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계해변으로 가기 전에 면소재지의 파출소에 들렀다. 내일 아침 백두대간을 위해 들어가야 할 산계리행 버스시간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파출소에는 경찰아저씨 두 분이 계셨는데 산계리로 들어가는 버스시간을 묻자, 거기에 따른 대답은 하지 않고 나의 배낭 크기에 놀라며 일단 앉으라고 하셨다.
경찰아저씨들은 친절히도 직접 운수회사에 전화를 걸어 버스시간을 알아봐주시고 커피도 타주셨다. 대한민국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대접받게 되는 것은 언제나 노란색 믹스커피다.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로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에 딱 세 대가 있는데 오전 8시, 오후 1시반, 오후 6시가 그것이었다. 아무리 산골이라지만 아침, 점심, 저녁으로 딱 한대씩만 버스가 들어가다니, 깔끔해도 너무 깔끔하다. ㅎㅎㅎ
나의 커다란 박배낭을 보며 이것 저것 물으시던 경찰아저씨는, 혹시 내일 아침 버스를 놓치게 되면 등산로 입구까지 태워줄테니 파출소로 오라고 말씀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너무나 기뻐서 자동으로 물개박수가 나왔다.
"진자요? 진짜죠? 진짜 맞죠?"
단단히 확인도장까지 받았다. ㅎㅎㅎ
옥계면소재지에서 옥계해변으로 가는 길은 국도를 따라가는 길이라 찾기가 쉬웠다. 정확히 40분이 걸렸다.
와-!
바다다!!!
좀 전에 망상해변에서 바다를 보고 왔는데도 다시 보니 또 반가웠다. 옥계해변의 오른쪽으로는 한라시멘트 공장이 있었고 왼쪽으로는 정동진으로 넘어가는 곶이 있었다. 박배낭 없이 가볍게 트래킹을 하는 거라면 망상해변-옥계해변-정동진까지 한번에 걸어서 여행해도 좋을 것 같았다.
망상해변과 다르게 이곳 옥계해변은 갈매기들이 오순도순 많이도 모여있었다. 바람은 거의 없었지만 적당히 파도가 일어 바다는 더욱 아름다웠고, 파도와 함께한 갈매기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아...
나도 날고 싶다...
날개가 있다면 지금보다 자유로울까?
날개가 있어도 그들만의 규칙과
그들만의 세상이 있겠지?
나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하는
사회생활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서 혼자 하는 산행이
사회생활보다 훨씬 편했다.
나는 아마 갈매기로 태어났어도 힘들었을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니.
물빛은 망상해변이 더 예뻤다.
하지만 분위기는 옥계해변이 더 좋다.
망상해변은 해변의 백사장도 넓고 물빛도 고혹적이지만, 해변 주위로 식당이 꽉 들어차있었고 모래사장에는 쓰레기도 많았다. 나는 사람 없이 조용한 옥계해변이 좋았다.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으니 마음까지 편해졌다.
찾는 사람이 없는 해변은 사람의 발자국 대신 갈매기의 흔적만 즐비하다. 모래 위 파도가 그려놓은 흔적도 물결을 닮아 예쁘다. 오후 3시에 도착해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파아란 물빛과 적당한 파도와 고운 모래가 있으니 지겨운 줄 모르겠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시간의 구애 없이 그저
파도의 변화만 바라보는 것도
태어나 처음이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이른 시간, 바다와 가장 가까운 소나무 아래에 텐트로 집을 지어놓고, 다시 해안가의 데크에 올라 어두워질 때 까지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 아름다운 동해바다를 혼자서 다 차지하고 앉아
이 바쁜 세상에서 하루를 온전히 누리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어린시절부터 삶이 무척이나 고되었던 나는, 단 하나의 소원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나무 아래 앉아 쉬고싶다' 라고 대답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릴때부터의 소원이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 앉아 아무런 고뇌와 고통없이 '그저' 쉬고 싶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점에서 <질문의 책> 이라는 책을 보았다. 손 안에 가볍게 들어오는 작은 크기에, 한 페이지에 하나의 질문만 들어있는 그런 책이었다. 우연히 한 페이지를 펼쳤는데
내일 죽게 된다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들어있었다. 나는 0.1초의 고민도 없이 '커다란 나무 아래 앉아 쉬고 싶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페이지의 질문은
그 일을
지금 당장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였다. 나는 책을 덮고 서점을 빠져나왔다. 나무 아래 앉아 쉬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까운 공원만 가도 나무는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한 '나무'는 그런 나무가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 딱 한그루의 나무만 있는 곳에서, 내 안에 있는 모든 고통을 덜어내고, 그저 쉬고 싶었다. 내일 당장 죽는다해도 다른 무엇보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쉬고 싶었다.
