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보건소에 닿고 보니 트럭이 한대 서 있었고, 운전석의 할아버지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마침 면소재지로 나가려고 했는데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나를 보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셨다. 시내버스가 드문 산골마을에는 이런 정이 있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같은 방향으로 가는 차들이 먼저 물어보고 태워주곤 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버스가 자주 오는 면소재지에 내려주시고 갈 길을 가셨다. 정확하게 버스정류장 앞에 내려주셨다. 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5분도 안되어 나타났고 그렇게 나는 무척이나 편하게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강릉시 옥계면에서 탄 시내버스는 나를 강릉터미널이 아닌 동해터미널로 데려다주었는데, 옥계면에서 동해로 가는 버스는 바다를 끼고 달렸다.
와-!
바다다!!!
생각지도 못한 바다의 출현에 내 마음도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버스는 바다를 끼고 달리며 그 유명한 '망상해수욕장' 을 지나쳤다.
그래서!
주말 동안 집에서 잘 쉬고
다시 시작된 월요일의 등산은
산이 아닌 바다로 향했다.
월요일, 서울에서 다시 동해터미널로 돌아온 나는 바로 백두대간으로 향하지 않고 '망상역' 으로 향했다. 망상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한 망상역은 여름 해수욕 시즌에만 운영되는 간이역이었다. 10월인 지금은 역사를 지키는 사람도 없고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자연만큼이나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철길을 홀로 걸었다. 지나는 사람도 지나는 기차도 없다. 한여름보다 더 강렬한 가을볕만이 나와 함께 했다. 철길 따라 5분쯤 걸으니 해수욕장이 나타났다.
와-!
바다다!!!
바다는 언제봐도 시원하다. 언제봐도 감탄이 나오고 언제봐도 반갑다. 백두대간을 타기 전에는 강원도에 올 일이 없었다. 살면서 보았던 바다는 거의 남해바다였는데, 동해바다의 물빛이 훨씬 더 아름다워서 깜짝 놀랐다.
하나로 이어진 같은 바다인데 어째서 동해와 남해의 물빛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지? 남해바다는 그저 그런 물빛인데 동해바다의 물 빛은 숨 막힐 정도로 맑고 투명하고 파랗다.
지도상으로 보면 오토캠핑장으로 유명한 동해시 망상해수욕장과 내가 들어가야 할 강릉시 옥계면이 바로 맞닿아있었다. 그래서 나는 망상역-망상해수욕장-옥계해수욕장 까지 한번에 걸어보려고 했다. 지도상으로 봤을 땐 한 시간도 안 걸릴 것 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 망상해수욕장에서 옥계 방향으로 가려고 보니 반도처럼 툭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이 너무 길어보였다. 저길 에둘러 가려면 너무 많이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날씨는 또 얼마나 더운지. 한여름이라 해도 믿을만큼 땀이 줄줄 나는 날씨였다.
이런 날씨에 박배낭을 메고
뙤약볕 아래를 걷는다는 것은 미친 짓이야.
나는 망상해변을 모두 둘러보고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나왔다. 시내버스를 타고 옥계해변으로 이동하려 했던 것이다. 버스기사님께 옥계해변으로 가려한다 여쭈니 그곳으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다며, 옥계면사무소 앞에서 갈아타라고 알려주셨다.
옥계면사무소 앞에서 내려 근처에 앉아계시던 아저씨께 여쭈니, 여기서 옥계해변으로 가는 버스는 거의 없다고 하셨다.
"걸어서 가면 얼마나 걸릴까요?" 물으니
"한 40분 쯤?"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체없이 걸어서 가기로 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8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두리봉 비박(강원 강릉과 정선의 경계) - 석병산 - 고병이재 - 옥계석화동굴 -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 서울로 귀가
진행 날짜 : 2011년 10월 21일 금요일
내일 수요일은 쉬고
목요일에 다시 찾아뵐게요~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