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닥치면 뭐든 하게 되어 있다는 진리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다행히도 백복령 국도에서 산을 오른지 20분만에 나무의자를 만났다. 그 20분 만에 이미 산은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배낭을 내리고 헤드랜턴부터 찾았다.




그런데 헉!

랜턴이 안.켜.진.다!!!




건전지가 다 된 모양이었다. 으으... 집에서 출발할 때 건전지를 확인하지 않은 나의 불찰이었다. 다행히도 여분의 손전등이 있었다. 머리에 착용하는 헤드랜턴보다는 불편하지만 그래도 밝기는 손전등이 더 밝았다.




자병산의 채석장은 해가 져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고, 덩달아 백복령을 지나는 국도에선 자동차들이 쉬지 않는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차 한대 지나가지 않는 여느 시골의 국도와는 달랐다. 나는 백두대간에서 도시의 소음을 들으며 이른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을 푹 이루지 못했다. 국도와 가까운 곳에 터를 잡았더니, 누군가 차를 타고 올라와 나를 해치려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동료 없이 홀로 자면서 겪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나쁜 일이 모두 꿈으로 나타났다. 악몽을 종류별로 다 꾸었다.




악몽에 시달리다 눈을 떠 보면 두 시간이 지나있고,

또 악몽에 시달리다 눈 떠 보면 두 시간이 지나있었다.




덕분에 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이 너무 너무 무거웠다.




이제는 날이 점점 추워져서 아침에 해가 강렬하게 떠오르지 않으면 텐트 밖으로 나가기도 싫다. 다행히도 오늘의 태양은 선명하고 밝다. 그거면 되었지!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는 인생의 선물과도 같은 것. 매일 매일 선물을 바란다면 그거야말로 도둑놈 심뽀지. 나무의자에 걸터 앉아 아침을 먹고 배낭을 쌌다.




잎새가 다 떨어지고 난 마른 가지 사이로 백복령을 지나는 42번 국도가 보였다. 국도를 내려다보며 걷는 길은 왠지 모르게 설렘을 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빽빽한 나무숲으로 시야가 가려져 한뼘의 등산로와 머리 위 하늘 외엔 시원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안개가 들어차고




짙은 안개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날씨가 되어버렸다. 아침엔 햇살이 무척이나 따뜻했는데 밥을 먹고 배낭을 싸는 동안 날이 흐려지더니, 길을 걷기 시작한지 한시간도 되지 않아 짙은 안개에 갇혀버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안개 속을 걷다가 사방이 탁 트인 전망지에 닿았을 때, 참으로 고맙게도 안개가 옅어졌다. 맑은 날씨에 비하면 답답한 전망이었지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속을 걷다보니, 흐리게나마 건너편 산의 능선이 보이는 것에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안개가 짙어 발치만 보며 걷는 시간이 많았다. 산 속의 모든 것들이 가을서리를 맞아 갈색으로 떨어져 내리는 이 계절에, 짙은 초록으로 돋아 난 나무 아래의 어린 풀이 있었다. 이런 계절에 초록을 보여주니 존재 자체만으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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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고 암울했던 어린시절

나는 왜 나의 존재를

부정하기만 했을까




존재 자체만으로 고마워 하는 법을

그때 미리 알았다면

나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는 모든 것을 부정하기만 했다.

짙은 안개로 꽉 차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은 날들을 부정했고, 나의 눈과 귀를 막고 고통과 억압만 주는 부모를 부정했고,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내 자신을 부정했다.




나는 내가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끔찍한 상상만 했고 언젠가는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주어진 미래란 죽음 아니면 감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짙은 안개 속에서 매일 울기만 했다. 흠씬 두들겨맞는 현재가 무서워서 울었고, 지금보다 더 암울할 미래가 무서워서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나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울어도 나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먼 곳을 보려하지 않고

그저 발치만 보면서




지금처럼 묵묵히

걷는 법을 알았다면




나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안개를 보지 않고 발치만 보며

날씨야 어떻든 대간에 올랐으니 길을 이어가듯




부모를 보지 않고 내 자신만 보며

환경이 어떻든 태어났으니 내 할 일을 했다면




나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산을 보지 못하는 날씨는 나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무빙워크 위에 서서 윈도우스크린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지나온 삶이 눈 앞을 지나간다. 순차적이지는 않지만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




어느새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안개입자가 눈동자에 부딪혀

눈물이 되었다.




원방재에 도착했다. 나는 여기서 물을 채워가야 한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계곡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렸으니 물이 말랐을 리는 없다. 친절하게도 계곡으로 가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유후~ 계곡이다!