그 오랜 소원을 이곳 강릉의 바닷가에서 이룬 것이다. 집을 벗어난지 13년 만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 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떤 순간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덧 달이 뜨고
가로등엔 불이 켜졌다.
나는 가벼운 저녁을 먹고 텐트로 들어가 이른 잠을 청했다. 파도는 제법 높은데 바람은 없다. 무척이나 따뜻한 날이었다. 파도소리의 시원한 울림이 좋아 텐트 입구를 열어둔 채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탄이 터졌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하늘에서 폭탄이 터지고 있었다. 눈을 비볐다. 분명 폭죽이 아닌 폭탄이다. 이곳은 북쪽의 강원도 바다. 나는 전쟁이 난 것인줄 알았다. 뭐지? 어떡해야 하지? 벌떡 일어나 텐트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런데... 해변 근처의 민가가 조용하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집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다시 텐트로 들어가 누웠다. 아까 산책을 하며 보니 바로 옆에 군부대가 있었다. 군부대 옆에서는 흔히 있는 일인가보다 생각 했다. 폭탄은 천천히 시간 간격을 두고 10번 넘게 터진 후 잠잠해졌다. 이제 자자...
그런데 이번엔 사격소리가 들린다. 아오... 제기랄... 왜 사격훈련을 오밤중에 하는 거야? 이 동네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고도 잠을 자는 건가? 아니면 사격훈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잠을 자는 것인가?
사실 시간이 좀 이르긴 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 것이 오후 7시 였고, 폭탄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것이 7시 30분. 사격소리는 장장 2시간 동안 이어졌다.
보통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시간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시간이면 시골 어르신들이 가장 기다리는 연속극과 뉴스가 방송되는 시간이지 않은가! 사격훈련이 2시간이나 이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이제 끝나겠거니 이제 끝나겠거니 하며 계속 텐트 안에 누워만 있었다.
해변이라도 다 같은 해변이 아닌 것이다. 앞으로 해변에서의 야영은 필히 군부대가 없는 곳에서 해야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했다. 저녁까지는 세상이 다 내 것인 듯 참으로 고요하고 편안했는데, 밤이 되니 내 것은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잠 들기를 포기하고 침낭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아아아~ 별이 무지하게 많다!!! 아까는 폭탄 불빛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별이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강릉의 밤 하늘이 얼마나 맑은지,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반짝반짝 별가루의 은하수까지 보일 정도였다. 아아~ 예쁘다!
날은 따뜻하고
파도소리와
별빛이 있는 밤
사격소리만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최고의 날이었을 것이다. 이래서 해변에서의 야영은 꼭 해봐야 하는구나! 해변에서의 야영도 산에서의 비박처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하는 것이 왠지 더 좋았다.
다음 날, 어김없이 늦잠을 자 버렸다. 텐트 안이 훤히 밝아지고 나서야 눈을 떴다. 큰일 났다! 산계리로 들어가는 버스 시간이 8시 였는데! 아무리 빨리 준비해도 8시까지 면소재지에 닿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거, 나는 아예 늦어버리기로 작정한다. 어제 만났던 경찰아저씨가 버스를 놓치면 등산로 입구까지 태워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뒷배가 든든했다. 이래서 사람은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하는구나!
아침 식사는 거르고 텐트부터 걷었다. 텐트를 걷어 배낭을 다시 싸다가 나는 또 한번 기겁을 하고 말았다.
군부대 수색대원들이
총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순간적으로 나를 잡으러 온 것인 줄 알고 사색이 되었다. 설마, 북한에서 온 여자간첩이 혼자서 백두대간을 다니며 남한의 지형을 조사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간 것인가?!!
다행히도 군인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 잡듯 백사장을 샅샅이 훑으면서도 소나무 아래 있는 나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휴우... 다행이다...
여러모로 군부대 근처에서는 야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더욱 속도를 높여 배낭을 꾸렸다. 배낭 싸기가 거의 마무리 되어갈 즈음 무심코 고개를 돌렸더니 이번엔
오오오!!
해가 떠오르고 있어!!!
이미 날이 훤해진 이후에 눈을 뜬 데다 구름이 낮게 깔려서 일출은 기대도 않고 있었는데, 수평선 위 낮게 깔린 구름 위로 쟁반같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우와아아아아-!!!
동해바다의 끝에서 보는 태양은 정말이지 쟁반처럼 크게 느껴졌다. 갑자기 기분이 밑도 끝도 없이 좋아졌다. 어제의 폭탄소리와 사격소리도, 그래서 잠을 설쳐 늦잠을 잔 것도, 나를 잡으러 온 줄 알았던 수색대원들도,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빛에 밀려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본문 중간에 나온 <질문의 책> 내용은
제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요.
혹시 책의 내용을 정확히 아시는 분은
거침없이 알려주세요. ^^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