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연칠성령에 당도하기 직전 막바지 코스는 엄청난 경사로다. 등산로에 설치된 로프를 잡지 않으면 위로 올라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첫번째 아저씨는 로프를 잡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자세로 사뿐사뿐 가볍게 잘도 올라가신다. 나는 로프를 잡고 낑낑대며 올라간다. 이건 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내 배낭이 무척이나 무겁기 때문인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연칠성령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아저씨가 버너며 코펠을 다 꺼내놓고 스탠바이 중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기도 전에 아저씨께 라이터를 건네드렸다.
물로 목을 축이고 나도 점심을 먹으려고 배낭을 열었더니, 아저씨들이 본인들 밥 나눠먹자며 내것은 꺼내지 말라고 하신다. 일행이 총 세 명 이었는데 마지막 사람이 다리에 쥐가 나서 중간에 하산하겠다는 연락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 인분의 식사가 남는다고 하셨다.
알고보니 아저씨들은 산림청공무원이었다. 다리에 쥐가 나서 올라오지 못한 그 분은 무려 '산악구조대원'. 나는 너무 웃겨서 깔깔깔 웃었다. 구조대원인데 본인이 산에 못 올라오는 상황이라니. ㅎㅎㅎ 아저씨들도 이런 상황이 어이없는지 멋쩍게 웃으셨다.
아저씨들은 청옥산에 설치된 통신소를 확인하러 왔다고 한다. 혹시 강풍에 안테나가 부러진 것은 아닌지 정기적으로 나와서 확인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산림청공무원이 산에서 불 피워도 돼요?"
내가 장난스레 물었더니 아저씨가 대답하신다.
"산불방지기간에는 안돼죠. 그 기간 피해서는 조심히 사용하면 돼요. 특히나 오늘같은 날씨에는 낙엽을 모아서 일부러 불을 붙여도 불이 안 붙어요."
하긴, 그저께 까지도 비가 왔는데 서늘하고 습한 이런 날씨에 할 만한 걱정은 아니었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고 청옥산까지 함께 이동했다.
분명 함께 출발했는데 도착시간은 왜 그리도 차이가 나던지. 거의 날아가다시피 하는 아저씨들을 따라 나도 뛰다시피 걸었는데 아저씨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아저씨가 10년 전에 본인도 백두대간을 종주했었다고 하시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었다.
아저씨들은 청옥산의 통신 중계소가 이상없음을 확인하고 학등을 따라 무릉계곡으로 하산하고, 나는 백두대간을 타고 두타산으로 향했다.
청옥산에서 두타산으로 향하는 길은 완만한 등산로가 오르락 내리락 쉼 없이 이어진다. 걷기에는 수월하지만 나무들이 빡빡하게 자라고 있어서 탁 트인 조망지가 없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잎새가 모두 떨어지고 없는 계절에는 볼 것이 아무것도 없는 길이다.
게다가 날씨까지 우중충해서 무념무상으로 앞만 보며 걸어야 했다. 코 앞만 보며 걸을 때는 날씨가 왜 이모양이지? 싶었는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머리 위 하늘은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무척이나 예뻤다.
하, 신기하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한참을 걸어도 내 머리 위 하늘만
밝고 환하다.
주변은 어둡고 우중충한데 정확하게 머리 위 하늘만 동그랗게 밝고 환했다. 신기하다. 오늘은 외계생명체의 교신이 들어오는 날인가?
그렇게 두 시간쯤 걷고 나서 두타산 정상에 닿았다. 두타산 정상부는 주변이 탁 트여 그간 답답했던 마음이 일시에 뚫렸다. 갑갑했던 시야는 뚫렸지만 먹구름은 여전했다. 주변이 온통 먹구름인데 머리 위 하늘만 맑고 청명한 것 또한 여전했다.
두타산 정상부에는 굉장히 넓은 공터가 조성되어 있고, 가늘긴 해도 쉼없이 물이 흘러나오는 샘터도 있었다. 비박을 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박을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아직 4시 밖에 되지 않아서 좀 더 걷기로 했다.
두타산 정상에서 통골재와 댓재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에서도 꽤 오랫동안 시야가 트여 좋았다. 하지만 고도가 낮아지면서 어느덧 나무들이 들어차고, 그때부터는 또 앞만 보며 걸어야 했다.
통골재를 지나고도 아직 야영할 곳을 정하지 못했는데 어느덧 해는 기울어가고 있었다. 텐트를 펼치자면 펼칠 수 있는 곳이 몇군데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박을 하고 싶지 않은 장소들만 나타났다.
걷다보면
'그래, 오늘은 여기다!' 라는 느낌이 오게 마련인데
그 느낌이 오지 않았다.
뭔가 불편하고 꺼림칙했다.
나는 아직도 등산로 위를 쉼 없이 걷고 있는데 어느덧 서쪽 하늘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진한 먹구름은 그새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지 끝내주는 석양이 나무사이로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만한 공터가 나올때마다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캄캄해질 때 까지 걷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댓재 2.8km' 이정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완벽한 평지도 아닌 경사지 였는데, 더 이동해봐야 답이 없을 것 같았다.