나는 안개 낀 계곡에서 밥을 끓여 먹고, 세수도 하고 양치도 했다. 아! 개운해~ 날이 궂어서 머리를 감는 것은 그만두었다. 이런 날 머리를 감으면 마르지도 않고 괜히 더 찝찝하기만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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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서 지친 발을 쉬며 밥을 데워 먹는 것은 백두대간을 타는 아주 큰 기쁨 중의 하나였다.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다면 대한민국의 산에는 계곡이 있다! 산에 계곡이 없다면 등산 인구는 지금의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해 본 사람은 안다.

계곡에서 씻는 것이 얼마나 개운하고

계곡에서 식사하는 것이 얼마나 맛나고

계곡에 앉아 밥이 끓기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낭만적인지를!




계곡에 앉아있던 한 시간동안 안개는 더욱 짙어져 있었다. 다시 대간을 이어가기 위해 원방재로 돌아나오자 그야말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오리무중이 되어 있었다.




무슨 안개가 이리도 짙은지. 이런 날씨엔 보이는 것이 없어 그냥 묵묵히 걷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처음 등산을 시작하고 지리산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여름 장마기간이라 지리산을 걷는 내내 이런 풍경이었다.




아... 지리산 그립다.

가고 싶다!




산에 있으면서도 산을 그리워한다.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도 항상 외로운 것 처럼.




분명 비가 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짙은 안개입자들이 나뭇가지에 부딪혀 비처럼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까부터 우비를 입었다 벗었다 혼자서 지랄 생쑈를 하고 있었다. 우비를 입자니 덥고 땀차고 벗자니 옷이 점점 젖어든다.




상월산을 지나 이기령에 닿았다. 아까 계곡에서 점심을 먹었던 '원방재' 그리고 이곳 '이기령', 두 곳 모두 자동차가 올라오는 임도와 만나는 곳이었다. 비처럼 짙은 안개 때문에 여기서 그만 탈출할까? 하는 생각을 계속 했다.




하지만 국도가 아닌 임도. 지나가는 차도 없고 지도를 보니 마을까지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여기서 탈출을 한다해도 해가 지기 전에 시내버스가 들어오는 큰 마을을 만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탈출 할까?

계속 갈까?




이 생각을 쉼없이 하면서도 나의 두 발은 쉼없이 대간을 이어가고 있다. 몸 따로 생각 따로다.




등산로에는 작고 여리고 하얀 나무들이 줄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은빛 자작나무가 물기에 젖어 그저 평범한 흰색으로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등산로에 작은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오 마이 갓!!!

이것이 너덜길의 시작일 줄이야!!!




등산로에 일정하지 않은 돌들이 너덜너덜 깔려 있어서 걷는 내내 두 다리가 너덜너덜 해지는 곳을 '너덜길' 이라고 한다. 걷기 좋게 큰 돌을 박아 놓은 등산로가 아닌 크기가 제각각인 돌들이 제 멋대로 흩어져 있는 길이다. 너덜길은 무릎과 발목에 무리가 많이 가고 까딱 잘 못했다간 그대로 쭉 미끄러진다. 게다가 오르막이 나와도 스틱을 사용할 수 없어서 등산객들이 가장 싫어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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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비(같은)는 오고

바닥은 너덜이고

길은 오르막이고... 젠장!!!




조심조심 너덜을 벗어났다 싶으면 오르막 경사로가 나타나고, 오르막 경사로를 벗어났다 싶으면 다시 너덜길이 나타난다. 이 짓을 도대체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오후 4시부터 비박할 평지를 찾아 눈을 희번득거리며 걸었는데 계속 좁은 등산로에 비탈길만 나타나 1인용 텐트를 펼칠 공간도 없었다. 그러다가 5시 정각, 2인용 텐트 한동이 딱 맞게 들어갈만한 좁은 공터가 나타났다. 나는 주저없이 배낭을 내리고 텐트를 쳤다.




안개가 짙어 어둠도 일찍 내릴 것 같은 오늘같은 날씨는 더 걷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더 가봐야 이보다 좋은 비박지도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부랴부랴 텐트를 치고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이때쯤부터 안개결정이 물 되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짜 비가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배가 많이 고팠지만 밥을 먹기엔 번거로웠다. 하지만 몸이 으슬으슬해서 따뜻한 것을 먹기는 먹어야 했다. 나는 밥 대신 스프를 끓여먹기로 했다.




입구와 천장이 낮아 들어가면서부터 누워서 들어가야 하는 1인용 비비쌕 텐트 안에서, 나는 버너와 코펠을 이용해 스프를 끓여먹는 기염을 토했다! 무려 텐트 안에 누워서 말이다!!!




아, 진짜 별 별...

별 지랄을 다 해보는구나...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8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백복령 지나 비박 (강원 강릉과 정선의 경계) - 원방재 - 계곡 - 상월산 - 이기령 지나 비박 (강원 정선과 동해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3일 목요일

episode32.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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