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신선놀음 흉내내기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무릉계곡의 두타산성.
산성의 터만 남은 이곳에서는 지난번 하늘문을 거쳐 지나갔던 관음암이 정면으로 바라다 보였다. 이곳에서 보니 관음암 아래 절벽으로 어마어마한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 관음암이 저렇게나 높은 곳에 있었구나. 하늘문과 관음암을 오를때 엄청나게 올라가긴 했지만, 건너편에서 바라다보니 더욱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저렇게나 높은 곳에 길을 내고 절을 짓는 것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일까?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오늘도 하늘문을 오른다. 지난주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이번주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떠나오면서도, 내내 하늘문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래서 오늘의 마지막 코스에 하늘문을 배치해 두었다. 오늘은 하늘문 근처에서 마음껏 여유를 부려야지!
엿새 전, 너무나 예쁜 빛을 발산하던 하늘길의 노란단풍은 떨어지기 직전의 짙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가을의 황금빛이란 그것을 만끽할 시간이 너무도 짧기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가 지고 있었다. 느릿느릿 하늘문을 다 오르고 나자 거뭇거뭇 날이 어두워졌고, 마음껏 여유를 부리며 해가 넘어가는 풍경을 만끽했더니 어느덧 밤이었다. 이 깜깜한 밤에 나는 무릉의 바위 위에 덩그러니 홀로 남았다.
이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어서 어둠이 내리고
홀로 남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나는
신선바위 위에다
텐트를 쳤다.
지난번 무릉계곡을 떠나올 때 신선바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계속 머릿 속을 맴돌았다. 신선바위에 앉아 일몰과 일출의 빛 속에서 하루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신선바위에서 하룻밤을 보내 보고 싶었다. 꼭 그러고 싶었다.
처음 백두대간을 시작했을 때, 어떤 사람의 블로그에서 '대간 종주 중 주의해야 할 점' 을 접한 적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암릉 위에 텐트를 치지 않는다' 였다. 나는 그 문장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더랬다.
-아니, 도대체 바위 위에다 텐트를 치는 미친놈이 어디 있다고 그래?
- 자다가 바위 위에서 굴러 떨어지면 어쩌려구?
- 돌 위에서 자면 허리가 얼마나 아프겠어!
- 말이 돼?
음... 그런데...
여기 있어요, 그 미친놈!
제가 바로 그 미친놈이에요~ 하하핫!!!
멀쩡한 사람도 미친놈으로 만들어버리는 이곳은 다름아닌 무릉계곡. 인간이 감히 신선의 영역을 넘보았으니 그 행동이 정상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신선바위 위에 텐트를 치고 등산로와 인접한 바위의 뿌리 쪽에 등을 딱 붙이고 잠이 청했다. 잠을 자는 동안 등만 잘 붙여둔다면 저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음력 10월 15일
오늘은 보름이었다.
꽉 찬 달이
무릉계와 신선바위와 바위 위에 누운 나에게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일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바위에서의 비박은 절대로 권할 일이 못 되었다. 자고 일어나면 바위와 내가 물아일체 되어, 등과 허리 엉덩이 뒷통수까지 돌덩이처럼 딱딱해지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되기 때문이다.
으아! 내 허리!
으악! 내 등!
몸뚱이를 몇 번이나 뒤집으며 잤는데도 온 몸이 돌덩이처럼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으하하핰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도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_
이 풍경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으아아아아~ 이러니!
한낱 인간이 제 몸뚱이 상하는 줄을 모르고
신선 흉내를 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약한 비가 올지 모른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비는 전혀 내리지 않고 별이 초롱초롱 했다. 시원한 계곡물소리에 서늘하면서도 적당한 기온까지!
비록 몸뚱이는 돌덩이가 되었지만 나는 바위를 미워할 수 없었다. 넓고 부드러운 바위가 온종일 햇볕을 받아내어 밤이 깊어도 식을 줄 모르고 그 따뜻한 품으로 나를 안아준 것이다. 지상의 단풍까지 모두 사라져버린 깊은 가을의 밤이었는데도 전혀 추운줄을 몰랐다. 오히려 바위 위라서 따뜻했다.
암릉 위에서 잠을 청한 미친놈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비명이 나올 것 같은 몸뚱이를 이끌고도 미친년처럼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크압! 게. 다. 가!!!
신선바위에 앉아 끓여먹는 아침식사는 감히 인간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천상의 맛을 선사했다.
동이 트는 무릉계곡의 신선바위에 앉아, 폭포와 계곡이 내는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먹는 아침식사라니! 이것은 더한 값을 치르고라도 꼭 누려봐야 하는 것이었다.
유명관광지에서 비박을 하면 평소보다 서둘러 텐트를 정리하고 배낭을 싸야 한다. 생각지도 못한 시간부터 산악회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종주를 시작한다.
