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백두대간의 눈물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다시 어제처럼 걸어서 면소재지로 향했다. 해변을 떠나며 소나무숲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아침의 숲이 전해주는 싱그러움은 언제라도 좋다. 오늘은 하늘과 구름도 청명하게 예쁜 날이다.




면소재지에 닿자마자 곧장 파출소로 향했다. 오전 8시 15분. 안으로 들어가자 어제 뵈었던 분이 나를 보고 빙그레 웃고 계셨다. 마치 내가 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처럼.




"지각 했구만. 일단 거기 앉아서 기다려요."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쇼파에 앉아 기다렸다. 밤새 근무 섰던 경찰들이 오늘 아침 출근자들에게 인수인계를 하느라 바쁜 시간이었다. 나에게 등산로까지 태어다 주겠노라 약속했던 분은 그곳의 소장님 같았다. 소장님은 급한 인수인계를 끝내놓고 밖에서 순찰중인 다른 경찰에게 전화를 거셨다.




"응. 지금 뭐하나? 그래? 그럼 좀 들어오지.

민원이 하나 있는데."




그 민원이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나는 졸지에 민원인이 된 것이다. 그렇구나, 경찰서에 오면 누구나 다 민원인이 되는 것이구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순찰하던 경찰분이 들어오자 소장님은 간단히 내 소개를 해주시며 나를 등산로 입구까지 태워다 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경찰차를 얻어타고 산계리 구석까지 들어갔다. 나를 태워주신 경찰 아저씨는 원래 과묵하신 것인지 아니면 숫기가 없어 그런 것인지 내가 뭔가 얘기를 해도 예, 아니오, 로만 대답하셨다.




어느덧 지난번 하산할 때 보며 반했던 산계리의 아름다운 산 능선이 나타났다.




"제가 산을 많이 다닌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백두대간을 타면서 설악산에서부터 여기까지 쭉 걸어서 내려왔거든요. 여기 산계리처럼 산능선이 마을을 아름답게 감싸고 있는 곳은 처음봐요."




나의 감탄 섞인 말에 아저씨는 드디어 문장으로 대답을 하셨다.




"그래서 그런가요? 여기서 유명한 사람이 많이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나는 것보라는 듯이 손뼉을 짝짝 치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요! 여기 풍수가 남다르다니까요!

보세요, 아저씨.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내가 정면으로 보이는 능선을 가리키며 묻자 아저씨가 대답하셨다.




"글쎄요. 저는 딱히 그런 생각은 안 해봐서..."




원래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러 지내게 되면 아름다운 곳에 살아도 아름다운지 모르는 법이다. 그 곳이 아름다웠다는 것은 그 곳을 떠나봐야 알게되는 법이다.




경찰아저씨는 정확히 등산로 입구에서 내려주셨다. 버스를 타고 들어왔다면 보건소 앞에서 내려 등산로 입구까지 30분 이상 걸어야 했을텐데, 그런 수고를 모두 덜어낼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도움을 주신 분께 허리가 꺾이도록 감사인사를 드렸다.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이라곤 언제나 인사와 웃는 얼굴밖에 없었다.




등산로에 오르자마자 밥부터 먹기로 했다. 그때까지 아침식사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폐쇄된 석화동굴 앞에서 배낭을 내렸다. 나무 의자들은 박살이 났지만 다행히도 테이블은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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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하산 때는 귀신이 나올까봐 으스스했던 동굴이었는데, 그래도 한번 왔던 곳이라고 이번은 무섭지 않았다. 동굴 쪽은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 생각을 접었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나의 허기진 위장이었다.




그리고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등산로의 깎아지른 오르막이었다.




방금 아침을 먹었는데도 금세 허기가 질 정도로

오르막이 말도 못하게 가팔랐다.




지난번 하산 때는 오색 찬란한 단풍 덕분에 힘들어도 힘든줄을 몰랐는데, 오늘 다시 이 길을 올라가려니 단풍이 모두 떨어지고 없었다. 그 때가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기간이어서 나는 야구중계를 다 보고 다시 백두대간을 찾았다. 하산한지 열흘만에 다시 찾은 등산로는 그때의 그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 단풍들... 내 단풍들...

야구를 포기하고 대간을 이어갈 걸...

자연은 기다려주지 않는데...

아! 내가 바보였어.




나뭇가지엔 마른 이파리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정녕 이 길이, 단풍으로 감탄했던 그 길이 맞단 말인가? 내가 감탄하며 셔터를 눌렀던 장소가 어디쯤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단풍은 모두 떨어지고 없지만 미치고 팔딱 뛸 오르막은 여전하다. 오르막과 등산로 내내 이어지는 로프를 보니 분명 그 길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단풍으로 풍성하던 길이 잎새가 모두 지고 나자 더욱 가파르게 보였다.




그냥 다시 내려갈까?

오르기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 내려가고 싶었다.

그 생각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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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 시간을 깔딱깔딱

등산로의 로프를 잡고 겨우겨우

두 발 짐승 사람이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신기루를 경험한 끝에,

드디어 드디어




고병이제에 도착했다!!!




