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맑은 날에도 으스스한 길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자암재로 오르다가 등산로에서 살짝 옆으로 새어 약수터를 찾았다. 어제 내려오는 길에 약수터가 있다는 푯말을 보고 진짜 약수가 나오는 것인지, 혹시 물이 마르지는 않은 것인지 확인해 보았다.




약수는 콸콸콸 수량도 풍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민박집에서 물을 채우지 않고 빈 물병으로 가볍게 여기까지 올라왔다.




약수터에서 대간길을 만나는 자암재까지는 금방이었다. 모노레일에서 내려 자암재까지 1시간 45분이 걸렸는데 체감시간은 고작 40분 정도였다. 힘 한번 들이지 않고 올라 온 것이다. 길이 잘 정돈되고 걷기가 편하니 경사가 심해도 오름짓이 편했다.




오늘은 일요일. 확실히 주말엔 백두대간에 사람이 많다. 자암재에서 쉬며 과자를 먹는 10분 동안 산악회 회원들이 두 팀이나 우루루 지나갔다.




주말을 이용하여 백두대간을 타는 산악회 회원들은 정신 없이 바쁘다. 들머리와 날머리가 정해져 있고,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하산해서 관광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변풍경을 천천히 감상할 시간도 없고, 절경이 나타나도 마음껏 감탄할 시간이 없으며, 정상석을 만나면 인증샷만 찍고 재빨리 다음 코스로 이동해야 한다.




도시의 삶이 바쁘고 지쳐서 산을 찾는 것이 아니었던가? 주말의 산에서까지 이렇게나 바쁘게 목적지만을 향해 가야 한다면, 등산이 취미나 여가활동이 아닌 노동이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도시의 힘겨움을 덜어내기 위해 산을 찾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자암재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지각산 환선봉과 덕항산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완만한 능선 길이었다. 게다가 이 곳의 메마른 나무들은 잘 정돈 되어 자라는 분위기였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이라든지 나무가 팔을 뻗고 있는 각도가 다른 곳보다 예뻤다.




환선굴 방향인 동쪽으로는 능선 바깥으로 종종 절벽이 나타났다. 그 절벽마다 조심하라고 '낭떠러지' 푯말이 달려있었다.




등산로가 매우 선명한데도 머리 위에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등산로 유도선' 이라는 것도 있었다. 이곳이 강원도라서 겨울철 눈이 허리까지 쌓이면 등산로를 구분하지 못할까봐 설치해 놓은 것 같았다.




산책하듯 편하게 걸어 지각산 환선봉에 도착하고, 또 편하게 걷다보니 덕항산 정상이었다. 이렇게나 편한 등산이라니! 산의 풍경은 별 볼일 없어도 기분은 좋았다.




팔자가 기구해서 남편이 죽고 죽어 아홉의 남편을 모셔야 했다는 전설이 있는 '구부시령' 을 지났다. 배가 너무 고팠지만 여기 앉아 점심을 먹으면 내 팔자도 기구해질까봐 쉬지 않고 지나갔다.




잎새가 모두 떨어지고 난 이후의 산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은 없지만, 대신 나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자란 모습이 웅장하고 시원시원한 나무들이 많았다. 지금도 저토록 웅장하고 멋있는데 저 멋진 가지마다 잎새를 달고 있을 계절에는 얼마나 더 멋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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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크고 멋진 나무들에는 저마다 하나씩 정령이 자리잡고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품질과 수종이 같은데 어찌 특정 나무들만 이렇게 멋지고 웅장한 자태로 자랄 수 있겠는가? 산과 나무를 지키는 정령님께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배가 너무 고파서 가다가 주저 앉아 버렸다. 널찍한 공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계속 걷다가는 쓰러질 것 같았다. 아무 등산로에나 퍼질러 앉아 젖은 땅이 나올때까지 마른낙엽을 밀어내고 버너와 코펠을 꺼내 밥을 끓였다. 밥 끓는 냄새가 구수하다.




점심을 먹는 동안 나무 사이로 태양이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의 태양은 무에 그리 바쁜지 얼굴 한번 보기 힘들다. 이 잠깐 동안 얼굴을 스윽 내비치더니 도로 구름사이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어지는 길도 계속 완만하고 걷기 편한 길이었지만 한내령을 지나면서부터 주변 풍경이 스산해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탁 트인 목초지가 나타났는데도 왠지 모르게 을씨년스러웠다. 햇빛만 없었다뿐이지 이정도면 맑은 날씨인데 이상하게 걷는 내내 불안했다.




한내령푯대봉을 지나 건의령에 닿아가자 울창한 전나무 숲길이 나타났다. 지각산 환선봉에서 딱 한번 산아래 능선을 내려다봤을 뿐, 오늘은 하루종일 이렇다 할 조망지가 없었다. 그래서 오후 4시쯤 만난 건의령의 전나무 숲길이 오늘 걸은 길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이었다.




