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신선들이 노니는 곳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비가 내리는 산. 나는 1인용 텐트 안에서 옆으로 누워 식사를 했다.




누워서 버너에 불을 붙여

누워서 코펠에 스프를 끓이고

누워서 스프와 쏘세지 2개로 저녁을 해결하고

누워서 물 마시고 코펠 닦고

누워서 물티슈로 세수 하고 양치도 하고

누워서 스킨로션 바르고 일기 쓰고 지도 보고...




아오! 팔 저려!




더 이상은 팔이 저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 팽개치고 똑바로 누워 텐트를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제발 내일 아침에는 비가 멎어야 할텐데

비 맞으며 텐트 접는 거 진짜 싫은데

만약 내일 아침에도 비가 온다면

나는 비가 그칠때까지 텐트 안에 누워서 지낼래




텐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틀이고 삼일이고

누워 있을래...




다행히도 비는 저녁 7시반에 멈추었고 밝은 달빛이 텐트까지 비쳐들었다. 달빛을 감상하다가 눈을 감았다. 비가 오고 난 이후인데도 날이 따뜻해서 텐트 입구를 열어놓고 자려다가, 혹시 뱀이나 곤충이 텐트 안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구를 닫았다.




동이 터오는 새벽. 새 한마리가 텐트 입구에서 날개를 퍼덕였다. 텐트 문에 부딪히고도 새는 열번 정도 날개를 부비다가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입구를 열어두고 잤다면 새가 텐트 안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누워있기도 좁은 텐트에 새가 들어온다면... 으으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새와 내가 둘 다 얼마나 비명을 지를지. ㅎㅎㅎ 이렇듯 산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날이 아무리 따뜻해도 입구는 꼭 닫아두고 자야한다.




아침 해는 찬란했지만 나의 텐트는 아직도 비에 젖어 있었다. 햇볕에 텐트가 다 마를때까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는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라 종주를 빨리 끝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한 곳에서 이삼일씩 뭉개고 있어도 상관 없었다. 그럼에도 왜 해가 뜨면 어김없이 다음코스로 이동하는 걸까?




오늘도 귀찮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길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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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도착한 '갈미봉' 부터는 '쉰음산 군립공원' 의 권내였다. 이곳에서는 청옥산이나 두타산이 훨씬 더 유명한데 왜 해발 688m 밖에 되지 않는 쉰음산의 이름을 따 군립공원을 지정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집을 떠나온지 나흘밖에 되지 않았다. 첫째날은 강릉 바닷가에서 야영을 했으니, 등산을 한 날은 사흘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하산해서 서울로 돌아간다. 이유는 이 곳의 산 아래에 계곡이 있는데 그 계곡이 다름 아닌,




신선들이 노닌다는
무릉계곡이기 때문이다!




무릉계곡의 입구에 위치한 '무릉반석' 은 하나의 바위가 무려 1,500평의 크기다. 바위 하나가 그 위에 천 명의 사람이 앉아도 될 만큼 크고 넓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변 절경도 아름다워 옛부터 시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 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나는 오늘 갈미봉과 고적대를 지나 연칠성령 까지만 백두대간을 타고, 이후로는 무릉계곡을 따라 하산할 예정이다. 아! 벌써부터 심장이 나대기 시작한다.




어제와는 다르게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다. 아직 이른 오전인데도 햇살이 찌를듯이 강렬하다. 갈미봉을 지난 어디쯤에선가 엄청나게 넓은 절벽바위를 만났다. 길게 세워진 넓은 바위 하나가 낮은 산봉우리 하나와 맞먹는다.




이런 바위라니, 이런 바위라니!




벌써부터 이런 바위라면

무릉계곡의 반석 (넓고 평평한 큰 돌) 은

얼마나 더 압도적일 것인가!




길을 이어갈수록 점점 자주 만나게 되는 바위들의 자태가 보통이 아니다. 날도 더웠지만 멋진 바위 봉우리들이 시선을 잡아끌어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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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햇살 뿐 아니라 하늘과 구름도 제 몫을 다 하고 있었다. 높고 파란 가을하늘에 흰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산의 능선은 아름답고 바위는 기똥차다. 좀 전에 감탄하며 지나온 산봉우리가, 멀어져서 다시 보면 더욱 감탄스러웠다.




그러니 나도모르게 계속 뒤돌아보게 된다.

뒤를 접어두고 앞만 보며 걸으면

무지하게 후회스러울 곳이다.




곧 도착한 연칠성령에서 대간길을 버리고 무릉계곡으로 내려간다. 산에 온지 3일 밖에 되지 않아 벌써 하산하려니 살짝 서운했지만, 무릉계곡을 버리고 대간을 계속 이어간다면 훨씬 더 서운할 일이 생기겠지.