나는 배낭을 내동댕이 치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백두대간 시작하고 이렇게나 물을 많이 마신 구간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햇볕 쨍쨍 여름날씨도 아닌 이렇게나 시원한 가을날씨에 말이다!




정말이지 이 곳은 두번 다시 찾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아무리 경사가 심하고 깎아지른 오르막이라 해도 보통은 완만한 등산으로 시작해 마지막 구간만 미친듯이 치고 올라간다.




그런데 이곳의 등산로는 시작부터 다짜고짜 가파른 경사만 이어지더니, '이곳부터는 경사로가 심하다'는 표지판을 만난 이후로는 그야말로 미치고 팔딱 뛴다.




조금만 발이 미끄러져도 그대로 등산로 입구까지 굴러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이어가는 산악회 등산으로는 절대 절대 피해야 할 곳이다. 극심한 오르막에 쉬어갈 한 뙈기 땅도 없어서 한명이 미끄러지면 이후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피할 곳도 없이 모두 미끄러지고 말, 그런 곳이다.




으아아! 죽겠다!

죽을 것 같다!




나는 등산로에 벌렁 누워버렸다.

진심 죽을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병이재부터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은 경사가 다소 완만했다는 것이다. 산이라는 게 원래 오르막과 내리막이 줄줄이 이어지는 것인데 고병이재에서 백복령으로 이어지는 길은 고도 차이가 심하지 않았다. 지도에 의하면 고병이재부터 백복령까지 이어지는 길은 '카르스트 지형' 으로 곳곳에 석회암 함몰지가 형성되어 있다고 표기되어 있었다.




고병이재에서 백복령으로 가는 길은 두갈래로 나뉘어 지는데, 생계령을 거쳐서 가는 길도, 민둥산을 거쳐서 가는 길도 모두 백두대간으로 인정해주었다. 어느길로 갈까 고민하던 나는 아까부터 보이던 저 멀리의 '하얀산'을 더욱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민둥산이 아닌 생계령 방향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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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계령이 아닌 민둥산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궁금했던 '하얀산'은 백복령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코스로 가도 결국은 만나는 장소였고, 민둥산은 가을 억새로 유명한 강원도 정선의 그 민둥산이었다. 그 때가 11월 2일 이었으니, 나는 절정의 억새를 놓친 것이다.




등산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민둥산'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내가 아는 것은 그저 국립공원 몇 군데가 전부였던 것이다.




생계령이 민둥산만큼 유명하지는 않아도, 등산로는 완만하고 등산로를 둘러싼 소나무가 즐비해서 숲길을 걷는 듯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지도에서 설명한 것 처럼 곳곳에 땅이 움푹 들어간 함몰지가 나타났다. 신기한건 함몰지를 피해 이어지는 등산로가 굉장히 넓다는 것이었다. 이곳이 민둥산만큼 유명하진 않아도 백두대간 리본은 상당히 많이 달려있었다.




고병이재를 지나면서부터 계속 보였던 '하얀산' 은 백두대간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자병산' 이라는 산인데, 한라시멘트 회사가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를 채석하느라 산을 파낸 것이 하얗게 보였던 것이었다.




건물을 짓자면 시멘트가 필요하고, 시멘트를 만들어내려면 석회질이 풍부한 산을 채굴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보통의 시멘트 광산은 봉우리 하나만 채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 자병산은 봉우리 뿐 아니라 아예 산 능선을 모두 채굴해버려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든다.





SE-e7818b78-bc2e-4446-a97d-7bb36ca6086e.jpg?type=w1 백두대간 자병산 시멘트 광산 / 사진 출처 : 오마이 뉴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47&aid=0002292844





대한민국의 산들이 소나무와 단풍, 억새 등으로 한껏 치장할 때, 자병산은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몸을 가리지 못하고 알몸으로 버려진 채 누워있는 것이다. 원료를 채굴하고 난 이후의 산은 더이상 보호할 방법이 없는 것인지, 자병산은 10년 후 20년 후에도 지금처럼 발가벗겨진 채로 버려져야 하는 것인지, 마음이 아팠다.




모르고 볼 때는 그저 안타까운 정도였는데 알고 보면 소름이 돋는다. 하얀 몸을 드러내고 길게 누운 산이, 한겨울 발가벗겨진 채로 쫓겨난 아이가 추위에 떨며 누워있는 것 처럼 보였다.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다.




국도를 지나는 '백복령' 에 휴게소가 있다는 표시를 보고, 휴게소에 들르게 되면 생수와 초코파이를 사려고 했다. 그런데 백복령에 있다는 휴게소는 간이화장실과 소규모 주차장과 나무의자가 전부였다. 이정도면 휴게소가 아니라 그냥 졸음쉼터 아닌가?




아, 젠장!

게다가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휴게소에 미련을 버리고 재빨리 건너편 능선으로 치고 올라갔다.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야영지를 잡아야 했다. 나는 국도 이후의 오르막을 쉬지도 않고 뛰어 올라갔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8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옥계해변 (강원도 강릉시) - 옥계면 산계리 - 고병이재 - 생계령 - 백복령 (강원 강릉과 정선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2일 수요일

episode31.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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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 목금 주 4일 연재합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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