햇님은 하루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서쪽으로 기울어질 시간이 되자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건의령을 지나자, 건의령 직전까지 이어지던 길보다 더욱 을씨년스러운 길이 나타났다. 정말이지 오늘은 건의령의 전나무숲이 전부였나 보다. 버려진 참호 같은 군의 시설물도 나타나고, 백두대간 등산로 바로 옆으로 음침한 분위기의 울타리와 목책이 세워져 있었다.




산에 굴러다니는 돌을 모아 만들어놓은 등산로는 어둡고 축축해 보였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기구가 등산로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보통 백두대간 등산로는 관할 지자체에서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낯선 것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표지판도 세워두고, 인근에 목장이나 군부대가 있으면 이정표로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 곳에는 백두대간의 친절함이 없었다. '건의령' 부터가 삼척이 아닌 태백의 관할지로 들어가는데, 이때부터 등산로는 말도 못하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웅장하고 기품있는 정령의 나무들을 만났었는데, 늦은 오후가 되자 지랄발광춤을 추는 것 같은 마녀나무가 나타났다. 게다가 무덤은 왜 이렇게 자주 보이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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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포에 짓눌린 심장을 부여잡고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걸음을 서둘렀다.




아직도 기괴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어느덧 해는 넘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해가 넘어가는 서쪽으로 산 능선이 높이도 자리하고 있다. 태양이 일찍 사라지면 어둠도 일찍 내릴까봐 겁을 잔뜩 집어먹었는데 다행히 동쪽 하늘은 아직도 밝았다.




언젠가부터 등산로의 동쪽으로 작은 목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의 울음소리가 내 귀에까지 선명히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민가와 가까운 곳에서 비박을 하는 것이 싫었다. 내가 자는 동안 누군가 올라올까봐 두려웠다. 마을이나 민가와 아주 멀리 떨어진 첩첩산중에서 비박을 하는 것이 훨씬 안심이 되었다.




목장과 민가를 피해 계속 걷다보니 날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다행히도 기괴하던 등산로는 모두 따돌린 것 같았다. 건의령에서 3km를 더 이동한 곳에 이정표와 함께 약간의 공터가 있었다. 날이 너무 어두웠고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심하게 불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만!

여기까지!

정말이지 고생했다...




이 곳의 풍경은 그나마 나았지만 지나온 길이 워낙 스산했던 탓에 짓눌렸던 마음이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나는 텐트를 설치하자마자 기어들어가 입구를 닫아버렸다.




바람소리가 점점 심해지고 국도가 가까워서인지 민가의 개 짖는 소리도 들려온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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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등산을 시작했을 때는 산에 오르는 좋은 이유 중 하나가, 밤마다 기절한 듯 푹 잠을 이룰 수 있어서 였다. 그런데 이것도 계속 하다보니 몸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낮에 아무리 많이 걸어도 밤에 잠이 오지 않는 경우가 생겼다.




하아... 미친듯이 부는 밤바람 속에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저 좁은 텐트에 누워 눈만 끔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어김없이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작은 에피소드 하나로 시작한 어린시절의 기억은 산 정상에서 던진 눈뭉치처럼 굴러굴러 집채만한 크기로 나를 압도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어린시절의 기억이 현재의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는 어린시절의 기억 때문에 항상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명 피곤해서 잠자리에 누웠는데도 3시간 안에 잠이 드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차라리 일어나서 다른 무언가를 해보려 하면 눈알이 빠질 듯 아팠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든지 소일거리를 한다든지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었다.




내가 텐트를 짊어지고 백두대간을 올라 지칠때까지 걷는 이유는 잠을 잘 자기 위해서였다. 지칠때까지 걷다가 쓰러지듯 잠이 들면 꿈도 꾸지 않고 잘 잘 수 있었다. 그랬는데... 이제는 이것도 약발이 다 한 것인지 하루 푹 잠들면 그 다음 하루는 잠이 오지 않았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무덤같이 어두운 산에서, 관처럼 좁은 텐트에 누워, 지난 생을 후회하는 망자처럼, 울고 울고 또 울었다. 기억은 눈물로 번지고 눈물은 울음을 불러와 결국은 엉엉 소리내어 울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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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그 기억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짓눌렀다. 길을 걷다가도 울었고 눈물이 멈추지 않으면 명치가 조여와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게 되었다. 호흡곤란과 불면증이 무시로 찾아왔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계절이면 더욱 견디기 힘들어졌다.




어린시절이 서러워서 울었고 세 살 때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싶어 울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울지 않고 살 수 있게 될까?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 거야... 다시 과거로 돌아가 제대로 된 어린시절을 다시 살아내지 않는 한 이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이런 생각은 나를 살고싶지 않게 만들었다.




나는 이쯤에서 삶을 멈추고 싶었다. 살아가는 것이 그 자체로 고통이었다. 고통속에서 평생을 숨 죽이며 살아가느니 그만... 이쯤에서 멈추고 싶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16구간

진행 구간 : 자암재(강원도 삼척)-지각산 환선봉-덕항산-구부시령-한내령-푯대봉-건의령-3km이후 비박(강원도 태백)

진행 날짜 : 2011년 11월 13일 일요일

episode.38.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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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부터 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합니다~

내일 다시 만나요^^








파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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