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큰재를 지나자 산의 지형과 시골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능선이 무척이나 예쁘게 펼쳐져 있는 풍경을 보면 언제나 감탄이 나온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마음 속까지 시원해진다.
어느덧 눈 앞에는 풍력발전기가 나타나고... 눈 앞의 능선을 죄다 깎아내리는 공사현장이 나타났다. 고랭지배추밭에 풍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역주민들은 커다란 밭에다가 풍력을 반대한다는 글귀를 새겨놓았다. 한참 떨어진 이쪽에서도 보일정도였다.
우리네 삶의 수준 개선과 도시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런 개발이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항상 삼림이 개발되어 그 이득은 도시가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 삶의 터전을 내어 놓아야 하는 사람들은 반대입장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랭지밭 공사장을 지나 숲으로 들어서자 백두대간 등산로에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등산객이 버린 생활쓰레기가 아니었다. TV크기의 종이박스와 하우스용 비닐, 그리고 폐자동차의 고철까지... 길에만 나뒹구는 게 아니라 저 높은 나무 위에도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강원도의 돌바람이 저렇게 만들었을까? 바람이 얼마나 불면 자동차의 고철까지 날아올 수 있는 것일까? 길이 불안해지면 마음까지 불안해진다. 나는 걸음을 재촉해 재빨리 그 곳을 벗어났다.
등산로와 임도를 번갈아 걷다보니 마을이 나타났다. '귀네미마을' 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만난 것 중 대간길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다. 밭 하나만 가로질러 가면 바로 마을이었다. 시간이 맞으면 여기서 민박을 하는 것도 꽤 좋을 것 같았다.
드디어 오늘의 비박지인 '자암재' 에 도착했다. 정말이지 힘 한번 안 들이고 수월하게 왔다. 예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제 겨우 오후 3시 였던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일 아침 둘러보기로 한 '환선굴' 을 향해 당장 걸음을 옮겼다.
강릉 옥계의 석회동굴이 폐쇄되었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는 대간길에 오르기 전에 '환선굴' 이 운영중인지 아닌지 미리 확인하고 출발했다. 환선굴은 이곳 백두대간 자암재에서 1.7km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 내려가서 환선굴을 보면 마을에서 민박을 하고 내일 아침 다시 백두대간으로 올라와야겠다.
역시나 대간길에서 동쪽으로 하산하는 길. 여느 동쪽 탈출로와 마찬가지로 등산로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만났던 동쪽 탈출로 중에서 가장 완만한 경사를 보여준다. 이곳에서의 로프는 그저 울타리 역할인 모양이다.
환선굴이 있는 곳은 '대이동굴지대' 로, 이 일대 전체가 '대이리군립공원' 이라고 한다. 환선굴과 대금굴, 관광지로 개발할 정도로 커다란 동굴을 두 개나 품고있는 곳이다. 환선굴로 내려가는 길 곳곳에 기암이 즐비했고, 기암 둘레에 난간을 설치하여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도 많았다.
전망대로 올라가보면 엄청난 바위 절벽이 코 앞에 닿을 듯 가까웠다. 너무나 가까이 보이는 커다란 바위에 기가 죽을 정도였다. 이런 바위를 품은 곳의 동굴이라니! 빨리 가보고 싶다!
어느덧 로프길 등산로가 끝나고 철계단이 나타났다. 그리고 철계단을 다 오르자
갑자기
동굴이 나타났다!
환선굴이 벌써 나타난 게 아니었다. 등산로가 작은 동굴을 통과해 이어지는 것이었다. 우와아아아!! 동굴을 통과하는 등산이라니!! 동굴의 반대편에서 들어오는 대낮의 빛이 왠지 모르게 신비해 보였다. 무협영화를 보면 아무나 만날 수 없는 무림의 고수가 가부좌를 틀고 도를 닦는 곳, 딱 그렇게 생긴 동굴이었다.
금방 끝나버리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동굴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너덜길이 시작되었다. 이곳의 바위와 돌들이 보통이 아니라서 걷기에는 지랄 같았지만, 너덜구간이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아 힘들지 않게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꺄아~!!!
드디어 환선굴이다아아앗!!!!
원래 환선굴의 입장권은 지상에서 구입하여 동굴까지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와야 하는 것이었다. 산에서부터 내려오느라 매표를 하지 못한 나는 잠시 당황했다. 표를 사러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하나?
혹시 여기서도 표를 구입할 수 있는가 여쭈니 가능하다고 하신다. 오! 감사합니다! 매표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직원분이 묻는다.
"배낭 무겁지 않아요?
여기다 맡겨놓고 다녀 와요."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배낭도 내려놓고 몹시도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드디어 환선굴에 입장하게 되었다.
환선굴은 나의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했다. 몰랐는데 환선굴이 우리나라의 동굴 중에서 최대규모라고 한다. 다 관람하고 나오기까지 한시간이 넘게 걸린다.