연칠성령에서 아래로 향하는 등산로에도 로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굳이 로프를 잡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역시나 경사는 심하다. 교과서에서 배운 '동고서저', 우리나라 산맥은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다. 즉, 동쪽 탈출로는 경사가 가파르고 서쪽 탈출로는 경사가 완만하다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리가 후덜덜 떨리는 동쪽 탈출로는 손사래가 쳐질만큼 싫었지만, 강원도의 절경은 모두 산맥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니 백두대간을 타다가 절경을 만나려면 항상 동쪽으로 하산해야만 했다. 이러니 사람들이 등산은 않고 계곡만 둘러보고 가는 것이다. 백두대간만 아니라면 나도 굳이 이런 산은 오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 연칠성령에서 무릉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비록 경사는 가팔라도 등산로가 넓고 선이 고왔다. 더불어 가을 낙엽이 가득 깔려있어서 낭만적이고 포근한 느낌까지 주었다. 가을볕 따뜻한 오늘같은 날은 이런 곳에 누워 잠깐 낮잠을 즐겨도 좋을 것 같은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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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의 지류를 만나면서부터 경사가 완만해지기 시작했다. 물 위에 떨어진 가을 낙엽은 예쁘고 폭포수는 시원하게 떨어진다. 어제의 날씨 덕분에 이토록 마른 가을날 무릉계곡의 폭포는 수량이 풍부했다. 어제의 날씨를 견디고 대간에 남아있길 잘했구나!




길을 이어가는 내내 계곡의 상류에는 이름 없는 폭포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폭포를 형성한 계곡의 절벽이 얼마나 깊고 높은지 그 장관을 사진에 담으려 해도 다 담기지 않았다.




비록 나무에는 단풍이 모두 지고 없었지만 그 단풍잎들이 등산로를 찬란하게 수놓고 있었다. 붉은 단풍길과 곳곳에 나타나는 폭포, 그리고 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 아! 행복하다. 길을 걷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이런 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

지나가는 산객들에게 차도 한잔씩 대접하고

날 궂은 날엔 하루씩 재워주기도 하면서

산을 벗어나지 않고 살고 싶다.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를

매일같이 들으며 살고 싶다.




나의 거실 창으로

우리나라의 사계절을

오롯이 느끼며 살고 싶다.




등산로엔 언젠가부터 널찍한 반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계곡의 바닥과 그 주변까지 모두 바위인데, 그 바위가 단 하나의 바위다.




어떻게 하나의 바위가 이렇게 넓을 수 있지? 바위가 너무나 넓고 아름다워서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무릉반석' 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란다. 무릉반석은 계곡의 입구에 있는 것이고, 지류에 있는 바위들은 모두 이름 없는 너럭바위란다.




말도 안돼!

이것들이 모두 무명씨라니!

이렇게나 아름답고 고혹적인데!




이름 없는 아이들이 이정도라면

진짜 무릉반석은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것인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물이 흐르는 계곡의 바닥을 형성하는 것이 '고작' 하나의 바위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경이로웠다. 보통의 계곡 바닥은 자잘자잘한 돌맹이와 돌덩이들로 형성되어 있지 않던가. 무척이나 넓고 평평한 돌 하나가 온통 계곡의 바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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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거닐고 싶은 유혹이 솟구쳤다. 여름이라면 절대 참지 않았을 것이다. 여름이라면 이 높은 곳까지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겠지? 내 눈에 유혹적인 곳이라면 이미 대한민국 사람들도 다 알고 있겠지.




깊이를 알 수 없는 폭포와

붉고 찬란한 단풍길과

넓이를 알 수 없는 반석의 향연




내려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살까?




나의 텐트가 1인용 비비쌕이 아니고 2인용 돔텐트였다면 이곳에서 2박 정도 더 머물렀다 하산했을지도 모르겠다. 식량은 부족해도 계곡물이 풍부하니 굶어죽을 염려도 없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머물고 싶으면서도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계속 걷고 싶었다.




지금까지도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계곡의 유명한 여기저기는 얼마나 더 아름다울지

빨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리 가도 가도

계곡의 아름다움은 줄어들지 않는다.




아무리 가도 가도

나의 감탄은 지치지 않는다.




문득 걷다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계곡을 둘러싼 산봉우리에는 절리를 형성한 멋진 바위와 소나무가 즐비하고, 다시 시선을 내려 아래를 보면 너른 반석과 바닥에 떨어진 단풍이 끝간데 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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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버릴 것 하나 없는 이 곳은

옛날 옛적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무릉계곡.




역시!

신선이 노는 곳은 물이 다르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신선들이

다른 곳 가지 않고 찾는 곳이니

그 경치가 오죽하랴!




'문간재' 를 지나 더 아래로 내려가자 등산안내 표지판이 나타났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그 유명한 '용추폭포' 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하늘문' 이 있다고 한다. 나는 유명하디 유명한 용추폭포보다 하늘문이 더 궁금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연이 만든 문' 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다.




그래서 용추폭포는 다시 대간을 이어가는 날 보기로 하고, 오늘은 하늘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실 폭포나 하늘문이나 다 지척에 있는 것들이고 나는 정오부터 무릉계곡으로 접어들기 시작해서 하산하는 길에 이 모든 것들을 다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인간계를 벗어난 무릉계가

상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서

내게 남은 시간을 다 써버렸다.




신선이 노니던 무릉계를

한낱 인간이

하루만에 다 둘러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왜!!!

우리나라 등산지도의 예상 등산시간에는

'자연을 감탄할 시간' 을 포함시키지 않는 것인가?!!!




그냥 걸어서 2시간 걸리는 코스가 유독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면, 예상등산시간은 3시간이라고 표기해줘야 마땅한 것 아닌가 말이다! 이런 경치를 두고 제 시간에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괜히 지도탓을 하며

하늘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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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7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이기령 지나 비박 (강원 정선과 동해의 경계) - 갈미봉 - 고적대 - 연칠성령 - 무릉계곡으로 하산 (강원도 동해시)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episode33.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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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수요일은 쉬고

목요일에 다시 찾아뵐게요~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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