지척의 관음암에 들러 물통을 채운다. '절'이라는 공간은 사시사철 언제나 콸콸 흘러나오는 약수가 있어서 산객들에게는 오아시스같은 곳이다. 물을 받고 부처님께 합장하고 나온다. 오늘도 귀한 물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음사를 찍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나와 신선바위를 지나고 하늘문에 닿았다. 하늘문으로는 두번이나 올라왔지만 내려가는 것은 처음이다. 이 급경사 철계단을 내려가려니 으으으... 올라올 때보다 더욱 다리가 후들거린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경사가 심할수록 차라리 오름짓이 낫다. 급경사 내리막은 다리에 힘을 주려해도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나의 박배낭이 자꾸 철계단에 걸려서 진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똑바로 내려오자니 계단의 단에 배낭이 걸리고, 옆으로 내려오자니 계단의 난간에 배낭이 걸린다. 앞으로도 옆으로도 아닌 45도 각도를 유지하며 한발 한발 내딛어 조심히 내려온다.
오늘은 지난번 내려왔던 길을 그대로 짚어 계곡을 따라 연칠성령으로 올라갈 것이다. 연칠성령에 닿으면 그때부터는 백두대간을 타고 두타산으로 향한다.
아침부터 듣는 계곡의 물소리와 숲의 새소리는 누구라도 엄마미소를 짓게 한다. 거기에 더해 아침의 상쾌함까지! 곳곳에 나타나는 너른 반석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무시로 솟아 올랐다.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물가의 너럭바위에서 배낭을 내렸다. ㅎㅎㅎ 사실은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기 전에 꼭 할 해야할 일이 있었다.
배낭을 열어 칫솔과 치약, 비누와 수건을 꺼내 양치를 시작했다. 산에서 양치를 할 때는 치약을 팥알만큼만 짠다. 그리고 산에서 머리를 감을 때는 반드시 비누를 사용한다. 나에게 물을 내어준 귀한 자연에 나도 귀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
처음에는 이런것도 몰랐다. 처음으로 혼자 등산을 하던 날, 지리산의 노고단대피소에서 물받이 드럼통 너머로 흘러넘치는 물이 아까웠다. 그래서 거기 앉아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가 공단 직원에게 걸려서 된통 혼이 났었다.
이후로 머리를 감는 것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그리고 샴푸 대신 비누만 사용했다. 계곡물로 머리를 감으면 린스 없이 비누만 사용하는데도 머리칼이 뻣뻣해지지 않는다. 물이 정말 좋은 계곡을 만나면 윤기가 자르르 흐르기도 한다.
신선들이 노니는 무릉계곡의 반석에 앉아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는 것도_
아아! 얼마나 낭만적이던지!
깊은 가을의 계곡물은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은 고통이 아닌 개운함을 전해주었다. 신선바위에서 돌덩이처럼 굳었던 나의 몸뚱이가 어느덧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고작 세수하고 머리를 감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쌍폭포의 낙숫물로 마사지를 받으면 얼마나 더 개운할지!
이곳이 군립공원으로 관리되는 곳이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로 달이 뜬 자정의 밤에 폭포를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일주일 전의 그 곱던 단풍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고도가 낮은 지상의 나무에도 단풍이 없고, 등산로에 떨어져 황금길을 보여주던 단풍들도 모두 사라졌다. 노랗고 빨갛던 예쁜 등산로는 온통 암갈색으로 변해있었다.
그래도 물소리가 끝내주는 계곡이 있어서 걷는 것이 지겹지 않았다. 시원한 계곡과 이름없는 폭포들을 모두 지나 이제는 산 능선으로 접어들 차례가 되었다. 계곡이 끝나면 그때부터 급경사가 시작된다.
단풍도 잎새도 없이 마른가지만 펼치고 있는 나무 사이를 묵묵히 걸었다. 경사가 심한 능선을 따라 비스듬히 자라는 나무들이 신기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내 뒤를 조용히 따라오고 있는 아저씨 한분이 있었다. 작고 가벼운 배낭에 양 손은 주머니에 찔러넣은 자세로 이 급경사 오르막을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드렸더니, 아저씨는 나에게 어디까지 가는지 물으신다.
두타산 찍고 댓재 방향으로 간다고 했더니, 그러면 버너 좀 빌리자고 하신다. 버너가 고장난 버너인데 라이터가 없어서 불을 못 붙인다며, 연칠성령에서 라면을 끓여먹어야 하는데 굶게 생겼다는 것이다.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라이터도 있고 버너도 있으니 걱정마시라고 했다.
아저씨도 나처럼 혼자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뒤로 동행이 두명 더 있다고 하셨다. 한명은 우리 바로 뒤에 따라왔는데, 나머지 한명은 도무지 올라올 기미가 안 보인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7구간
(남쪽 끝이 1, 북쪽 끝이 24)
진행 구간 : 무릉계곡(강원도 동해시) - 산성터 - 하늘문 - 신선바위 비박 - 하늘문 - 칠성폭포 - 연칠성령 (강원 삼척과 동해의 경계)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10일 목요일 ~11월 11일 금요일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 3 5 -
월화 목금 주 4일 연재합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