무엇보다 동굴 안에 폭포가 있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폭포가 한두개가 아니었다. 이 많은 물이 도대체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엄청나게 많은 물이 콸콸콸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물이 흘러내리고도 동굴이 침식되어 무너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네온색으로 반짝이는 난간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지옥소' 라고 불리우는 곳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위 틈 위에 구멍이 숭숭 뚫린 철제다리를 설치해 놓았다. 동굴 절벽 아래로 소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깊이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지옥의 모습은 아무리 카메라에 담으려 해도 담기지 않았다.
다리를 지나는 내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지옥의 아가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정말로 지옥이 있다면 꼭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흔들다리도 아닌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살면서 마음으로 죄를 많이 지어, 이런 곳을 보면 무섭다. 염라대왕님 앞에 무릎꿇고 앉아 지나온 삶을 싹싹 빌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환선굴에서 이 '지옥소' 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자연의 위대함이 가장 절절하게 느껴지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먼 옛날, 한 스님이 수도를 위해 이 동굴로 들어갔는데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사람들은 스님이 신선이 되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동굴의 이름이 '환선' 이 된 것이다. 당시 스님이 짚고 왔던 지팡이는 환선굴을 오르는 길목의 산신당 앞에 꽂혀 엄나무로 자라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기운이 전해지면 평범한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나무로 자랄 수 있는 것일까? 나의 삶에도 그런 기적이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기적을 맞이하려면 적어도 동굴에 들어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기도만 드리는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겠지?
동굴을 다 둘러보고 나왔더니 입장시간이 마감되어 있었다. 11월 중순의 밤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고 동굴 앞에는 마지막 관람객들이 마지막 모노레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환선굴의 입장 마감시간은 5시. 내가 동굴에 도착한 시간은 4시 반.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직원 사무실을 노크하여 맡겨두었던 배낭을 찾아 모노레일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환선굴의 규모도 큰데다 군립공원이라 입구에는 식당이 즐비했다. 나는 민박을 겸하는 식당에 들어가 1박을 요청했다. 오늘은 백두대간 이후 처음으로 대피소가 아닌 일반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날이었다.
으아~~~~
너무좋아 너무좋아 너무좋아!!!
보일러가 뜨끈뜨근하다!!
겨울 초입의 날씨에도 침낭의 거위털이 주는 온기만으로 잠을 이루다가, 뜨끈뜨끈한 보일러에 등을 지지니 너무나 행복해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골 인심이 후해서 사장님이 보일러를 엄청 높여주셨다. 자다가 너무 더워 보일러를 낮춰야 할 정도였다.
허리가 노곤노곤
온 몸이 노곤노곤
마음도 노곤노곤
말랑해진 몸과 마음으로 개운하게 잘 잤다! 뜨끈한 곳에 지지면서 잤더니, 전날 새벽부터 지나가던 산객들 덕에 잠을 못 이룬 피로가 싸~악 풀려 나갔다. 갈수록 날도 추워지는데 종종 민박을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환선굴 방향으로 오르려니 군립공원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다. 알고보니 우리나라의 군립공원은 어딜 가나 다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정녕 몰랐다.
원래는 국립공원도 다 입장료를 받았었는데 국립공원의 입장료는 2007년에 폐지되었고, 지금은 군립공원에서만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입장료를 내고 오르다보니 환선굴과 대금굴의 갈림길이 나왔다. 쭉 직진하면 환선굴, 왼쪽으로 계곡의 다리를 건너면 대금굴이다. 이곳으로 관광을 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대금굴과 환선굴을 한번에 둘러본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어제의 환선굴만으로 충분했다. 한꺼번에 동굴을 두 개나 연이어 본다면 그만큼 감동이 줄어들 것 같았다.
모노레일을 타고 편하게 산을 올랐다. 모두가 환선굴로 입장할 때 나만 홀로 등산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함께 모노레일을 탔던 몇 안되는 관광객들이
"아가씨, 환선굴은 여기야.
어디 가?"
하며 나를 붙잡았다. ㅎㅎㅎ
"저는 어제 다 봤어요~
오늘은 백두대간 종주해야 해요.
관광 잘 하시고 안녕히 가세요!"
어제 내려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다시 올라간다. 다른 동쪽의 탈출로보다 오르막이 힘들지 않아서 좋다. 그리고 어제 만났던 동굴 등산로를 다시 만났다. 하하하! 어제 보고 오늘 다시 보니 너무나 반갑다.
이야~ 잘 지냈니?
간밤에 별일 없었고?
나는 환선굴의 웅장함보다 이 작고 짧은 동굴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 동굴은 산의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연결해주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6구간
진행구간: 큰재(강원도 삼척)-자암재-환선굴-마을에서 민박-다시 자암재로 이동(강원도 삼척)
진행날짜 : 2011년 11월 12일 토요일 ~13일 일요일
이번주부터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합니다^^
내일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