어둠이 내리면서 추위도 따라 몰려왔다. 확실히 어제와는 다른 온도다. 경사진 곳에 텐트를 치고 들어가 누웠더니, 누워있는데도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거꾸로 누워 머리로 피가 쏠리지 않는게 어디냐며 나를 위로했다.
텐트의 입구쪽이 달과 해가 뜨는 동쪽이었다. 보름이 하루 지난 달은 여전히 둥글고 밝았다. 나는 텐트를 열어놓고 한참동안 달빛을 감상했다.
날이 많이 추웠다.
이제는 가을이 아닌
겨울의 문턱인 모양이다.
자고 일어나니 토요일이었다. 그동안 평일종주만 해서 몰랐는데 토요일이 되니 꼭두새벽부터 백두대간을 타는 산악회 회원들이 많이도 지나갔다. 대간을 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몰랐다.
그동안은 비박을 하는 동안 새벽에 사람이 지나간 적이 한번도 없었다. 처음으로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신용 무기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런데 텐트 밖으로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 헉! 이게 뭐야?
- 텐트야. 요즘 비박하는 사람들 많더라구.
- 그럼 이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거야?
- 그렇겠지.
- 야, 무섭다. 빨리 지나가자.
나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구일지 몰라' 두려웠는데, 그들 역시 텐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몰라' 꺼림칙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나가는 사람 중 누구도 텐트 안에 누워있을 사람이 '여자' 일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이런 곳에 혼자서 텐트를 치고 잠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기골이 장대하고 싸이코 기질이 다분한 남자일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두려움을 내려놓았다. 호신용 무기를 쥐고 있던 손도 느슨해졌다. 그들의 두려움을 확인한 순간 내가 두려워 할 이유가 사라졌다.
지나가는 산객들 덕분에 새벽 3시에 잠이 깨어 더이상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이 들만 하면 누군가 지나가고 또 잠이 들만 하면 누군가 지나갔다. 아... 주말종주는 평일종주보다 더 쉬운 것이 아니구나.
깜빡 잠들었다 일어나보니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의 태양은 선명하고 아름다웠지만 산에는 언제부턴가 미친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소리가 너무 거세어서 텐트 밖으로 나가기 싫었다. 다행히도 텐트 입구가 바람의 반대방향이라 텐트 안으로는 새벽바람이 들어오지 못했다.
바람은 미친듯이 불지만 날씨는 좋았다. 해도 반짝 하늘도 맑고 능선 아래로 시야도 깨끗했다. 텐트를 접고 짐을 싸는 동안 또 한 팀의 산악회 회원들이 우루루 지나갔다. 사람들은 신기한듯 나를 구경하며 지나갔고, 나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잠옷 바람으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아... 앞으로 주말종주는 피해야겠다.
오늘은 댓재를 지나 황장산을 올랐다가 큰재와 자암재까지 가볼 생각이다. 자암재 아래로는 강원도 삼척의 '환선굴' 이 있는데, 오늘 자암재에서 비박을 하고 내일 아침에 환선굴을 가볼 수 있다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의 두타산 이후로 힘든 코스는 다 끝난 것인지 오늘의 경로는 무척이나 완만했다. 오전 8시반부터 오후 4시까지, 하루종일 걷는 동안 단 한번도 힘들지 않았다. 신기했다. 등산이 이렇게나 편할수도 있는 것인가?
아침에는 미친바람이 계속 불었지만 오전의 대간길이 산의 동쪽능선을 타고 가는 길이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다 막아주었다.
댓재에 도착하기 직전에 '햇댓등' 이란 곳을 지나게 된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볼 것 없는 늦가을의 산에서는 소나무가 가장 반갑다. 초록의 소나무를 만나니 기분이 화- 하게 좋아졌다.
댓재에 있는 가게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사고, 생수는 없는가 물으니 나의 물병을 채워주신다. 과자를 들고 황장산에 올라 다리를 쉬며 과자를 먹었다.
산 아래로 삼척시내와 바다가 보인다. 백두대간을 타는 내내 아무리 가도가도 강릉이 끝나지 않기에 "아직도 강릉이야?" 를 입에 달고 다녔는데, 강릉이 끝나자 "아직도 강원도야?" 로 레퍼토리가 바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릉과 강원도는 너무 길다. 이삼일 쯤 걸으면 시의 경계가 바뀌어 있어야 성취감도 높아지는데, 강릉에서만 장장 7일을 보내야 했다. 매일 8~9시간씩 쉬지 않고 걷는데도 말이다.
미친듯이 불던 바람은 어느덧 잠잠해졌다. 바람이 멈춘것인지 아니면 내가 바람의 영역을 벗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큰재에 앉아 점심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라 본 하늘은 아주 예쁜 구름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의 도움의 받아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는 것도 기분좋은 일이지만, 이렇듯 홀로 조용히 앉아 자연 속 세상을 만끽하는 것도 정말이지 좋았다. 이 느낌이 좋아서 대간을 멈출 수 없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7~16구간
진행구간 : 연칠성령(강원도 삼척과 동해의 경계)-청옥산-두타산-통골재 지나 비박-댓재-큰재(강원도 삼척시)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11일 금요일 ~12일 토요일
이번주부터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합니다~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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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